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게임
결국 테니스에서 레슨을 받든, 클럽을 들든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게임’이다. 개인 기호에 따라 상대와 공을 지속적으로 주고받는 ‘랠리’를 선호할 순 있어도 결국 투수가 마운트에 서듯 모든 플레이어는 코트에서 점수를 계산해 승패를 내는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간 갈고닦은 기량을 마음껏 뽐내고 싶은데, 현실은 처참했다. 아웃이 안 되게 하기 위해 풀스윙보다는 반(半) 스윙을 하고, 공을 넘기기에만 급급하다 보니 자세가 무너졌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충분한 기간 동안 레슨을 받아 바른 자세를 체화할 때까지 게임을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한다. 내가 치는 행태를 볼 때 매우 지당한 말이나 자중하기엔 게임이 너무 재밌다. 일상에서 무언가를 성취하려면 여러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테니스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두고 주체적인 판단과 실행을 통해 즉각적인 성취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얼떨결에 첫 게임을 시작했다. 아빠께 한창 원포인트 레슨을 받고 있는데 잠깐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평소 안면이 있던 옆 코트 분들에게 정중히 한 게임을 부탁하시는 게 아닌가. 당시 게임을 해본 적도 없고 아무 언질도 없던 터라 “갑자기?”라는 말이 앞니 너머로 튀어나왔다. 한 분은 아빠랑 오랫동안 클럽 활동을 하셨고, 다른 분은 엄마의 직장 동료로 안면이 있었기에 다들 흔쾌히 수락하셨다. 남성분은 은배, 여성분은 전국 대회 다수 우승자인 ‘슈퍼 국화’였다. 나는? 6개월 차 테린이...^^
느지막이 재능을 발견한 천재가 혜성처럼 나타나 테니스계를 재패하고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된 서막을 알리는 날이었다.....고 하고 싶으나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6-0. 처음 하는 게임이라 경기 흐름을 따라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대단한 분들이 나 같은 테린이를 위해 재능 기부를 하고 계신지 몰랐다. 매가리 없는 초보 볼은 단번에 위닝샷으로 끝낼 수 있으셨지만, 뛰면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노력과 도전을 요하는 공을 계속 주셨다. 발리도 안 되던 때라 스트로크로 주야장천 쳤고, 점수 매길 정신도 없어 오는 공을 열심히 넘기다 눈치껏 한 세트가 끝난 것 같으면 상대편에게 공을 건넸다. 아빠랑 같은 편이라 상대적으로 마음은 편했고, 별생각 없이 열심히 쳤다.
그 뒤로 클럽에 가입하고 여러 곳에 게스트로 다니면서 수 없는 게임을 했지만 좋은 기억을 안겼던 첫 데뷔 무대(?)의 잔상은 여전히 또렷하다. 그러나 더러 자신이 나보다 잘 치기 때문에 같이 치기보다는 ‘쳐 준다’는 티를 팍팍 내던 몇몇 사람도 있다. 모든 계급장을 떼고 실력이 가장 중요한 곳이 코트 위라 하나 너무 생색낸다 싶으면 가끔 고까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테니스는 공을 칠 상대가 반드시 필요한 ‘같이하는’ 운동이다. 이 때문에 같이 몇 번 게임을 하다 보면 인성이 나온다. 나는 실력이 미천해 남에게 뭐라 할 처지는 안 되고 내 실수로 실점했을 시 크게 자책하는 편이다. 편한 사람들이랑 치다 보면 “아이씨”(욕은 안 했다)가 입 밖까지 나왔는데, 친했기에 웃고 넘길 일이었지 처음 가는 데서 저랬다면 도른자('돌다'의 의미를 사용해 '돌은 자'를 연음법칙으로 발음한 것) 취급을 당했을 수도....
