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일하면서 김치을 못담으며 외국에서 비지니스식당에절을 생각하며
여러 해전 여동생이 아프다고 해서 대전으로 내려 오라고 했다. 서울에서 혼자서 아픈 것 보다는 대전에서 가족들과 어울리는 것이 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술비는 많이 보태주지는 못하지만 내가 버는 돈에서 얼마씩 여동생 통장으로 돈을 보내고 수술날은 어머니와 올라 갈려고 했더니 어머니가 우리는 가지 말고 얼마의 돈을 남동생에게 건내주라고 했다.
그리고 큰 남동생의 아들인 조카가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올라간다고 했다. 군동기도 만난다고 . 조카의 농협통장으로 돈을 보내며 작은 고모의 집에도 가보고 필요한 것이 있나봐서 사주라고 했다.
그리고 몇개월 작은 돈이지만 돈을 보냈다. 나도 힘든 형편이라 큰 돈을 보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혼자서 혼자서 고양에 있는 것보다는 대전에 내려오게 하면 좋지 않느냐고. 옆에 초등학교 교장이 이종언니가 살지만은 자신이 아프다고 대전까지 와서 얘기 한것을 보면 무척 외롭고 힘든 것은 아닌가?
그런데 대전에 와서 어찌나 나을 힘들게 하던지. 어미니는 혼자서 서울에 서 살면서 힘들어서 그런 것이라며 참으라고 했다. 우리는 평소에 소고기도 안먹는다. 돼지고기을 어쩌다 한번 씩 먹는다. 그런데 어머니는 막내 남동생 집에 내려와 있는 여동생을 위해 쇠고ㅣㄱ기을 사가지고 오라고 햇다. 한우는 카드로 십만원어치을 사고 남동생집으로 가니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나에게 친절하게 이야기 한마디가 없엇다.
그러더니 다른 곳으로 이사을 갔다. 그러더니 어느날 어머니가 나보고 식사을 하잖다. 우리는 밖에서 외식하면 동네가 전부다. 태평동 동네식당에서 돼지 고기 주물럭이나 칼국수나 그전에는 쭈꾸미 , 등등. 그러다 세이백화점의 한 식당에서 라디오 식사권이 당첨이 되면서 어머니와 세이백화점으로 식사을 다녔다.
그런데 서울에서 내려온 동생은 밖에서 외식을 하자며 둔산동으로 갔다. 도마동으로 갔따. 언니가 잘다니는 식당이 어디냐? 그리고 내가 좋아한다는 롯데백화점의 회전초밥집을 가자고 했다.
나는 빠듯한 살림살이에 초밥이 먹고 싶으면 그전에 세이백화점에 회전초밥집에서 한접시, 두접시가 다다.
그런데 여동생은 어머니와 롯데벡화점 지하 1층에 초밥집에 가서 여러접시을 먹으라고 하고 다른 사이드 디쉬도 시켰다.
어느날 인가는 딸의 생일이 다가오자 생일턱을 쓴다며 내가 알려준 한 한식당으로 나와 어머니와 딸을 불렀다. 딸은 가고 싶지않다고 안갔다. 학교졸업진을 찍는다고 했던가? 다이어트 해야 한다고. 요즘 애들은 중2겨울방학에 쌍꺼풀 수술등을 한다고 한다. 졸업사진을 위해서..
나도 그날 가고싶지 않았다. 딸을 두고 나가고 싶지 않아서...그 식당은 대전새종충남 한국청녀해외봉사단 커뮤니티에서 갔엇던 식당인데 집에서 음식을 먹던 나에게는 별로 그다지 흥미로운 곳은 아니었다. 물론 한정식이라 갖자기 음식이 있었지만 ..
어미니에게 안가겠다고 했더니 같이 가자고 조르셨다. 할수없이 어머니을 모시고 택시을 타고 둔산동을 갔다. 예약을 해야하는 식당이었다. 살림을 하는 주부라면 적은 돈은 아니다.
어미니는 여동생이나 조카들이 대전에 와서 식사을 하는 것이 좋았나보다. 어머니는 코로나 전에는 나에게 이야기 하셨다. 내가 매일 반찬을 해다드리니 일주일에 한번씩 해오라고 하고 나중에는 남동생이 저녁을 밖에 나가서 사먹으라고 했단다. 어디 그것이 쉬운일일까? 한번은 나을 동네 식당으로 데려가서 탕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전에는 어머니는 나에게는 태평시장의 보리밥집에 가서 보리밥을 사주는 것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조카들을 돌볼때도 나중에 알았는데 아침밥을 아버지가 하시고 일요일정도에 나물을 잔뜩 해서 일주일 먹곤 햇다. 하지만 맛이 없어도 조카들은 잘 먹었다. 나물을 다듬고 설겆이 부엌 청소는 나의 몫이었다. 물론 때때로 국도 끓히고 하지만 나도 조카들을 위해 음식을 했다. 어려운 살림이니 맛있는 간식은 못해도 라면도 끓이고 학교시간에 마춰서 라볶이도 하고 초등학생때는 집에서 과저\자을 만들어서 먹였다. 물론 조카들과 같이 만들었다. 제사에 아무도 안와도 어린 조카들과 제사음식도 같이 만들었다.그러다보니 어린 조카들이 기특해서 파을 써는 법도 가르치고 전도 같이 부치고 음식을 같이 하기도 했다.
