거친 듯한 자연의 매력에 마음을 뺏기다
호놀룰루, 마우이를 다녀온 후에도 마음속에 무언가 아쉬움이 남았다. 하와이는 자연환경으로 유명한 곳인데, 쇼핑과 맛집 탐방만 하지 않았나 싶었던 것이다. 스노클링도 실컷 하고 의도치 않게 하이킹도 몇 번 했지만 자연에 대한 갈증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초록색이 가득한 숲,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조차도 반듯하게 잘 만들어진 듯한 호놀룰루와 마우이의 풍경 이상의 것을 맛보고 싶었다. 새로운 자연의 모습을 만나고 싶었다.
호놀룰루만 보면 하와이는 개발이 정말 잘 된 휴양지다. 하지만 주내선을 타고 다른 섬을 가보면 하와이는 아직 개발되어야 하는 곳이 많구나란 생각이 들게 된다. 마우이를 볼 때도 느꼈지만 빅 아일랜드는 날 것의 모습이 아직도 있었다. 오히려 웅장한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한구석을 겨우 차지하고 살고 있는 느낌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빅 아일랜드는 아직도 화산 활동 때문에 섬이 계속 커지고 있는 섬이다.
다른 섬들은 하와이 언어로 불리는데 왜 빅 아일랜드는 영어 이름일까? 그 이유는 원래 빅 아일랜드의 이름이 하와이였기 때문이다. 섬 전체를 묶어서 하와이라 불리다 보니 결국 하와이라 불리던 섬은 이름을 뺏긴 채, 모습대로 빅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섬 입장에서는 약간 억울할 만도 한데, 여봐란듯이 몸을 불리고 있는 걸 보면 꽤나 느긋한 성격인듯하다.
이름 그대로, 빅 아일랜드는 규모가 너무 커서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원래 여행을 떠나면 이곳저곳 싸돌아다녀도 지치지 않는 우리 부부도 빅 아일랜드를 여행하면서 몹시 지쳤다. 하루에 차로 2~3시간 이동은 기본이었으니까. (앨범에도 도로 사진이 정말 많은 걸 보니 차를 정말 오래 탔다) 차를 타는 것에 너무 지친 우리는 다음에 빅 아일랜드에 가면 한 곳에만 주야장천 머무르자고 다짐했다.
빅 아일랜드의 관광지는 코나와 힐로라는 두 구역으로 나뉜다. 섬의 양쪽 끝에 자리 잡은 이 지역은 같은 섬이 맞나 싶을 정도로 풍경과 날씨가 확연히 다르다. 심지어 공기조차 다른 기분이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코나는 커피와 골프 코스가 유명한 곳이라서 그나마 번화가의 느낌이 나는데, 힐로는 숲이 우거져 있고 아직 개발이 덜 된 정글의 느낌이 든다, 정도?
커피와, 맥주와, 아무튼 즐겁기만 한 코나
코나 지역에서는 커피 농장 투어가 유명하다. 농장 투어도 가지각색인데, 예약이 필요한 곳도 있고 그냥 들러도 상관없는 농장도 있다. 세계 3대 커피로 꼽히는 코나 커피를 격식 없이 체험해 보고 싶어서 아무 농장이나 들렀는데, 갑자기 투어를 모집하고 있다? 알고 보니 그 농장은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면 즉흥으로 투어를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엉겁결에 미국인들과 우르르 모여 영어 가이드를 들었는데 그래도 쉬운 영어로 차분히 설명해 줘서 듣기 편했다. (커피 정보와 영어 듣기 평가가 함께 진행되는 느낌이었지만) 추수하는 철이 되면 직접 커피도 딸 수 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철이 아니라서 커피나무와 커피 제조 과정만 열심히 듣고 왔다. 그래도 뭐, 제법 즐거웠던 기억이다.
코나는 커피뿐만 아니라 맥주도 유명하다. 제주도처럼, 화산이 있는 지역이어서 물 맛이 달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맥주가 맛있다. 원래 찾아갈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코나 브루잉이라고 이름이 붙었으니 공장은 당연히 코나에 있었고, 우리가 지금 코나에 있잖아? 그래서 찾아가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니까 당연히 투어도 신청해 들었는데... 커피 농장만큼 감동적이었다. 국내에서도 브루어리를 몇 번 들른 적이 있었는데 이곳은 국내와 확연히 다르다. 역시 미국답게, 그리고 빅 아일랜드답게 컸다.
따로 한국어 가이드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영어 가이드를 들었는데 커피 농장보다는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서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퍽 재밌었다. 그리고 이곳을 들른 가장 큰 이유! 투어 마지막에 시음회가 있다. 시음회에서는 맥주마다 제조과정과 맛에 대한 설명이 같이 진행된다. 정보도 훌륭했지만, 가장 좋았던 점은 한정판 맥주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맥주 맛이 이렇게 다양하고 맛있을 수가 있나 싶어서 쉴 새 없이 홀짝거렸는데 결국 취해서 얼굴이 시뻘게지고 말았다. 부끄럽네요. 역시 낮술이 제일 무섭습니다.
