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 바닷가 한적한 하얀가로빌딩에 외국브랜드샵 거리, 소파 휴식
부산사상터미널 주위에는 이마트가 있어고 르넷씨떼인가가 있었는데 홈플러스는 정확하지가 않다. 그곳에 엘지전자가 있었는데 고객들을 위해서 커피와 계란등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임신해서 배가 부르자고 자주 샤워을 해서 인지 아니면 새바지을 사서 입어서 인지 허벅지가 가려웠다.
그 검은 색 청바지는 빨으면 염색물이 나왔고 그 바지을 입을 무렵에 하벅지가 가려워서 집에 있는 암웨이 잡지을 보니 피부건조증으로 가려웁다면 잣을 먹으라고 해서 애 아빠집에 있던 잣을 먹기도 했다.
그때 쯤에 모라동 아파트에 베란다에 서 있는데 어떤 아줌마가 암웨이을 한다며 한 번 같이 가자고해서 갈려고 했더니 애아빠가 못가게 해서 안갔다. 임신해서는 애 아빠는 나에게 옷을 사준적이 없다. 나는 애아빠의 티셔츠와 추리닝을 입었었고 사상구 YMCA청소년회관의 녹색가게에서 녹색울치마나 다른 옷을 사입었다.
남색코트도 그곳에서 샀었다. 그 코트는 서울에 가면서도 입었다. 서면의 부전시장에 글로벌경연전문학교을 다닐때도 녹색가게에서 옷을 구입해 입고 다녔다.
나중에서야 내가 배가 불러서 허리가 가려워서 원피스을 사달라고 하자 어디에서 이상한 원피스을 가다주고 입으라고 햇다.
애기을 낳고 나서야 애아빠가 어느날은 부산사상터미널에 이마트에 데려갔다, 자기는 부인이 생기면 이렇게 이마트에서 가족과 쇼핑을 하고 싶었다고 이야기 하면서 이것저것 먹을 것도 애기 분유등을 샀다., 그러더니 어느날은 이마트에 속옷코너을 가서 속옷을 고르라고해서 브래지어와 팬티을 골랐다. 속옷들이 상당히 화려햇다. 난 이 나이 먹도록 혼자서 속옷을 산적이 거의 없다. 어머니가 골라다 준것을 입었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처음에 살색브래지어을 사고 그다음에는 애아빠가 자기 어머니가 입던 것이라고 속옷을 입으라고 주었는데 너무 야해서 좀 그랫다. 난 면으로 단순한 삼각팬티을 입었었다. 속옷패션을 생각한적도 없었고 왜 속옷에 신경을 쓰는지도 모르고 나이 40에 다되어 딸을 임신했었다.
나는 한세트을 샀고 그 다음에는 한달에 한번씩 애옷을 외출복으로 사주었었다. 그러다가 생일을 앞두고 바지 슈트을 사주었다. 흰색코트도 사준다고 햇는데 내가 마다 했다.애을 엎고 다니는데 무슨 하얀색코트가 필요할까 싶엇서 말이다. 애아빠는 회색블라우스을 사주었는데 보기에 너무 하려해서 나중에 내가 단순한 하얀브라우스로 바꾸었다. 애아빠는 옷을 사주면서 자기 엄마에게는 비밀이라고 신신당부을 하는 것이었다..
애기가 백일을 앞두고 애아빠가 시계을 팔았다며 이마트의 압소바에서 애기에게 분홍원피스와 하얀머리띠을 사주었다.그밖에 것도 샀는데 내가 돈이 없어서 그것을 압소바에 다시 가져다주고 돈으로 바꾸었다.
날시가 선선해지면서 우리가 덮을 이불이 마당히 없어서 나는 애을 데리고 이마트에서 기획상품으로 만원인가 이만원하는 이불을 사가지고 아파트에 갔는데 가방을 안가지고 와서 이마트에 갔다가 기분이 상해서 이불을 다시 돌려주고 가방을 찾아왔다. 가방에는 별로 돈도 없었고 귀중품도 없었던 것 같다.
11월이 되자 아파트가 산옆에 있어서 찬바람이 불고 아파트는 추워졌다,.애기자 감기가 들었다.나는 대전에 와서 좀있다 부산에 내려갔다 왔다갔다 햇따. 애아빠는 내가 코트대신에 잠바을 사달라고 하자 사상터미널 옷가게에서 오리털 파카을 사주어 내가 십년정도는 입었다, 그때 한 이십몇만원주었던 것 같다.