나는 30대을 조카들을 돌보며 보냈다. 황금같은 시기인것을 지금에서야 안다. 한참 이쁠 시긴다. 화장도 하고 예쁜옷도 사입고 ....혼자서 좋은 산수갑산 여행도 다니고 외국에도 가고...
난 조카들을 위해 한국해외봉사단 귀국모임인 코바 사무국장도 마다 했다. 서울로 가야해서;. 어머니는 자신의 부모들이 안돌보는 애들이라 가엾다 햇고 대학동창에게 조카들을 돌보며 서운했던 점을 이야기 하자 애들이 불쌍하다 그러니 잘해주라고 했다.
여동생이 어디서 돈이 나서 그렇게 돈을 쓰는지. 나는 딸을 돌보니라 명절때 가족들과 맥주한잔을 못했다,. 제사전날 모이면 자기들끼리 맥주도 마시고 늦게 까지 자다가 그 다음날 해가 떠서야 일어나 제사을 지냈다.
어머니는 항상 제사을 하면서 김치을 며칠전에 담그셧다. 그리고 제사날은 해가 지고 열두시가 지나서야 제사을 지냈다. 귀신이 활동하는 시간이라며 하늘에 천문이 열려서 귀신이 와서 조상이 와서 밥을 먹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명철이면 나물은 그전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벽에 일어나서 나물을 하고 동이 트기전에 귀신이 사라지기 전에 제사을 올린다고 명절제사을 새벽에 드렸다.
아버지도 제사때가 되면 며칠전부터 자전거로 장을 보시고 목욕실이 없는 주택이라 세가전날에는 목욕탕을 다녀오시고 제사을 지낼때는 양복바지에 와이셔츠을 다림질해서 입으셨다.
제사날에는 안방을 치우시고 밤을 까기도 하시고 제사날 필요한 것이 없는지 살피고 자전거을 타고 태평시장이나 대전역전시장을 다녀오셨다.
이러저러한 것을 보고 자란 나이기에 제사때가 되면 돈이 없으면 밖에 나가서 일을 해서 돈을 마련해서 어머니을 드리고 그돈으로 제사을 드렸다.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식과 손녀손자에게 복을 달라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나이가 들면서 제사에 연연하지도 않고 잡음소리도 듣기싫어하시고 여동생은 언제부턴가 대전에 내려와 대장놀이을 할려고 들었다.
츨판사업을 한다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제사에 열심히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그냥 두라고 하셧다. 명절이면 서울에서 여동생이 내려와서 어머니와 신수을 보러 갔었다 자신의 사업운도 보고 한해 점을 친다고 . 어쩔때는 내가 돈을 마련해주기도 햇다.
그래서 인지 딸도 무당을 찾으며 점을 보는 것을 애들 답지 않고 싫어하지을 않아서 걱정이다. 맞는 말도 있지만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틀리는 말도 있다.
어머니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요거트나 먹을 과자 등을 사다주었는데 달이 학년이 올라가고 돈이 들면서 더 어려워졌다. 친구의 말에 의하니 고등학교 들어가면 자신이 시댁에도 돈을 보내지 못할만큼 돈이 많이 들어서 부모들은 챙기기가 어렵다고 햇다.
난 인터넷 신문사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은 전화비만 주었다. 그리고 출입처에 다니면 광고가 나오니 그것을 받으라고 햇다 대전의 생리을 몰라서 대전은 광고가 잘나오나보다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는 정부기관보다는 출입처도 다니면서 각 필드에거 일을 했는데 이 신문사는 정부기관 출입처만 다니라는 것이다.
결국보도자료만 쓰게 되고 헤드라인과 부제는 바꾸고 전화로 질문을 해서 글을 쓰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전화을 많이 하게 되엇다. 대전시에서 광고가 나오고 대전교육청에서 광고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딸에게 홈플러스에 가서 예쁜 옷도 사주고 어머니 겨울 부츠 세일하는 것도 사드리고 먹는 것도 좀더 풍족해졌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세이백화점에서 많은 돈은 아니지만 자켓을 사다르고 티쳐을 사어 입히고 그러다 조카가 결혼한다고 할때는 김창숙부띠끄에 가서 원피스을 사서 입힐까 햇는데 원피스가없어서 남색가을 코트을 사서 입혔다. 기념날이면 돈이 없으면 카드로. 요양보호사가 오면서는 집에서 깔끔하게 입으라고 김창숙 부티끄위 세일 상품인 가디건 바지등을 사서 드렷다.
