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va UNV들의 명예을 걸고 몇자 적습니다
1993년 한국청년해외봉사단원파견시에는 국내 파견교육을 3개월하면서 다양한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파견국의 열악한 곳으로 가기전에 다양한 정보을 접하며 열대 지방은 말라리아등이 있다고 배웠지 각 나라의 풍토병이 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어디엔선가는 다리의 종아리가 붓는 풍토병에 걸린 선배 단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농업 분야로 파견되는 저는 흙에 대한 염려을 해서 빨간 장갑과 방글라데시의 단원들을 설득해 파상품 주사을 맞고 방글라데시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방글라데시에는 가보니 개들이 피부병에 걸려 거리에 그냥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방글라데시에 5명의 단원을 설득해 광견병예방주사을 맞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나라에는 열병이 이라는 것이 있어서 잘먹고 그늘에서 쉬어야 한다고 햇씁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식사을 할때 녹색채소인 샐러드와 함께 카레을 먹습니다. 소속기관인 아사드게이트원예센타에서는요.
저의 딸이 여름을 거치면서 구토와 열과 설사가 났었지만 의사는 장염이라고 하거나 감기로 치부했는데 저는 집에 에어컨을 키라고 이야기 하고
국립보건 연구원에 들어가보니 엘로우피버. 황열병 증상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국내에 없던 병입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유엔으로 나갈 준비을 하면서 대전적십자혈액협회에서 응급처치교육을 다시 들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응급처치교육은 걸스카웃에서도 고등학교시절 교련시간에서도 배웁니다. 대학에서는 보건학을 수강했고 . 강남의 지역신문사에 일을 할때는 국제기아대책기구나 강남 적십자협회지부을 취재하고 강남지역주부들이 적십자지부건물에서 드레싱을 하는 작업도 도우며 글을 쓰고. 한국적십자협회 본부 홍보실에서 글을 써달라고 할때 거절하지 않고 무료로 글로 써 주었습니다.
어머니가 조산원을 하셔서 아이들의 예방접종이 중요하다고 어머니가 말씀을 하셨고 우리나라는 가정집에서 애을 많이 낳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가정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애기을 조산사들이 받는다고 햇습니다. 수중분만도 하고. 아이의 사주을 좋게 한다고 생년생시을 받아 유도분만이나 제왕절개을 하면 산모의 몸에 안좋다고 햇습니다.
유도분만은 주사을 놓아서 자궁을 열리게 해서 애기을 뻬내는 것이고 제왕절개을 하면 태반이 배천장쪽에 붙어서 잘 안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왕절개을 하게 되면 애는 두명밖에 놓을 수 없습니다. 수술한 부위는 비가 오거나 몸이 안좋아지단다고 했습니다. 너는 애을 낳을려면 자연분만을 해야 한다고 누누히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임신해서 산모가 마음이 편하고 잘먹어야 건강한 아이을 출산한다고 했죠. 산모가 나이가 먹으면 임신중독이 올 확률이 높고 임신을 해서 잘 목먹고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애기을 낳을 무렵에 얼굴이 붓고 다리가 붓고 신발이 안맞습니다.
그러면 맨드라미나 다시마등을 끓여 먹어야 합니다. 가난한 집에서는 잘 먹지도 못하고 마음까지 불안하고 하면 난산을 하게 되는데 애기을 낳고 출혈을 하게 됩니다. 하혈이라고 합니다.
건강하지 않으면 건강한 태아을 낳아도 하혈로 문제가 됩니다. 조산원에서는 하트만을 즉시 투여하고 기저귀로 자궁을 막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종이기저귀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양반집에서는 산모가 임신을 하면 부부관계을 조심히 하거나 친정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터넷을 보니 영국이나 외국에서는 부부간에 관계가 아이의 두뇌을 촉진시킨다고 합니다. 무엇인 정석인지는 모르겟씁니다. 부부간에 대화가 많은 부부가 부부관계도 잘 하고 트러블이 적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조산원에서는 애가 태어나고 하혈이 진정이 되면 미역국과 쌀밥을 준비해 산모가 먹습니다. 미역은 해독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따스한 물을 데워 아이의 등을 두들겨 울리고 목욕을 시키고 베넷저고리을 입힙니다.
애기을 낳고서 하루만에 택시을 타고 집으로 갑니다.애을 낳을 때는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 남편등이 같이 와서 손을 잡아줍니다.