자연의 위대함을 깨닫다, 화산 공원
섬에서 남부로 내려가야 그 유명한 화산 공원이 있다. 빅 아일랜드를 계속 넓히고 있는 주범이 있는 곳이다.
빅 아일랜드까지 왔는데 화산 공원을 안 보는 건 예의가 아닌듯싶어서 갔는데... 안 갔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만큼 멋진 곳이었다! 와, 분화구에서 연기가 풀풀 뿜어 나오는 모습이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화산에서 나오는 유황 특유의 냄새는 잊기 힘들었다. 화산이 터지면서 흐른 화산재와 용암들이 굳은 땅은 지구가 아닌 듯한 모습이라서 신비로웠다. 이 시커먼 땅에서 나무가 자란다. 죽은 땅처럼 보이지만 다시 생명을 틔우는 기반이 된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까맣고 까만 땅의 반대편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화산이 생명을 죽이지만, 또한 거름이 되어 생명을 태어나게 한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SF 영화의 악당들이 흔히 내뱉는, '탄생을 위해서는 먼저 파괴가 필요하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모든 것은 눈으로 직접 느껴봐야 알게 된다.
아름다운 힐로와 죽음의 와이피오 밸리
힐로에서 딱히 한 일이 없는데 왜 난 힐로가 더 좋죠?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숲이 많아지는 것부터 마음에 쏙 들어서 그냥 좋게 느껴졌나 봅니다.... 힐로에서는 그림 그리고, 산책하고, 주변의 소소한 풍경을 즐긴 것이 다였다. 그래도 좋았지만, 관광지 한 군데라도 더 들러야할 거 같아서 북부에 있는 와이피오 밸리를 갔다.
이곳에 가기 전 여행 정보를 찾아보니 와이피오 밸리는 험난한 길이 많아서, 가려면 사륜구동이 꼭 있어야 한다고 했다. 보통 한국 사람들은 이곳 전망대에서 해변 구경을 살짝 하고 주변에 있는 호노카 마을에 들르는 정도로 여행 코스를 짠다. 하지만 우리는 호기심이 많았고 우리가 렌트한 차는 사륜구동이 아니었다. 전망대에서 구경만 했어야 했는데, 인간은 어리석고 실수를 반복하는 습성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해변에 가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가파른 경사가 이어지는 산을 차없이 직접 내려갔다.
거진 한 시간을 산을 걸어 내려가서 본 해변은 그 어느 곳보다 한적하고 아름다웠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해변은 검은색 모래로 빛난다. 주변에 우리와 현지인 한 커플밖에 없어 조용하기 그지없다. 이런 곳이 있구나, 계속 있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해변까지 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올라가는 일이 생각보다 고되었다. 게다가 난 원피스 차림에 쪼리만 덜렁 신고 있었는데 등산이라? 절대로 못할 거 같은데, 내려왔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파른 경사로를 오르는 일은 죽을 맛이었다. 사륜구동 차도 겨우 올라가는 길을 걸어 올라가려니 오죽할까. 올라가면서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바로 땅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 편이었다. 그렇게 가파른 경사를 억지로 올라가니 땀은 비 오듯 하고, 자꾸 미끄러졌다. 아, 죽겠다. 싶은데 현지인들은 속도 모르고 우리를 보며 용감하다고 엄지 척! 을 해줬다. 보통 트레킹화에 배낭에, 물도 바리바리 싸서 들르는 곳인데 마치 동네 산보 가듯이 옷을 입었으니, 놀랄 수밖에. 그렇게 죽음의 등산을 하고 며칠간 근육통으로 고생했다. 그래도 빅 아일랜드에 간다면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이번에는 사륜구동 차를 꼭 렌트할 것이다.
빅 아일랜드에 가면 대부분 마우나케아 산 천문대에 다녀온다. 일몰과 천문대의 별구경이 정말 멋지다고 하는데... 이미 우리는 마우이의 할레이칼라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일정에 여유가 없어서 다녀오질 못했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오니 마우이에서 몰로키니 섬을 안 갔을 때처럼 후회가 된다. 왜 안 갔을까. 그래서 빅 아일랜드에 다시 가고 싶다. 어디나 여행을 다녀오면 아쉬움이 남고, 이 감정은 다시 여행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자연이 우거진 빅 아일랜드에서는 영감을 받아 작업하는 시간이 많았다. 넋 놓고 있기만 해도 좋은 풍경이 지천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코나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그린다. 풍경을 보다가 사진을 남기고, 사진을 이용해 또 작업을 한다. 전날 차로 이동해서 피곤할 만도 한데, 아침에 늘 일찍 일어나 작업을 하는 일은 늘 즐거웠다. 아무래도 맑은 자연환경 속에 있어서 지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여행 사진을 보면서도 그립지만, 작업해놓은 이미지를 보면 다시금 빅 아일랜드가 그립다. 좋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