부띠끄의 밖에 걸린 바지들은 비싸지도 않고 바느질도 잘되어 있고 품질이 좋다.
나는 동네 중고 옷가게에서 옷을 고르다 보면 내 칫수에 맞는 브랜드 옷을 사입기도 한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동생은 내가 어머니에게 사다 주는 내복을 자기 맘대로 동네 옥가게 가서 다른 상품으로 바뀌다 주고 한 동안 기분이 상했다. 그전에는 내가 엄마에게 내복을 사다주었도 말이 없었는데 지난해 인가는 내복을 사다주었더니 메리야스로 바꾸었다. 어머니가 땀을 많이 흘린다며
그리고 지난해인가 어머니가 나보고 원피스을 사달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돈이 없어서 쩔쩔매고 있다. 카들을 사줄려고 백화점을 갔더니 겨울이 다가오는 시긴라 옷값이 비쌌다. 딸이 아파서 먹는것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리고 공부도 체력전이다.
내딸은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챙겨줄사람이 없다. 마음편히 먹고 싶으것 먹으며 고부을 해야할 것이 아닌가?
난 조카들을 돌보며 조카들에게 자신의 부모들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안햇다. 내 올캐들은 배우지을 못햇다 .가정교육도 좀.,그래도 둘째 올캐는 장녀라서 인지 가정교육을 좀 받은 것 같다고 어머니가 말씀 하셧다. 나는 먹느데서 애들을 혼내키고 기을 죽이는 일을 한적이 없다. 내가 먹는 것을 많이 양보을 했다. 우리 아버지도 어머니도. 물론 한때는 어머니는 한달에 두번 꼐모임을 다녀오시고 아버지도 종종 나가셨다.
내가 사온 옷을 뭐라고 여동생이 하자 어머니가 나중에는 필요한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헌옷을 여동생이 없을때 가져다 주었다.
요즘은 여동생이 화을 낸다.필요없다고. 나느 삼십대에 조카들을 돌보며 헌옷을 입었다. 돈을 벌어도 어머니에게 드리고 그돈으로 어머니와 시장에 가서 옷을 사입기도하고 말이다. 내가 나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조카들은 벌써 고아원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처음에 조카들이 왔을때 어머니는 밥을 챙기기는 했지만 그냥 놓아두셨다.
내가 그림일기쓰는 것 글씨을 다 고치라고 지도하고 저녁을 먹고 애들의 공부하는 것을 보면 여덟시반이나 아홉시가 되면 잠을 청하게 하고 나는 피시방에 가서 공부을 햇다. 피시로 인터넷으로 여러가지 정보을 보고 체티을 하기도 하고 동기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세계경제포럼인가 매일경제신문에 세계지식포럼을 할때는 어머니가 동전을 주거나 천원등을 주면 그것으로 아침에 피시방에 가서 접속해서 동영상을 보고 말이다.
피시방에서 인터넷홈페이지을 만들려고 생각하면서 포털을 만들까도 햇는데 내겐자금이 없었다. 나는 한밭도서관에서 인터넷접속한 것을 초창기에 노트에 적었는데 이상하게 노트도 없어지고 그 두꺼운 수첩도 없어지고 햇다.
나는 그당시 외국으로 다시 나갈쌩각도 해서 국제기구나 국제 앤지등의 다양한 홈페이지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한밭도서관에서 다양한 책을 보았지만 서울의국립중앙도서관만은 못했다. 가끔씩은 대전 중구청옆에 있던 교보문고에 가서 영문 책도 보고 각갖지 경영, 경제책도 보게 되었고 서울에 가면 책을 사기도 했다.
조카들이 오고 가까이에 세이백화점의 세이문고에 가기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책을 보기도 햇다., 조카들은 그 세이백화점에서 다양한만화책과 책을 보았다. 한밭도서관에도 택시를 타고 다녔었다. 나에게 평일에는 직장을 다니고 일요일에는 조카들과 집밖을 나가서 내 개인 시간이 없었다.
난 초카들이 대학을 들어가자 가끔씩 나와 카피을 마시자고 문자을 보냈다. 커피숍에서 조용히 차을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조카들은 제사날 편의점 커피 어쩌다 동네 커피숍에서 포장커피가 다엿다.
커피만 마시겠는가? 나의 대학생활도 이야기 하고 다른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이라든가? 옷을 입는 것이라든가? 공부하는 법등...
여동생도 처음들어가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나에게 배웠다. 여동생이 지역지 편집기자을 하다가 사무실에서 간단한 기사쓰는 것도 나에게서 배웠다.,
조카들이 제사떼와서 이야기을 하려고 보니 자신들은 전문대을 다니는데 수업받기도 빠듯하고 써클생활은 모른다고 했다.화정은 좀 ...
