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귀국후 남북통일대비교육수료, 북한 유니세프에 전화 못한 후회
요새 집에 있으면서 뉴스도 보고 책도 보면서 깜짝 놀랜다. 북한이 우리나라오 통일을 생각하지고 않고 우리나라도 과거 문재인정부와 같이 통일에 연연하는 것 같지 않다. 북한으로부터 쓰레기가 날아와 남한에 투척된다는 소리에 무섭기도 하다. 하늘이 뻥 뚫여있는 것 아닌가 하며 말이다..
1995년 그래도 한국청년해외봉사단으로 방글라데시을 다녀와서는 서울에서 자유총연맹에서 진행한느 남북통일대비교육도 받고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원예봉사자로 일을 할려고 하는 포부을 갖었었다.
우리에게는 북한은 너무나 먼 나라였다. 가깝고도 말이다. 우리가 자라던 1970년대에서 마루치 아라치라는 영화에서는 김일성을 돼지야수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국민학교에서는 우리나라을 살리는 통일이라고 교육을 하던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에서는 우리나라는 정전이 아니라 휴전이므로 교련을 배우며 고등학교여학생들에게 삼각건법을 묶는 교육등 응급처치교육을 했었다.
1993년 한국청년해외봉사단으로 파견되기전 국내파견교육에서는 우리가 파견될 국가가 가난한 나라들이고 도와야 하며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을 다른 나라에서 배우자고자 한다는 내용과 우리나라가 육이오전쟁때 유엔이 참전해 한국을 도와주고 우리나라가 빈국으로 있을때 국제기구등에서 많이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봉사하러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생활을 동해 문화, 기술교류을 하는것이다. 많이 배워오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우리가 방글라데시에 파견이 되어 북한사람들을 접할 줄을 생각도 못했다. 한국청년해외봉사단에서도 북한교민과 만나면 인사을 해야하는지 그냥 지나쳐야하는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처음에 방글라데시에 나가 각 파견기관으로 파견이 되면서 공문서 작성을 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이 되었다. 그래서 방글라데시 한국청년해외봉사단 코디네이터에게 영문으로 공문을 작성하는 것에 대한 가이드 라인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다 이야기가 나왔다. 방글라데지 주재 한국대사관에는 영문으로 공문을 작성해주는 방글라데시 오피서가 있다고 이야기을 햇따.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가 방그라데시 주재 북한대사관에서도 일을 햇따는 것이다 깜짝 놀랬다.
그리고 같이 파견된 봉사단원이 방글라데시 다카대학에서 방글라 언어코스을 밟는데 북한사람과 함께 방글라언어을 배운다고 약간은 걱정되는 눈빛으로 친구가 이야기했다.그런데 그사람은 참 매너가 좋다고 했다. 차분하고 북한에 의사인가 부인이 있다는 이야기도 하고 했다.
그래서 인지 우리 한국청년해외봉사단원들이 회식으로 그나라 현지 식당에서 식사을 하다가 북한 사투리의 말소리가 들려도 왠지 걱정보다는 친근하게 느꼈지만 그렇다고 나 남한에서 온 사람입니다. 이야기을 해 본적이 없다. 우리는 북한말소리가 들리면 그냥 어 북한사람들이 이 레스토랑에 와 있나봐 하고 지나쳤다. 그렇다고 그들과 마주친 적은 없다.
방글라신문에서 보면 북한에서 온 전문가들이 방글라데시 시골에서 일을 한다는 기사도 접하고 다카시내의 한 지역에서 태권도을 가르친다는 소식도 접했다. 방글라데시는 인민사회주의 국가다. 그래서 북한과 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고 1993년에는 내가 다카의 농업성 카마르바리을 가면 농업공무원들은 자신들은 북한을 더 좋아한다고 이야기 하던 시절이다.
그래도 방글라데시에서 봉사단 생활을 하면서 아 공산국가도 한국과 별다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디나 사람사는 세상은 같구나 하는 생각에 한국에 돌아와서 남북한 통일 대비교윢까지 받게 되었다.
그리고 UNV로 부탄을 가니 내가 KOREA에서 왔다고 하자 그 나라 전직 고위공무원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식사도 대접하고 비디오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사람이 자신은 코리아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여주는데 김일성과 같이 찍은 사진이라 너무 놀랬다. 그런데 부탄이라는 나라에서도 남한을 다녀오신분들은 나에개 상냥은 했지만 집까지 초대는 안햇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북한은 자신들의 우호국가에 어떤 대우을 해주는 것일까 생각도 한 적도 있었다. 물론 두려움도 있었다.
