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 동호인들은 둘이 치는 단식보다는 두 명이 한 팀이 돼 승부를 겨루는 복식 게임을 주로 한다. 성비에 따라 여성복식(여복), 남성 복식(남복), 혼성복식(혼복)이 꾸려지며 각각의 특색과 매력은 조금씩 다르다. 어떤 사람이랑 치는지도 중요하지만, 성별에 따른 분위기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내가 가입한 클럽들 가운데 한 클럽은 여성회원이 많아 주로 여복을 하는 곳이 있고, 다른 한 곳은 여성 회원이 부족해 거의 혼복을 한다. 난 혼복보다 여복에서 좀 더 집중하고 진지하게 임하게 되는 편인데, 이는 ‘제몫하기’라는 책임감에서 기인한다. 플레이어별로 실력 차이가 월등히 나지 않기에 일단 내 자리를 잘 지키고, 내게 온 공은 무조건 커버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강하다.
여복을 주로 하는 클럽에선 다들 나보다 구력이 길고, 그로부터 오는 노련함이 있다 보니 발리 찬스 볼의 기회를 잘 놓치지 않는다. 전위(앞에 있는 사람)에게 잘못 줬다가는 빈 공간에 공이 콕 박혀 파트너에게 미안한 실점 상황에 놓인 일도 많았다. 전략적으로 치려하고 오는 공에 매번 최선을 다하다 보면 나에게든 파트너에게든 위닝샷(Winning shot)의 기회가 왔고, 잠깐 딴청을 피우거나 생각 없이 공을 받아치면 봐주는 것 없이 필패하는 직결 심판의 장이 열렸다.
‘제몫하기’를 하려다 보니 무리한 포칭보다는 수비적인 플레이가 이어지면서 랠리가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많다. 내가 경기 흐름을 끊으면 안 되겠다는 압박감에 ‘존버’를 외치며 집중하다 보니 끈기도 생긴다. 위닝샷을 잘 구사하는 것도 좋지만, 내가 끝내는 공보다 ‘킹메이커’처럼 파트너에게 찬스 볼을 많이 만들어 주는 사람이 각광받는다.
엇비슷한 실력의 구력자가 치다 보면 상대가 어떻게 플레이할 것인지도 대충 읽힌다. 내가 서비스 라인으로 들어와 파트너와 네트플레이를 하려고 하면 누가 칠지 애매하게 센터로 공을 보낼 것이란 걸 느낌이 온다. (알지만 종종 당한다) 내가 한 번은 백핸드 다운 더 라인(down the line)으로 멋있게 치려했는데, 공이 속절없이 네트에 처박혀 머쓱했던 적이 있다. 상대측 전위였던 지인은 바로 "나 공격하려고 했지?ㅎㅎ"라며 내 의중을 파악하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멋진 샷을 쳤을 때 칭찬받는 것도 뭔가 상급자나 선배가 아니라 동등한 동료나 친구로부터 인정받는 느낌이라 색다르다. 혼복에서는 우리 팀 사람이 상대편 고수에 대해 '저분 오늘 포핸드 되게 좋지 않아?‘란 칭찬을 하면 무한 긍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여복에서 나와 실력이 엇비슷한 것 같은데 칭찬을 하면 '그렇다'라고 하면서도 '내 포핸드는 어떨까? 나도 좋다는 소리 듣고 싶어!!'란 생각이 든다. (인정 욕구 폭발)
여복은 흔히 '아기자기'하다고 하는데, 정말 사전적 의미처럼 잔재미가 있고 즐겁다. 깨부수기 요원한 '최종 보스'가 등장하는 판이 아니라 적당히 싸워볼 만하고 한 단계씩 밟으며 무찌르는 맛이 있는 판 같은 느낌이랄까. 대신 지면 '이길 수 있었는데'란 아쉬움은 더 큰 것 같다.
혼성복식은(내가 말하는 혼성 복식은 동등한 실력의 남녀보단 남자가 더 잘 치는 경우를 말한다. 대개 이 케이스가 많은 것 같다) 정말 재밌거나 정말 재미없거나 둘 중 하나다. 어떤 실력의 파트너보다 어떤 스타일의 파트너를 만나느냐가 좌우된다. 아무리 실력자라도 자기가 모든 공을 다 쳐버리고 여자를 허수아비처럼 세워놓으면 환영받지 못한다.