난 대학때 거의 화장을 안하고 다녔다. 언젠가 막내남동생이 자신의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대학에서 컵라면을 먹는다고 했다
나는 대학시잘에 국수을 밥먹듯이 해서 대학3학년때 위가 안좋아서 잠시 집에서 집안일을 여름방학때 했다. 그당시에는 대학생들이 학교구내식당에서 국수을 먹는 줄이 많았다. 밥을 먹는 사람들보다는 ...
그리고 대학다닐때 나는 다양하게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은 것도 아니다. 어머니가 입던 옷, 아버지가 입던 옷, 여동생이 입던 옷. 남동생이 안입는 옷등...
특히 여동생을 옷을 쉽게 질리는 편이다. 그래서 어려서도 동생이 안입으면 내가 입었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은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서 서울에 올라가서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옷을 사고 지역지에서 일을 하면서 백화점을 다니고 사람들이 입는 옷을 보면서다.
조카들을 돌보면서도 어머니와 헌옷을 입으면서도 그것도 어쩔떄는 어머니가 간섭을 했다. 나중에 동생들이 자주 오면서 보니 어머니는 동생들에게는 큰소리을 치지도 않고 다정하게 말을 하는데고 동생들은 어머니에게 투덜거렷다.
조카들도 나와 커피숍에서 차을 안마셔도 여동생이 내려오면서 보아하니 제사전말이나 가족이 모이면 맥주집에서 여러가지 이야기을 했나보다.
한데 내가 인터넷신문기자가 돈이 안되어 아르바이트로 부동산 임대분양을 하고 다시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놀랜다. 김밥집에는 하루세기간을 채소을 썰고 나물을 무치고 하고 그다음에는 설겆이와 김밥을 싸고 할때는 몰랐다. 다른것을 가니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음식하는 것을 잘 안보여줄려고 하고 여사장은 식당을 인수하믄데 레시피가 얼마라고 하고 인수인계받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신발이나 가방이 자주 바뀌었다. 세팅을 하는데 한시간이 걸리고 그 다음에는 내가 찾아서 일을했다. 인터넷으로 놋그릇닦은 것도 배우고 양파도 인터넷으로 보니 작은 칼로 까는 것이었다. 그런데 식당마다 양파을 까는 방법도 다르다.
한 뷔페집에서는 일을 하는데 너무잔소리가 심했다. 그리고 자기가 이자리에 오기 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초창기에는 설겆이부터 고생을 많이 햇다고 했다,\\ 물론 우리나라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배움이 많지 않고 말을 함부로한다는 것은 들어서 익히 알았지만 너무 심하고 다른 사람이 한일까지 내가 뒤집어쓰는데 그 언니는 나중에 미안하다고는 했지만 기분이 안좋았다. 처음에 가서 실장이 나가면 도마도 지저분해서 내가 깨끗이 치우고 바닥도 내가 치웠는데 나중에는 내가 일자리 정리을 안한다고하고 자기 자리을 탐내냐며 큰소리을 치고 다른 직원들과는 이야기도 못하게 해서 주말에 오는 외국인과 이야기을 하기도 했다.
그때 그 식당을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 두고 식당에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마트에서도 일하고 노점에서 둔산동 4거리에서 한여름에 수박을 팔기도 했다. 그런데 얼굴과 팔은 타지만 속을 편했다. 비가 오는 날도 과일을 팔았다
그러면서 딸에게 집에 와서 동네 고기집에 가서 고기을 사주고 시원한 음료수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딸이 수학공부을 다시 시작하기로 하면서 식당에서 종일 일자리을 알아보겟되었다.;
프렌차이즈엿는데 노인분들이 식당 열기도 전에 와서 죽을 써달라고 해서 죽을 써주고 오후에 한가햐면 그 회사의 두꺼운 메뉴얼을 읽고 또 읽었다. 그 메뉴얼대로 아침부터 마감시간까지 일을 진행햇다. 그러다 마감시간이 다되어 포스을 마감했는데 전화가 왔다 애가 아프다고 죽을 쑤어달란다.. 마감시간이 다되어 거절했다그리고 그 후에 딸이 아파서 점심조금 지나서 식당의 아들에게 이야기 하니 집에 다녀오라고 해서 집에 죽을 싸서 갔다오고 그 다음날 잘리었다. 아침에 가니 자신의 아들이 밥을 했다는것이다. 다쳤다고 했나. 밥은 내가 다 해놓고 갔었다. 아마 밥을 푸다가 밥솥에 데인것은 아닌가 싶다. 나는 그곳에 얼마 간지 안되어 밥을 해서 밥을 추다가 팔을 데여서 더마톱을 그 식당앞의 약국에서 내돈들이고 사다가 팔에 붙이고 일을 햇는데 몇주동안 그것을 몰랐을리 만무하다. 여름이라 반팔을 입었는데..