아무도 안올시에는 저의 아버지나 제가 들어가 산모와 호릅을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산모의 집을 삼일 정도 방문해서 애기 목욕을 시키고 혈압이나 맥박등을 체크하고 자궁의 상태을 확인하고 능겔이나 영양제을 놓습니다.
집이 따스한지 적당히 살피고 조산원은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와서 애을 받으러 갔다가 출산비는 안받고 오히려 쌀과 연탄을 들여주고 오곤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분들이 산모가 되면 정기적으로 월마다 건강체크을 해서 애기을 낳아야 하는데 산모는 언제 올지 모릅니다. 24시간 대기입니다. 조산원에 한 번도 건강체크을 받으러 오지 않은 산모들이 대분분 조산원에 와서 애기을 낳습니다.
그러다 산모가 죽은 적도 있습니다. 산모가 위험할 때는 곧바로 대학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어머니는 태평동 김조산소을 태평동에 병원이 하나도 없을 때 개업해서
대전시내 조산원들이 난산이면 누구나 엄마을 부르셧습니다. 잠자다가도 가운을 입고 산모가 있다면 내복차림에도 가운을 입고 산모집으로 향햇습니다.
집에서 산모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병원에 가기 힘든 환자들이 주사약을 가져온면 주사도 놓아주고 동네어린이들이 감기가 걸려 찾아오면 1970년대1980년대 가나마이신을 엉덩이에 놓으시고 그후에는 린코마이신을 엉덩이에 놓아주면 감기 뚞입니다.
지금은 주사을 병원에서 의사가 놓게 되어 있습니다. 법이 그렇고 조산원들이 주사나 능겔약, 영양제을사는 것도 불법입니다. 주사을 놓을 수도 없습니다.
영양제는 얼마 안하지만 수공과 이익이 5배이상입니다
수액을 먼저 맞거나 같이 맞아야 하는데 그당시 병원에서는 주로 영양제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고단백 영양제가 혈관으로 들어가면 가슴이 답답하거나 혈관이 아픕니다. 그러면 주사줄의 단추을 조정해서 한두방을 떨어지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팔이 뻐근하면 따스한 물을 능겔주사가 통과하게 하면 됩니다.
능겔이나 영양제을 차게 해서 혈관에 놓으면 안됩니다. 미지근하게 덥혀서 혈관에 나비주사바늘로 꽃아야 합니다. 주사바늘을 손등이나 팔쪽에 꽃고 나서는 수건으로 손등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중고등시절 집에서 어머니가 조산원을 할때 영양제을 맞으러 오는 분들이 계시면 옆에서 환자들의 상태를 보고 주사을 다 맞을 떼까지 곁에 있거나 말 상대을 햇습니다. 산모들과 마찬가지고.
어머니는 왠만한 간호사보다 낳다고 하시고
요즘 산모들은 산부인과에도 주기적으로 가고 각종 영양제을 먹더군요. 어머니들도 같이 움직이고 .
산부인과 홈페이지에는 임신해서 먹을 음식과 안먹을 음식들도 있고 각종 정보가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사회에 나가기전에 연애와 임신과 출산, 육아, 결혼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졋으면 합니다.
제가 애기을 낳다보니 좋은 애기을 좋은 상태에서 태교울 해서 건강한 아기가 갖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이가 하나라 너무너무 속상합니다.그래서 울었습니다.
제가 부탄을 다녀온 후 친구들과 연락이 많이 끊겨 만나지 못할때 충남대 유네스코학생회 써클 동기가 둘째을 낳았다고 해서 안성까지 갔어요. 그때 그 친구가 산후조리원에서 나온지 얼마 안되어 제몸이 허약한 가운데 어머니가 주신 영양제을 하나 들고 써클 동기와 함께 다녀온 수 어머니에거 산후조리원을 하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근로자무료휴게소 자원봉사을 하면서 여성들을 돌보는 산부인과 의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자다 보니 아무에게다 다리을 벌리기는 그렇고 ....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애 아빠을 만나 부산에 내려 갔다가 부동산에서 가져온 부산지역신문을 보다가 그 지역에 국제결혼한 외국인이 많이 산다는 소식을 접햇습니다. 부산 부전동에 외국인 근로자 상담소에 임신한 와중에 자원봉사을 하겠다고 전화하고 가지을 못했습니다.
저에게 임신중독이 찾아와 발이 퉁퉁부어서 고동색부츠가 자크가 안올라 갔지요. 신발이 안맞았어요.