봄이 오자 사상터미널의 이마트옆에 르네시떼에는 노브랜드의 옷가게가 밀집햇었는데 그곳에서 양반갓모양의 수가 놓인 엉덩이을 덮는 잠바을 사서 입었다.
여름이 오자 이마트인가 이곳애선가 애아빠가 꽤 넓은 폭의 프러어스커트 같은 치마을 사주어 잘 입었다.애기을 안고 집에 편안히 앉아서 있을 수도 있었다. 면이었는데 참 좋았다 .애 아빠가 참 센스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연한 주홍빛의 살색스커트 였는데 애아빠와 헤어져서도 대전집에서도 이치마을 잘입었고 태평동 태평중하교 근처로 이사을 와서 그 치마을 내가 입으려고하나 그때 마침 집에 와 있던 여동생이 그 치마을 입겠다고 해서 빌려주었는데 그 다음에 치마가 없어졌던가?
그리고 나는 집에서 치마을 입지만 밖에 나갈때는 거의 치마을 입고 외출을 하지는 않는다. 딸이 크게되자 집안에서도 옷을 잘 입어야 겟다는 생각이 들엇다. 중학교때 딸의 친구가 목동 아파트으 집에 나와서 우리집에 있어서 그애 엄마에게 전화을 해서 그 엄마가 우리집에 왓는데 나는 나중에 생각하니 너 무 초라햇다.
그리고 몇주가 지났다. 딸이 갑자기 나을 비유하는데 미스터션샤인에 함안댁으로 비우하는 것이 아닌가?나는 평소에 옷에 신경을 안쓴다. 취재생화을 하면서도 평소에는잘 안차려입고 청바지도 입고 편안해 다니다가 인터뷰가 잡히거나 기업탐방이나 단체탐방기사을 쓰려 회장이나 사장, 인터뷰을 하는 분들을 만날때만 자켙등 정장을 입고 다녔다.
처음에 부산에 아파트에 내려갔는데 어디서 전화가 왔는지 애아빠가 나을 보더니 일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을 해서 그냥 물어보고 대전으로 올라올려고하는데 헤어질려고하는데 임신이 되엇다. 애할머니는 나을 며느리가 아니라 애아빠 여자친구라고 이야기 하고 처음에는 저녁에 들어와 밥을 차리더니 보름정도 지나니 안차리고 나중에는 늦게 들어와서 애아빠가 준비해주는 라면을 먹고 그다음에는 애아빠와 다투고했다. 애아빠는 울려는 듯한 표정으로 나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광안리에 막내외삼촌집에도 갔었다. 그때 사촌 동생이 있었다. 집에 먹을 것이 없는지 빵을 주었다.
애을 낳고서 나는 대전에 오면서 부산의 범어사근처에까지 가서 고속버스터널에서 고속버스을 타야 햇다.그래서 부산시에 제안했다. 부산시외버스터미널인가에 제안을 햇던가? 햔재는 부산사상터미널에서 대전까지 고속버스가 운행중이다.
애할머니는 임산부인 나을 위해서 별로 아니 신경을 안썼다.나는 처음에 부산의 모라동에 아파트에서 부엌을 청소하고 냉장고을 청소하고 차단스에 반찬박스가 안맞는 것은 다버리고 청소을 햇다, 애아빠는 그냥 있었다.내가 임신을 하자 일자리을 알아보겟다고 햇다.
모라동 아파트 사회복지관에는 세이브더 칠드런에서 운영하는 곳이 있엇다.알아보니 육이오전쟁후 한국에 고아들을 외국에 해외입양을 많이 하고 국내애서 어린이을 위한 사업을 펼친다고 햇다. 노인들에 의하면 그곳에 중국인들이 아파트에 산다고 햇다.