아침에 갑자기 이야기을 들으며 호박죽을 쑤다가 두번이나 태웠다. 정오을 지나서 더이상은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여사장에게 가겠가도햇다. 그랬떠니 그 호박죽은 가져가라고 했다. 여름에 가스불앞에서 죽을 쑤면서 작은 부엌에서 일하자미 밑이 부르텄다. 집에오면 원피스을 입고 다리을 벌리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딸이 공부을 한다고 하니 과외비을 대야해서 다녔고 여사장이 일을 그만 두라고 해서 놀랬다..
사장 아들은 죽만 잘쑨다. 밥도 안하고 설겆이도 안한다. 바쁠때 죽만 쑤다가 쉬다가 간다. 그런데 호박죽은 정말 맛있게 쑤었다. 그리고 나에게 친절했다. 저녁에 일을 하다가 마감시간이 시간이 안되어도 그냥 가라고 했고 어쩔떄는 점심에 죽을 쑤어서 먹으라고 했었다.
다른 식당을 가보니 그곳은 주방에서 화장을 하고 귀고리까지 하고 일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홀에서 일을 하다가 사람이 없으니 주방에서 레시피 보면서 일읋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일은 꼼꼼히 햇다,. 식당에서 일하다보면 장갑을 잘 봐야 한다. 잡갑에 바늘로 구멍을 뚫었는지 새기도 하고 장갑이 조그마하게 잘리었는지 확인하고 뜨거운 물에 손을 넣어야 한다. 확인하지 않아서 손톱주위가 데여서 물혹이 생기기도 한다..
식당주방에서 일을 하다보면 홀언니들이 참 . 그렇다. 홀언니들은 손님이 없으면 쉬기도 하고 의장에 않아있지만 주방은 아니다. 항상 준비해야 하고 할 것이 많다. 홀언니들은 같이 이야기하기을 바라지만 같이 이야기 햇다가는 주방일이 많이 밀리게 된다. 그렇다고 주방에 사람을 더 붙이지는 않는다. 칼에 베여도 본인이 밴드을 사서 붙이고 감기가 걸려도 쉬면 안된다. 초창기에 김밥 언니는 코로나 걸리고도 마스크을 두개씩 하고 일을 했다면서 나에게 약을 건네기도 했다.쉴수가 없다.
어떤 식당은 가니 주방에서 일하면서 그전부터 일하는 주방실장과 내가 다투기을 원했다.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실장에게 이야기하라면서 ...주방실장들과 주방직원들은 서로 상생하기보다는 좀 이상한 관계 같다.
주방일일 힘들어서 홀일 배우려고 알바을 좀 했다. 한데 나는 뚱뚱해서 잘 써주지도 않는다. 나는 105사이즈다. 살이쪄서 배도 나온 중년의 여성이다. 처음에는 화장품이 별로 없어서 홀 일을 못했다. 홀언니들은 화장을 수시로 고친다. 옷도 잘입고 다닌다.
어느 식당에 주방직원모집한다고 해서 가서 보니 찬모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라 저녁에는 한산했다. 주방에서 나오라고 하더니 개인사을 묻고 옷을 기능성옷을 사입으라고 했다.
가민히 보니 식당에 일하려 다닐려면 옷을 잘 입어야 한다. 홀직원들은 더구나. 신발도 신경 써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좋은 옷을 입어도 안된다. 옷장안에 옷에 단추가 좀 덜렁덜렁해질수도 있고 신발에 자크가 이상이 생기기도 한다.
주부들이라면 어느 음식을 해도 할수있지만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좀 다르다. 식당일을 좀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대 나는 육회비빔밥, 갈비탕등의 세팅을 하고 주문을 하고 냉면을 세팅하고 나중에 설젖이을 햇는데 주말에 와서 청소을 주로 하고 간간이 주방일을 도우는데 일당이 22만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움직인다.
요사이는 식당 주방일을 하다가 놀래는 것은 식당 주인도 주방일을 하는사람도 음식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나물무침을 하는데 어떤 나물인지도 모르고 이야기을 하는 것을 여러군데 보았다.
외국인들에게는 이것이 무엇인지 이야기을 해주지만 우리와 비숫하게 생긴중국인이나 일본인 아니면 네팔이등의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생긴이들은 잘 모르겠다.
부엌의 용기이름도 모르고 일하는 사람들도 있고 레시피을 보며서 불고기을 만들고 버벅거리려 한국말을 하면서 설겆이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도 부엌에서 일을 하면 다칠터인데 응급상자가 없는 곳도 있다. 우리나라 제약회사의 연고나 밴드, 파스, 소독약등에는 외국어 표기가 안되어 있다. 한글로만 적혀 있다. 감기약에도 영어나 중국어등이 안적혀 있다.
김치담을때 컽절이에 약간의 소금을 넣어야 하는데 소금을 안넣기도 한다. 물론 식당마다 다르겟지만 이대로 식당들이 운영이 된다면 우리나라 식당은 한국의 맛을 잊을 지 모른다.