나처럼 자책 타입이 있다면 남 탓 타입도 있다. 나의 실수엔 관대하고 파트너의 실수엔 크게 화를 내며 무안을 주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상대방은 더욱 위축돼 실수가 잦아지고, 분위기가 험악해져 서로의 합이 잘 맞지 않으면서 경기 운용이 망가진다. 코트에서 큰소리까지 내다 서로 마음이 상해 몇 개월 동안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이 정도까진 아니지만 코트에서 한번 실점을 했는데 아는 동생이 “아 거기 서있으면 어떡해요!”라고 대놓고 큰소리로 면박을 줘 민망했던 경험이 있다. 맞는 말인데 살짝 혼나는 것 같고 벙 찌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난 엄청나게 매너가 좋은 파트너였나 회고해보면 그건 또 아니다. 훈수 두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같은 팀원의 공을 잘 못 넘겨 게임 진행이 원활히 안 돼 김이 샜던 기억이 있다.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갈수록 줄어드는 내 ‘파이팅’ 소리와 ‘괜찮습니다~’라는 말로 분명 눈치챘을 테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나 같은 테린이가 성장하는 데는 고수 분들이 해준 수많은 게임이 자양분이 됐을 텐데 역지사지는 언제나 삶에서 큰 숙제다.
대단한 분들과 첫 게임을 했을 땐 뭘 몰라 열심히만 했는데, 최근 슈퍼 국화 등 엄청난 구력자 분들과 함께 치니 너무 위축된 나 자신을 발견했다. 게다가 다른 클럽 게스트로 참석해 처음 본 사람들이라 몸도 잘 안 풀렸고, 실력도 낯을 가렸다. 하지만 뭐라고 하시지도 않고, 귀에 쏙쏙 박히는 간략한 조언들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처럼 어제의 갑이 오늘의 을이 될 수 있고, 사이가 좋은 베프라도 마음이 상하면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다.
사람마다 구질이 다르듯 경기 스타일도 제각각이다. 내 지인은 확실한 기회가 아니면 공격하지 않고, 일단 공을 차곡차곡 넘기는 빌딩샷(Building shot)을 잘 구사한다. 그러다가 상대를 공격하기 좋은 찬스 볼이 오면 결정적인 타구인 위닝샷(Winning shot)을 날려 득점한다. 빌딩샷을 치는 와중에 성질 급한 상대가 공격을 시도하다가 실수하는 경우도 많다.
반면, 나는 모든 공을 위닝샷처럼 치려고 한다. 코치님이 공치다 보면 성격이 나온다고 하셨는데, 성질 급하고 효율 중심적이라는 게 들통났다. 초기에는 세게 쳐서 끝내는 게 잘 치는 거라 생각했는데, 구력이 쌓이면서 아니란 걸 알았다. 매번 공을 세게 치려다 보니 몸에 힘이 들어가서 먼저 금방 지쳐 나가떨어지거나, 상대가 내 공을 발리로 치면 반작용으로 그만큼의 빠른 속도로 공이 내게 다시 오는 역공이 되기 때문이다. 코트에 있다 보면 강타자, 발이 빠른 사람, 근성이 있는 사람 등 제각기 강점과 여러 성격을 지닌 다양한 플레이어들과 만난다.
테니스는 타구 방식과 위치 선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수백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운동이다. 어디에 서서 어디로 치느냐를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빌딩샷일지 게임을 끝내려는 위닝샷일지도 선택해야 한다. 자기 주체적인 판단을 하는 운동이라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이 때문에 성질대로 치면 안 되고 생각한 대로 쳐야 해 성질을 죽이는 효과까지 있다(?). 여기에 복식은 파트너란 변수까지 고려해야 한다.
파트너가 잘 치면 내 자리를 잘 지키면 되고, 파트너가 못 치면 내가 많은 범위를 커버해야 한다. 파트너가 안정적인 수비 스타일이라면 내가 좀 더 공격적인 위닝샷으로 포인트를 많이 내려고 하면 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위닝샷을 칠 수 있는 볼을 만들어 주려고 하면 된다. 여기에 상대편의 주요 전략과 성향도 파악해야 하니 꽤 생각을 요하는 지능 싸움 같기도 하다.
동호인 테니스는 ‘즐테’(즐겁게 테니스)란 말처럼 크게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서로 재미있게 게임을 즐기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작전 회의나 치열한 수 싸움이 전개되진 않는다. 오히려 과한 승부욕을 좀 껄끄러워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면 이기는 게 지는 것보다 나은 게 대다수 사람의 마음 아니겠나. 그래서 라인 시비, 파트너와의 시비 등 갈등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적이라 할 수 있겠다. 같이 치면 이겼는데도 묘하게 기분이 더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더라도 유쾌한 사람이 있다. 난 후자가 돼보려 한다. 테니스가 귀족 스포츠로 불리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결국 귀족처럼 실력이란 특권을 가졌을 때, 특권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력적 약자'를 배려하라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라고 제멋대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