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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 Mar 22. 2022

테니스 대회는 꼭 나가야 합니다

4. 테니스 대회 



나의 첫 대회였던 바볼랏x반종의 포토존. 2승2패의 성적을 거뒀다.








기회는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구력 일 년 반이 지난 시점에 내 테니스 실력이 어디까지 왔는지 가늠해보고 싶어 대회를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다.    













“내일 대회 나갈래?”     








같이 나가기로 한 멤버가 개인 사정으로 출전을 못하게 돼 급히 혼성복식 파트너를 구하고 있는 클럽 지인이 있다며 내게 출전 의사를 물어온 것이다. 고민하고 말 것도 없었다. 다음 내 글감이 ‘테니스 대회’였는데 천운이 아닌가. 사실 구력이나 실력으로도 테린이 대회에 나갔어야 했으나 난 우선 대회를 나가고 싶었고, 올림픽처럼 참가에 방점을 찍었다. 게다가 남자분은 대학 동아리 출신에다 잘 친다고 하니 나야 경험도 쌓고 많이 배울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대회 당일, 컨디션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와인 한 병 마시고 새벽 2시 30분쯤 잤는데, 아침에 처리할 일이 있어 일찍 일어났다. 설레는 건 아닌데 신경이 쓰여 중간에 자주 깼고, 늦게까지 먹은 안주로 속은 더부룩했다. 콜라에 빵을 하나 먹고 대회장으로 출발했다. 출전 시간이 적혀 있었는데, 잘 몰라서 50분 정도 일찍 왔다. 현장 분위기도 느끼고, 자리에 앉아서 시작한 팀들이 어떻게 치는지 봤다. 대부분이 나보다 잘 쳤지만, TV나 유튜브 동영상에서 보던 압도적인 실력은 아니라 해볼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보통 대회 나가기 전에 파트너끼리 합을 몇 번 맞춰본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렇게 당일에 처음 본 사람과 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을까란 의구심과 함께 이런 마음조차 욕심인가란 생각이 들 무렵 파트너가 도착했고 몇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곧바로 코트로 향했다. 예선에서 탈락하면 한 게임하고 집에 가야 하는데, 이곳은 예선에서 세 팀이 겨뤄 최소 두 게임은 보장해주니 6-0(육빵)만 안 되게 최선을 다하자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경기에 들어갔다.      



첫 팀은 전 팀을 이긴 실력으로도, 나이로도 내공이 있는 팀이었다. 시합 전에 가볍게 몸을 푸는데 딱 1분만 쳐봐도 알지 않나. 나보다 잘 치는지 못 치는지. 여자치고 세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내 스트로크가 상대 여자분의 발리로 툭툭 다 끊기고, 고수만이 할 수 있는 힘 뺀 테니스를 구사하는 걸 보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보고 스매시 연습하게 공 좀 띄어보라고 하는데 아직 로브도 안 배운 나 같은 테린이가 피딩볼을 제대로 주겠는가...... 공 몇 번 날려 먹다가 경기가 시작됐다.      




상대편 남성분은 슬라이스를 잘하고, 발리 각이 좋아 받기 상당히 힘들었는데 의외로 여성분 공이 받을만했다. 발리로 들어오면 밀리기 때문에 상대편 베이스라인 가까이까지 길게 치려고 했고, 파트너가 워낙 잘해서 타이브레이크까지 갔다. 파트너가 경기 중간중간 세심한 조언도 해주시고, 집 나갈 뻔한 내 멘탈도 챙겨주셔서 많은 도움이 됐다.      




일례로 클럽에서나 지인들끼리 칠 땐 경기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공을 주우러 가서 빨리 오려고 했는데, 파트너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급하게 뛰어오면 게임도 급하게 하게 된다며 천천히 와도 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게임에서 공 주울 때 뛰어다니는 사람이 나밖에 없더라. 소소한 조언이었지만 이후로 숨을 고르고 좀 더 여유 있게 게임을 하게 돼 내겐 꿀팁이었다.     




내가 공을 주우러 다녀와도 본인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꼭 내 쪽으로 와서 사기를 북돋아 줬다. 잘 치면 잘 치는 대로, 못 치면 못 치는 대로 무슨 말이든 건네주셔서(정신이 없어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분위기가 좋았고, 한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도 내 실력을 보면 타이까지 갈 일이 아닌데 가서 살짝 당황스러워한 듯했지만, 결국 졌다. 사실 이길 거라고 생각 안 했고, 6-0이나 당하지 말자란 마음이 컸던 터라 나름 선방한 기분이 들었다. 파트너 분도 이긴 팀이라 잘한 거고, 몸 푸는 게임이라고 생각하라고 해서 큰 부담감은 없었다.      




두 번째는 앞 팀과 겨뤄 패한 팀과 경기를 했는데, 상대방 여자분이랑 몸을 푸는 순간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로크나 발리가 약했고, 아까 나처럼 본인이 더 못 친다는 걸 느꼈는지 살짝 위축돼 보였다. 남자분은 볼도 셌고, 파트너에 비해 월등히 잘 쳤다. 승기를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역시나 경기는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면서 접전을 벌였다. 내 파트너는 “상대가 못 치면 오히려 이기기가 힘들다”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이해를 잘 못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는 분?)    