그리고 집에서 김치을 담을 때 내가 마음이 편안하면 김치가 맛있게 되고 내가 마음이 불편하면 김치은 왠지 그렇다. 김치도 담아보지 않은 사람이 짜네 싱겁네 하는 것은 좀..
어머니는 말씀 하\셨다. 김치는 처음에 좀짜게 담아야 나중에 간이 맛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요새는 마늘을 안 넣고 나물을 무치고기도 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 나물에는 마늘과 액젖이나 간장. 소금등으로 간을 맞추는데 말이다.
그리고 주방에서 일을 하면 손이 거칠어진다. 손을 보면 홀에서 일하는 사람인지 주방에서 일햇던 사람인지 보이는데 고운손으로 주방에서 경력이 상당하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이드신분도 주방에 들어와서 일머리을 모르기도 하면서 일을 하고 있고 설겆이에 어떤 수세민을 쓰는지 채소을 씻으면서 처음에 물에 씻어서 나중에 잘라야 하는데 그냥 잘라서 나중에 씻기도 하고 ..
일반식당에서 일하다가 음식도 과학이라는 책도 샀었다. 한밭도서관에서 식당과 음식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또다른 세계에 다가가고 딸과 맛있는 것도 먹고 커다란 마트에 가서 물건도 사고 어머니에게 선물도 하고 용돈을 드리기도 하고...
어머니는 내가 식당에 나가서 일을 하겠다고 하자 말리셨다, 험한 일이라고 ..돈을 조금 주면서 더 참고 애만 돌보라고도 했다.어머니 시중 들면서...
그리고 동생이 내려오면서 동생이 엄마집을 드나들더니 지금은 여동생이 어머니와 산다. 한 오년됐다. 내가 식당일을 한 것은 2`3년 되었다. 난 젊어서도 식당에서 일읋 해본적이 없다.
대학생때도 내가 은해동에서 음악다방 디제이을 한다고 하면 얼굴팔린다고 못하게 하고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라고 했다. 대학때도 방학때가 되면 아침밥을 동생들 다차려주고 설겆이하고 세탁기 돌리고 청소까지 하고 업마에게 몇백원을 받아서 태평동에서 유성궁동 충남대학교 도서관에 가서 영어공부을 하거나 책을 보다가 왔다. 그럼 집에서 저녁을 차리고 설겆이 하고 세탁물 정리하고 그리고 자고....
어머니가 방학때는 용돈을 많이 주지는 않았다.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도 어머니는 나보고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커피한 잔 마시고 놀다오라고 하지을 않았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고 이쪽으로 이사오면서 저녁을 먹고 태평중학교 운동장에 나가서 자판기 300원짜리 커피을 마셨다,, 어머니와 불편해지면 그때도 자판기 커피을 한잔 빼서 태평 중학교의 체육시설이 잇는 둔턱에 앉아 아이들 노는 것을 보았다.
그때 딸 친구들의 엄마들은 에이레네 커피숍에서 몇명이 앉아서 커피을 마시며 이야기을 하곤 했다. 어머니는 나에 게 이야기도 안하고 서울에 가서 여동생과 친척들의 대소사에 갔다오셨다고한다. 나중에 나 서울 가서 어디에 갔다왓다고 이야기 하고 ...
대전인터넷신문을 나가면서 종종 광보비가 나오면 그때 동네 커피숍에 가서 커피한잔을 마셨다.. 커피한잔이 이천오백원이었다. 처음에는 달이 친구들과 은행동으로 놀러가고 어머니가 계모임을 나간 어는 토요일에 집에서 옷을 깨끗이 입고 동네 에이레네 커피숍에 가서 커피을 마시는데 너무나 조용햇다 . 핸드폰을 보다가 코바 동기들과 대학써클 친구들에게 문자을 날렸다. 코바동기하나가 지금 대전에 가도 되냐고 물었다. 좀있으면 어머니도 들어오고 딸고 돌아올 시간이라 대전에 오라고 이야기을 못했다.
그친구가 지난주에 전화을 했다. 제주도라면서 방글라데시에서 만난 아키가 제주도에 왔다고 통화해보라고 ...통화을 하고 다시 그 친구에게 전화했다. 대전에 같이 오라고 ....그랫더니 그 친구가 전주에서 보자고 했다.
식당일자리을 알아보고 전주에 가서 그 친구도 만났다.전주에서 한옥마을 근처에서 피순대을 먹는데 식당에 테이블 좌석이 너무 조밀하게 되어 있어 앉기나 불편핶고 직원은 친철하기도 햇지만 틷틱거렸다. 나는 피순대을 처음먹어봐서 잘 먹지을 못햇는데 내 친구와 일본인은 잘 먹었다. 대전은 순대에 채소와 당면이 들어간다. 그리고 전주는 초고추장에 피순대을 찍어 먹는다고 한다.