부탄에서 이야기을 들으니 한국계로 미국에 입양가서 그나라에서 부탄남자와 결혼해 부탕에 들어가 그 사람과 아들하나을 두고 헤어진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그나라에서 세계식량기구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했었는데 그 사람과 아들이 둘이 있었고 그녀는 싱가포르로 떠나고 이 남자는 북한으로 발령을 받았서 갔다는 이야기을 들었다.
그년의 첫번쩨 남편은 그나라 총리가 되었다. 나도 유튜브을 통해서 알게되었다. 그 나라에서 그을 만났을때는 핸섬한 젊은이였는데 유튜브에서보니 나이가 많이 들었다. 그 아들이 잘 성장햇는지 모르겠다. 어린 아들이었었는데...
부탄은 그나라 수도 팀퓨밖을 나가 시골로 갈려면 그나라 정부에서 길허가증이 필요했다. UNDP에 근무하는 스위스 여자친구는 북한은 부탄보다 열배는 더 패쇄적이라고 이야기 했다. 미국에서는 앞으로 북한과 남한의 통일이 곹 이루어질것으로 내다본다고 말을 전햇다.
그러나 IMF가 한국에 닥치고 부타에서 한국으로 돌와서 보니 북한과 남한은 두개의 국가로 인정하고 내와을 하는 것이 낳겟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기득권세력은 자신의 입지을 남에게 빼앗기기 싫을 것이고 한국의 젊은이들은 북한을 먼나라로 인식하는 것 같았고 자유총연맹은 남북통일대비교육을 한다는 홍보는 신문에 하지 않았지만 그후에보니 휴일 아침에 남북의 창을 통해 북한의 소식을 전하고 탈북이주민들이 출연하 각종 프로그램으로 북한을 알리는 방송이 이어졌다.
한데 북한의 방송에도 남한에서 올라간 사람들이 남한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남한뉴스을 티비방송에 송출할까? 여러생각이 들었다.
한 무역회사에서 중국심양파견직원을 구한다고 해서 들어가서 북한과 대외무역관계업무을 허가받고 북한사람을 만날 수있는 허가 서류을 외교통상부에 제출했었다.인후보증을 받아서 ...한 친구는 거절하고 한친구는 고맙게도 자신의 주민번호을 알려주었다. 작은 아버지도 알려주시고....
우리나라는 북한과 통상적인 거래인 무역거래시에 한글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있다. 영어로 공식문서가 작성이 된다. 한데 나는 중국심양파견을 앞두고 중국비자까지 받았는데 권고사직을 당했따. 그나라는 공안국사람들이 술을 잘마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여자인고 술도 못마셔서 안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해외봉사단이나 월드프랜즈 국제기구에 파견되는 사람들도 북한사람과 업무로 연계될 수있으니 북한사람을 만날 수있는 허가을 외교부에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싶엇다.
코바 동기가 유니세프로 인도네시아에 나가서 이메일로 연락이 왔다. 북한사람들이 유니세프 사무실에 방문을 했다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냐고 말이다.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나도 부탄에서 UNV로 일을 할때 계약 종료을 앞두고 새로오신 유니세프 대표가 북한에 전화을 했는데 영어을 못알아듣는다며 북한에 전화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너무 놀래서 우리나라 반공법이 생각이 나서 전화는 못하고 나는 남한 사람이라 북한에 전화을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유니세프 대표는 이해을 못하는듯했다. 1998년 7월인가 ?
한국에 돌아와 방송에서 꽃제비 이야기을 하고 하면 나는 무척 괴로웠다. 내가 전화을 해서 북한과 통화을 해서 유니세프의 일을 도왔더라면 북한의 어린이가 행복하지 않았을까?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저렇게 장마당에서 구걸을 하지 않을 터인데
딸아이을 키우면서 어려운 살림에 세이브칠드런에 만원후원을 시작해서 10년이 넘어 감사장도 박도 몇년전부터는 유네세프에 후원도 하고 있다. 이외에도 다른 국제 엔지오에 딸의 이름과 내이름으로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