 

막상막하의 승부가 펼쳐지자 상대편 남자분이 발리를 하러 앞에 서 있는 내 몸에 때리기 시작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그것인가’란 생각이 들면서도 빡침이 조금씩 올라왔다. 얼굴에는 안 맞았으나 센 공에 허벅지를 맞았다. 그래서 파트너에게 “너무 대놓고 제 몸에 치는데요?”라며 약간 공감 내지 분개를 바라며 말을 건넸는데, 예상외에 대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래 그렇게 쳐요. 뒤에선 나름 잘 받으시니까 앞에서 발리가 잘 안 되면 뒤로 좀 물러나셔도 돼요”      




멘탈 코치의 조언에 나는 금방 평정심을 찾았고 뒤로 물러나 경기 운용을 했다. 만약 파트너가 동감하며 같이 화를 냈다면 나는 씩씩거리며 적개심에 불타 침착하게  경기에 임하지 못했을 것 같다. 결국 우리가 이겼고, 24강에 올랐다. 예선 통과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결과에 얼떨떨했다. 그분과 내 지인이 와서 음료도 사주고 응원도 해주면서 큰 힘이 됐다. 보통 대회에 나가면 대기시간이 길다고 하는데, 여긴 운영을 너무 잘해서인지(?)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계속 다음 경기에 투입됐다. 두 게임 다 타이까지 가서 힘들었는데, 혼이 나가는 줄 알았다.     




다음 게임에 곧바로 투입됐고, 우리 상대팀은 미리 몸을 풀고 있었는데 두 분 다 실력이 무난했다. 접전을 벌이게 되니 분명 여성분 공인데 남성분이 나서서 “비켜! 비켜!”이러면서 자신이 공을 처리하려고 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러를 해서 실점을 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기세가 약간 꺾였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파트너에게 물어보니 원래 혼성복식은 남자 커버 범위가 넓다며 저렇게 친다고 했다. 그러나 여자의 공이 명약관화하고 분명 잘 칠 수 있는 실력을 갖췄는데, 남자가 너무 무리해서 치려는 게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은 듯했다.    





초보다 보니 어떤 게 내공이고 상대 공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어 물어보니 혼복에서는 자신이 확실히 커버해 자신 있게 칠 수 있는 공이 아니면 파트너에게 맡겨도 된다고 했다. 교통정리가 돼서 그 뒤로는 애매하면 파트너에게 넘겼고 그분은 동에 번쩍, 서해 번쩍하며 커버할 수 없을 것 같은 공도 곧잘 커버해줬다. 멋진 위닝샷도 많이 나와 감탄하면서 봤다. 혼복은 여성이 상대방 공격으로 이어지지 않게 공을 넘기는 수비적인 플레이가 일반적이라 자기 몫을 다하는 여성복식과는 성격이 달랐다. 위닝샷도 대부분 남자 파트너가 했다.      




마지막 경기는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연배와 내공이 있는 분들이었는데 모든 기술을 다 노련하게 구사하는 걸 보고 ‘저것이 바로 구력이구나’했다. 특히 남자분은 왼손잡이였고 볼의 방향을 예측하게 힘들었다. 그 전 팀들에 비해 월등히 잘 친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두 분 다 실력이 비등해 밸런스가 좋았고, 이 때문에 상대적 약자가 없어서 누구에게 쳐도 에러가 잘 나오지 않아 살짝 당황했다. 이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6대 4로 아쉬움을 남긴 채 졌다.      




파트너와 처음 본 사이였기에 합을 맞춰본 적도 없고, 대단한 작전을 짠 것도 아니었다. 이날 (나 혼자 짠) 내 작전은 두 가지였다. 1. 내게 오는 공은 무조건 에러 하지 않고 넘긴다. 2. 넘기되, 상대방에게 찬스 볼이 되게는 주지 않는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공 하나하나에 집중한 게 좋은 성과를 낸 것 같다. ‘존버’ 하다 보면 기회는 왔다. 파트너는 내가 ‘부처 테니스’처럼 첫 대회인데 떨지 않고 침착하게 잘 쳤다고 칭찬해줬는데, 멀티가 잘 안 되는 내 성격상 코트에서 공밖에 안 보여서 그랬던 것 같다.      




대회 경험이 풍부했던 파트너에게도 많이 배웠다. 친한 사람끼리 출전해서 서로를 탓하며 의가 상하는 경우도 많다던데 난 역시나 첫 게임처럼 첫 대회도 좋은 분과 만나 좋은 경험을 했다. 다만 혼복 특성상 남성 파트너에게 의존도가 커서 여복처럼 내 몫을 커버하려는 적극성은 조금 반감된 것은 아쉽다. 이 때문에 코치도 지인도 왜 혼복으로 대회를 처음 나갔냐고 뭐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일단 나갈 수 있는 대회를 나간 것뿐.   


대회 당일 전경. 경기 전 몸을 풀며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고, 대응 전략을 짤 수 있다. 


  

혼복만 하다 보면 나중에 파트너가 잘해서 이긴 건데 자기가 잘 치는 줄 알게 된다고 하던데 유의해야겠다. 나도 이번 게임이 파트너 버스에 잘 탑승했을 뿐 절대 내 실력이 아니라는 걸 안다. 복기를 통해 플레이를 뒤돌아보고, 실력 향상에 더욱 정진해 다음에는 여복으로 나가 내 몫을 다하는 보다 적극적인 게임을 해보고 싶다. 승패가 결코 실력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란 점도 재밌었다. 일례로 카드 게임에서 좋은 패를 가지면 이길 확률이 높을 수 있으나, 패가 안 좋더라도 현명한 플레이를 하고 운이 작용하면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클럽에서 치는 ‘즐테’와 달리 혼신의 힘을 다하는 ‘빡테’의 묘미를 알게 된 날이었다. 생각보다 내 맨탈이 강하고, 승부사 기질이 있다는 것도 대회에 나가지 않았으면 몰랐을 터다. 정체기에 있거나, 자신의 기질을 알고 싶거나, 내가 어디쯤 왔는지 의문이 들 때 대회는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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