어제 관편동쪽에 식당에 하루 알바을 갔는데 친구가 전화을 했다.광주 공항을 통해 제주도로 가서 국제선으로 일본으로 간다고 말이다.
난 동생이 내려오면 좋을 줄 알았다. 친구도 되고 종종 커피도 마시고 내딸에게도 좋은 말을 해주기을 바랬다. 세월이 지나니 .....
친구는 학회일로 일년에 한번식은 제주도을 찾는다고 했다. 나는 너무나 오래 간만에 영어로 대화을 해서 가끔씩 어떤 단어도 생각이 안나는데 친구는 외국인들과 대화을 많이 하는지 조용히 천천히 영어로 내가 물어보면 아키에게 설명을 햇다.
어제 식당에서 영어로 이야기을 하니 영어 잘하내요 햇다. 그곳에는 식당에 한살, 두살,.세살 정도되는 애기들을 데리고 젊은 부부들이 많이 왔다. 애기들을 보니 기분도 좋아졋다.애기들도 내가 곤지곤지하면 따라가고 웃고 손을 들어흔들고 젊은 부부들도 내가 애기들과 조금 놀아주니 좋아했다. 중구나 서구쪽에는 애기들과 식당을 오는 젊은 부부들도 많지 않고 애기들도 별로 없다.
어쩔대는 어머니가 그러신다. 여동생은 결혼을 안해서 애기가 없어서 그런태도을 보이는 것이니 너가 참으라고 ....무조건 ..그런데 그것은 아니것같다. 자식이 있는데
말을 윗사람에게 함부로 해야할까? 어머니는 나에게 큰소리을 치면서 정작 잘못하는 여동생에게는 말도 크게 안하더니 지금은 여동생이 어머니에게 대화가 아니라 ....화난 사람같다.
그리고 애을 안봐서 인지 무조건 병원을 가려고하고 약을 먹일려고 한다. 몸이 가려무면 전기장판을 끄고 차가 하면 덜 가려운데 밤에 옷을 벗고 있다고 미쳣다 고 할 것인가? 불을 키어놓으면 그냥 놔두면 되는데 자신도 못잤다고 야단이다.
어느날인가는 여동생과 사는데 전기세을 아낀다고 저녁에 불도 안키고 텔레비젼도 일찍 꺼놓으셧다. 나랑 같이 살때는 희영이가 공부가 안된다고 하는데도 거실에서 아홉시까지 텔레비젼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서 열한시 늦게 까지 티비을 보셨다.
그런데 관평동식당에서 보니 젊은 커플들이 애기들은 데리고 식당에 왔는데 부모님을 모시고 나온 커플들은 간혹가다 있었다.
우리나라는 원래 식당 협회이름이 음식업중앙회엿다.지금은 외식업중앙회이다. 무엇이 달라진것일까?
동생도 서울에서 양재호피스텔에 살때는 어머니 말에 의하면 식당에서도 일을 했다고한다. IMF이후 퇴직자들이 식당을 많이 차려서 90%이상 많은 식당이 생기고 어떤 식당 전문지는 잘되어 기자들이 다 대학원등 다니게 되고 기자들이 공부을 해서 교수\가 되기도 했다고한다.
한데 주방에서 일읗 해보니 집에서 음식하는 것과도 다른고 주방에서 일을 많이 했다고 해서 음식을 잘하는 것은 아닌것 같다. 보기에 화려하고 정갈은 하지만 말이다.
칼을 잘다루고 팔힘이 세고 다리 힘도 좋고 .하지만 하루 12시간이상을 일하는 것은 중노동이괴 처음부터는 12시간을 일하기가 힘이 들다. 처음에는 4시간 5시간에서 나중에 일을 배워서 12시간도 하고 말이다. 조리사 자격증이 있다고도 다가 아닌것 같다. 외국인들도 한국음식을 잘하기도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주방일을 해서 인가 눈치도 빠르지만 처음 일하러 온사람을 누치을 보면서 일한다. 설겆이 통의 배수구에 그릇을 넣어서 물이 차게도 하고 일을 같이 하면서 반말르 내깔리기도 한다. 젊은 아이가 말이다. 아무리 주방이라도 그래야 할까? 반말로 집에 가한다.
식당에 그릇들도 변하고 음식도 변하고 있다. 식당에서 일하면서 가족들과 주말에 함께 외식을 못한다. 남동생이 어머니와 여동생하고만 외식을 동네가 아니라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 같다.
난 가끔씩 어머니에게 집안에서 먹을 거리을 사다준다. 언젠가 어머니방에 있던 냉장고가 안쓰는 방으로 갔다. 어머니방의 냉장고에 음료수등을 사다놓았는데 말이다.