나이 40에 얻은 딸이 아주 귀하답니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죠. 미국에서는 외동아이들의 부모가 모임도 하고 잡지도 만들어 공동체 교육을 합니다.
해외봉사단 다녀오신분들은 나이가 들어서 결혼도 하고 아이을 낳습니다. 늦은 나이에 자식을 낳으면 고생입니다.
대전세종충남커뮤니티에 나가서 후배들에게 재파견과 UNV를 지우너하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도 못했습니다. 혼자 나가는 것보다는 결혼을 했다면 같이 나가야 합니다.
애기가 태어나면 그 아이 돌보느라 피곤하고 바쁩니다. 아이가 나이가 좋 들어야 겠지요.
네덜란드 UNV프로그램 오피셔는 집안이 상인이고 네덜란드 귀족집안 아내와 결혼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내가 먼저 SNV프로그램 오피서로 임지 배정을 받고 남편은 그곳에서 UNV프로그램 오피셔가 공석이 되서 지원해서 UNV프로그램 오피서가 됩니다.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도 10살정도 되었는데 아이들 교육때문에 고민을 많이 햇습니다. 그 분은 일요일 아이들을 데리고 그 나라 운동장에서 축구을 즐기곤 햇습니다.
캐나다 UNV는 배냉에서 일하다 왔는데 아내가 블란서어로 오피스레터 쓰는 것을 도와주었다고합니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올때 캐나다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UNV종료하면 연금인가 실업수당인가을 받는다고 해서 제가 부탄에 돌아온지 얼마 안되서는 코바 홈페이지에 봉사단 임기만료시에도 사회보장이 되어야 한다고 올렸습니다
몽골 산부인과 의사는러시아에서 의학공부을 한 유학파로 딸이 12살인가 했는데 딸이 UNV오피스에 있는 공용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유엔브이 레터을 작성해 주는 것을 도와 준다고 햇습니다.
불가리아 산부인과의사는 아랍어을 하는 중동국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데 딸이 16살인가 햇꼬 그곳에서 영어 공부을 했습니다. 남편은 부탄에 초청비자로 6개월정도 들어와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쿠바에서 온 의사는 부인과 동반해서 아이가 8살정도였는데 임기가 끝나고 곧바로 쿠바에 가지 않고 그곳에서 두달정도 기다리다가 다른 나라로 포스팅되어가고
역시 쿠바에서 온 다른 의사 두분은 UNV로 부탄에 와서 서로 알게되어 결혼을 뒤늦게 하고 애기을 봐줄사람이 없어서 쩔쩔매어서 저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고 했어요. 애기을 볼사람이 없어서 제시간에 병원을 가지 못하다고 저에게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인도약사는 혼자 파견근무나와서 저와 함께 UNV연례회의을 같이 준비 했엇는데 제가 있던 유시팡에서 부탄의 수도 팀퓨로 오는 차편이 없어서 제가 히치하이크을 해서 오기도했는데
속사정을 모르는 UNV프로그램 오피셔는 화을 내곤 했습니다. 오피스에서 팀튜로 나오는 차가 없어서라고 이야기 할 수가 없지요, 그곳은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제가 젊어서 히치하이크도 했나봅니다. 소속기관의 직원 오토바이 뒷편을 타고 나온적도 있습니다.
UN에서 사용하는 영어회화체의 문답등을 적은 에이포용지을 처음에는 저을 혼내키던 UNV프로그램 오피서가 주었는데 부산대학교와 서울 대학교 대학원을 나와 인도네시아 유니세프로 나간 코바 4기 이동주에게 주었습니다. 국제기구에 관심이 있는 분은 문의하세요.
미국에 그나라 SAVE THE CHIldren에 물리치료사로 나왔다가 그나라에서 UNV로 조인한 사람은 그나라 전경련부회장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그 아들의 대학연인과 제가 같이 근무하면서 좀 난처했네요.
미국에 임업전문가로 나온 사람은 미국의 국제 엔지오인 CARE와 에콰도르에서인가 피스코로 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 봉사단인 SNV 임업전문가는 아프리카에서 근무하다 부탄에 단신 부임했고
그 후에 캐나다 원예전문가는 아내와 애기을 안고 부탄에 왔습니다.
부부가 UNV로 나간느 것이 덜 외롭고 대인관계도 많이 맺습 니다.
인도에서는 구와하티지역에서 온 50대 중반분은 부탄 간호학교에 있다가 UNV로 있다가 토임을 맞아 제가 퇴임식겸 파티을 열어 주었습니다.