한 달 전쯤 오픈부 다수 우승자인 한 남성분과 파트너를 했을 때 내가 딱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내공 같은데 자꾸 다 쳐버리니까 적극적으로 하려다가도 점차 파트너에게 맡겨버리면서 수동적으로 치게 됐다. 애매한 공일 때는 ‘이걸 쳐야 해 말아야 해, 잘 치니까 저분이 치려나’하고 고민하다가 놓치기도 했다.
사실 이런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에 내가 혼성복식으로 처음 테니스 대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코치님이 강하게 만류했다. 혼복에 익숙해지면 여복만큼 자기 볼을 열심히 안치는 버릇이 들 수 있고, 공간 커버 범위도 좁아진다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동호인 친선게임에서도 저런데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대회에 나가면 더하지 덜하진 않을 것 같긴 하다.
사실 남성 고수 입장에서는 경기 운용의 재미를 위해선 완급조절이 필연적이다. 또, 세게 쳐도 난리, 약하게 쳐도 난리인 까다로운 여성들이 간혹 있어 비위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한 여성 지인은 “봐주면서 살 살치는 게 싫다”라고 한 반면, 다른 지인은 “세게 치면 받기 힘들고 게임 운영이 잘 안 된다”라고 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중요한 것은 공을 치는 ‘세기’보다는 ‘흐름’인 것 같다. 본인 원래 스트로크대로 세게 치더라도 랠리를 이어가도록 게임 운용을 하면 재밌는데, 번번이 포칭을 해서 한 두 번 만에 공이 뚝 끊기게 하는 경우가 밉상이었다. 같은 클럽에도 칠 때마다 네트에 바싹 붙어서 파리채처럼 공을 톡 쳐버려 맥 빠지게 만드는 지인이 있다. 자기 딴에는 위닝샷이고, 발리로 끊어준다고 생각할 수 있기에 뭐라고 말을 하기도 참 애매하다.
사실 잘하는 사람은 충분히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재밌게 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배려’를 해주는 것이기에 초보 입장에서는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의 빚이 있다. 경기 운용을 노련하게 하는 남성 고수분이랑 혼복을 하면 뛰면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공을 주고, 흐름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경기 내용도 있는 진짜 '즐테'(즐거운 테니스)를 한다.
그러나 가끔 너무 시시하다는 듯이 경기가 시작돼도 멍하니 서있는 사람도 있다. 대충대충 하다 보니 다른 사람도 기운이 빠지고 열심히 치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반면, 승부욕이 강해서 약한 사람을 집중 공격하거나 여자 몸에 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다행히 이런 케이스는 듣기만 했지 실제로 보진 못했다.
남성 복식은 내가 여자라 쳐본 적은 없지만 옆에서 보기로는 박진감이 있고 승패가 빨리 결정돼 경기가 속도감이 있는 것 같다. 완전한 남성 복식은 아니나 모두 남성에 나 혼자 여성인 게임을 몇 번 해봤는데, 처음엔 나에게 공을 약하게 주다가 몇 번 잘 넘기니 나중에는 막 줘서 센 공 받는 연습이 돼서 좋았다. 4개월 동안 안 끊어지던 스트링이 댕강 하고 끊어지고, 힘 있는 스트로크를 구사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공이 전반적으로 빠르고 세다 보니 발리 하러 나갔다가 눈탱이 밤탱이 될까 봐 쫄아서 자주 뒤에 서있었다.
여전히 어디 서야 하는지 정확히 모르고 내가 쳐야 하는 공인지 아닌지도 혼란스러운 테린이지만, 각각의 매력을 가진 여복과 혼복은 정말 재밌다.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하는데 잘 친 날은 곧 대회에 나가 입상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들뜨고, 못 친 날은 발전 없고 재능 없는 플레이어가 된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진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나희도가 발레를 그만두려는 자기 딸에게 “잘 생각해봐. 발레가 좋았는지 칭찬받는 게 좋았는지. 칭찬받는 게 좋았다면 그만둬도 돼. 발레가 좋았다면 다시 생각해봐”라는 대사가 나온다. 권태기에 살짝 빠지기도 했고 나도 곰곰이 테니스가 좋은 건지 잘 친다고 칭찬받는 게 좋은지 생각해봤는데, 칭찬받는 것도 테니스도 둘 다 너무~ 좋으니까 계속 가야겠다 ^^ 놓치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