딸이 고등학교을 졸업하기전에 좋은 곳에서 식사을 하고 식사의 바른 예절을 배웠으면 한다. 내가 좋은 곳에서 대우도 받아봐야 사람을 대우을 할 것이 아닌가? 백화점의 식당에서는 반찬 하나을 가져다 주어도 쟁반에 받쳐서 다소곳이 가져다 준다. 요리도 쟁반에 받쳐서 가져다 준다. 우리 주위의 식당에는 쟁반이 없는 식당이 많다.
우리집에서는 어려서는 잠을 자기전에 쟁반에 조그마한 주전자와 컵을 놓고 윗목에 놓아두기도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면서 아니 조카들을 돌볼때 집에 쟁반이 없었던 것 같다. 스텔세스 상에 음식을 해서 조카들 주면서 그냥 물병에 컵을 가져다 주었던 것 같다..남동생과 올캐들이 이혼을 해서 부모님과 내가 조카들을 돌보면서 어려운 시기라 그릇에 미쳐 생각을 못했다.
비지니스에서 식사예절은 상당히 중요하다. 꼐약이 성사가 될 수 있고 깨질수도 있다. 서울에 특급호텔에 청소년식탁예절을 가르치는 것이 있는지 알아보았더니 몇군데에서는 진행이 된다..
비지니스에서는 물론 식당에서 룸에서 식사을 할수 있지만 집으로 초대해 가족과 함께 식사을 한다.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정식을 먹는 장면이 별로 없다.
그러나 외국의 영화등을 보면 격식을 차린 식사장면이 많이 나온다.여동생은 서울에서 내려와 나에게 시청출입하면서 간 식당이 어디인지 묻기도하고 본인이 맛집을 찾아서 가족들과 다니면서 블러그에 맛집소개글을 올린다고 했다.
나느 블로그을 만들려고 했었고 인터넷신문에서도 블러글을 하다가 시간이 많자 않아서 블러그 못하고 간단하게 브런치 스토리에 방그라데시에서 생긴일을 올리고 있다.
난 20여면전에 식당과 관련해서 글을 쓰는 맛월간지 창간작업을 몇개월했었다. 그런데 경주에 한 호텔직원은 이 질문들은 기밀사항이라고 취재에 협조할 수 없다고 했었다. 영등포의 그 전문지회사는 영등포 지역지을 만들고 있었고 아마 내가 창간작업을 한 것을 토대로 다른 이름으로 전문지을 낸 것으로 안다.
내가 식당에서 일해보니 내가 맛월간지 창간 작업을 하면서 기획했던 기사들은 정말 기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식당관련 전문지을 제대로 만들려면 식당에서 최소한 2년이상 여러식당에서 일한 경험이 필요하다.
주방에서도 일해보고 , 홀에서도 일해보고 경영자의 마인드도알아야 하고 식자재와 농수산무역현황. 식당 근로자들이 왜 이직이 심한지. 근로자의 복지가 너무 안되어 있고 장시간 노동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안좋다고 한다. 돈을 많이 벌면 뭐하고
학생들과 대화, 부모와 대화 결핍.. 그리고 식당에서 오래 다닌 분들은 자식들을 해외유학까지 도 보내는데 그들이 며느리을 맞아서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
식당에서 일하는데 아들이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하고 아들과 손녀와 같이 산다고 한다. 며는리는 강남에서 자란 여자라고한다.
식당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주5일근무나 토요일이나 일요일 쉬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한다.내가 식당에서 일해보니 이주일에 한번 김치을 담다가 지금은 한달에 한번도 김치을 담기가 힘이들고 딸에게 따듯한 음식을 차리기가 힘이 든다.
차가운 음식에 무슨 맛이 있고 정이 느껴지나? 요즘 젊은이들은 돈을 벌면 자신이쓴다고 한다. 그리고 바라기만 한다. 요즘의 복지정책을 보면서도 어머니와 아버지와 내가 세명의 조카들을 키운것이 뭐대단하다고 생각하냐고 들지는 모르겟지만
따스한 음식에서 정이 나고 예절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딸이 여중생때 가야금동아리에서 만난 친구와 어루릴때 나는 밖에서 딸이 돌아오기는 서성이었고 집에 오면 따스한 된장국에 밥을 주었고
딸은 엄마가 우리집을 잧아와 가출했던 딸과 돌아갈려고 했을때 그애 엄아에게 집에 가서 따스한 밥을 차려주라고했다. 듣자하니 맞벌이이고 여러가지 공부을 시키은데 40평이상의 아파트에서 혼자 있으며 무서워도하다보니 밖으로 나돌게 된것은 아지. 밤늦도록 집에 혼자있었다고 한다. 학원을 가지 않은 날은...
어머니는 여동생이 서울에서 혼자 있으며 먹지도 못했을 것이니 생선이라도 구워주라고 했다. 그리고 틱틱거려도 받아주고 서울에 올라라면 서대전역까지 같이 갔다오라고 하고 ...나는 서대전역에서 차한잔을 하고 딸과 돌와오곤 했다. 그런데 혼자지내다보면 나신만 생각하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