인도의 또다른 분에 부탄에서 UNV로 있다가 WHO로 근무 계약을 햇습니다.
영국에서 VSO출신으로 다른 나라에서 온 근무하다 온 부부는 아이들이 열살 정도 였어요.
참 제가 유엔브이로 파견되어 한달 후에 호주에서 노부부가 왔습니다. 육십대 중반은 넘은 것 같아서 그 때 추워서 한국에서 받은 내복을 그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제가 온지 얼마 안되어 전경련부회장이 집으로 초대해서 같은 시기에 부부가 된 자기 안들과 물리치료사도 같이 초대해 집에서 식사을 했습니다. 부탄운 가부장적인 사회로 남편은 의장에 앉아서 가족들은 바닥에 앉아서 식사을 해서 너무 놀랫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한국에 간다고 해서 한국에서 한국관광공사에서 가져온 한국관광책자등을 챙겨 간 영문책을 드렸습니다. 저는 한국관광공사에서 관계자을 만난 것이 아니라 홍보부스에서 5개국 언어 서바이벌 키트와 한국관광소개 책자등을 가지고 가 부탄에서 조그마한 파티가 있을떄 그 책자을 유엔브이들에게 보여주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유엔브이로 부탄에 있을떄 대사님이 부탄을 방문했는데 UN의 지시을 따르라며
태권도코치와 궁도코치만 배석했습니다
나섬회회지관계로 3기 김미행을 만나서 회지 컨탠츠을 처음에 만들었는데 제가 꼭지도 정하고 컨텐츠을 바꾸었습니다.
코바4기 토양학 태국 김영표씨도 수고 하셨씁니다. 회지을 만들면서 고려대 부근에서 타이핑해 김영표씨가 하던 커피숍에서 교정을 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1996년 1998년 부탄에서 원예종합사업개발 UNDP 프로잭트을 수행했습니다. 그당시 부탄 유시팡에 RNRC센타은 임업중점센타로 원예파트에 카운터 파트너가 나이트 클럽에서 고향선배인 부탄방송국 촬영깃사와 결혼해 신혼 그리고 애기을 낳아서부탄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이야기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방글라데시에서도 원예센타에 카운더 파트너가 임신과 육아을 해서 좀 힘이 들었습니다. 신경도 많이 쓰고 어떻게 하라고 이야기도 해주고 출산후에는 혼자서 생활하고
유시팡 알엔아이 주말회의에도 참석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임신하면 누구나 민감하죠. 옆에서 보는 사람도 힘이 듭니다. 나도 실적이 있어야 다른 나라로 가지 않겟씁니까? 국내에 들어와서 직장잡기도 쉬울 것이고.
VAO에는 there is no doctor라는 책이 있다고 합니다. 월드프랜즈에도 있을 것으로 봅니다.
언제가 자세히는 이야기 안하고 코바홈페이지에 제안을 했습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있겠습니까? 개발도상국에 가면 왕족들이 참 많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도 제 옆집은 남 방글라데시 힐트랙에 왕족이라고 했습니다.
부탄에서 제 카운터 파트너는 할머니가 왕족이라 할머니이름을 이어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시면 연인관계도 조심하세요. 국제 관계도 냉혹합니다. IMF나 양반이 아니거나 부자가 아니면 행사하기 힘이 듭니다.
미국사람들도 영국이나 유럽사람들 앞에서는 꼼짝 못합니다. 아시아 사람들는 백인들 앞에서 쩔쩔매고 이야기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백인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소리을 듣고도 어울렸습니다. 집에 유엔브이 현지 오피서 전화을 받고 부탄 지방에서 오는 아프리카인, 백인, 몽골, 우크라이나, 하나 못해 현지인과도 어울렸습니다.
그리고 공무원들은 가난합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와도 그렇다고 합니다. 만나자고 하면 다 만났습니다.
연세대에 코바 2기에 연세대에 의사가 있다고 합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국제협력요원으로 박기원씨가 서울의대에서 근무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도 같습니다
행운을 빌겠씁니다
코바4기 방그라데시 첫파견기수 원예 koica에는 작물재배, 초대 국장 박향선
1996년 한국청년해외봉사단 귀국모임 홍보국장 박향선 나눔지 발간. 코바회지 1호 발간
편집자 이름은 적지 않았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고 부탄으로 떠났습니다.
상왕십리 우체국에서 코바회원 250여명에서 보냇씁니다.
참고로 그때는 회장이 공석이었습니다. 2기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얼굴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