신문을 보니 사상구에 결혼이주여성들이 많이 산다고 나와있어 임신중에 집에 있으면서 외국인근로자상담소에전화을 하니 결혼이주민야성들을 위한 활동을 한다고 해서 부전시장의 외국인상담소자원봉사을 하겟다고 약속을 하고서는 못갔다, 임신중독으로 발이 부어서 신발이 맞지 않았다. 내가 내려간지 얼마안되어 분혼운동화을 사주었는데 나는 색깔이 그래서 몇번 안신었는데 그 운동화가 없어졋다
그리고 애아빠가 여름에 샌들을 사주었는데 신발이 어디을 갔다 왓던가 신발에 굽이 나갔던가 끈이끈어졋던가 해서 그 샌들을 못신었다. 그리고 애아빠가 건네준 아파트의 키가 자꾸만 없어졋다. 처음에는 전화기가 없어졋다가 나타나기도햇다. 나는 아파트가 작은데도 혼자 있기가 무서워서 여름에 아파트 문을 활짝 열어두었었고 그덕에 아파트의 애들과 친해 졋다. 베란다에서 애들이 인사해서 그아파트의 303호아줌마와 이야기을 하고 비빔밥을 얻어먹기도 햇다. 그 아줌마는 아들이 둘이었고 그대가 초등일학년인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들이 하나있었는데 둘은 손을 꽂잡고 다녓다. 그리고 그 아줌마은 나중에 임신부로 나보다 3개울후에 딸을 낳았다.
대전에 있다가 부산을 가니 그 아줌마가 교회에서 옷을 얻었다며 애기 원피스을 가져다주고 애기 목욕하는 것을 도와주겟다고 나섰다. 그리고 그아줌마은 나보다는 어린데 지금 학점은행제로 사회복지을 공부하고 있다고 햇다. 그녀는 나중에 신라대학교 다이어리을 나에게 가져다 주기도 햇다.
그리고 그녀는 애을 부산의 가족계획협회에서 애을 낳고 산후조리사가 집을 방문해 애을 케어해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그녀의 집에서 머리가 희끗흐끗한 할아버지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내가 이상해 하니 대학교수라고 이야기 하고 그 다음부터는 나을 대하면서 괜히 화을 내곤했다.
어느 날은 애기을 데리고 목욕을 갓다고 한다. 그녀의 아들들이 엄마가 안들어와서 배가 고프다고 나엑 밥을 달라고 해서 밥을 준비해서주는 집에 들어온 애 할머니는 괜한짓한다며 애들보고 나가라고 햇다.
신문에서 보니 아파트 단지에서는 애들을 서로 돌본다는 뉴스도 접하고 조카들에게 밥을 준비해주던 버릇이 있어 그렇게 햇는데 야단을 쳣다..
그리고 나에게 친절하지 않던 애 할머니는 내가 부산에서 내려가서 부산시청등에 제안을 하면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051-303-9308인가 자세히 기억은 안난다. 여러 제안을 부산의정부기관에 했다. 그리고 일이 시행이 되었다. 애할머니가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고 나는 일주일은 대전에 일주일은 부산에 왔다갓다 했다.
밤이 무서웠다. 애는 지켜야 했다. 애을 안고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애을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할지 암담했다.
애아빠은 천그림책을 사오기도하고 장난감 전화기을 사오기도 하고 숫자 자석칠판등을 사오기도 했다. 애할머니와달리 애아빠가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을 한 것이다. 그리고 애아빠가 부부관계을 안하고 해서 보니 좀 문제가 있어서 치료을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비뇨기과을 데리고갓어야 햇는데 나는 생가을 못했다. 땀띠가 나나보다 생각을 했다. 한국해외봉사단으로 방글라데시에 가서 여름에 의자에 앉아있고 월겨을 하다보면 아래가 무척 안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나도 의심을 했다. 애아빠가 엘리베이터을 타고 올라오는데 303호아줌마가 전화번호을 주엇다는 이야기을 했다. 그아줌아의 남편은 집의 마루놓는 일을 하는데 출장으로 며칠씩 안들어오고 그리고 귀머거리라고 했던가>귀가 안좋다고 햇다.나는 그냥 지나갔다. 처음에 그 아줌아가 아저씨는 부부관계을 어떻게 하냐고 물어오기도 햇다.
난 이런이야기을 나눈적이 없고 나이가 들어도 성에 대해서 몰랐고 애아빠는 내가 너우 모른다고 생각을 햇는지 야동을 보여주었다. 어린애들과 성관계하는 것분터 좀 ,,,,,,나는 너무 민망하게 생각을 했었고나는 낮에 부부관계을 갖는 것도 민망하다고 생각을 해서 애아빠와 처음에 부산에 있을뗴 밖으로 나가서 사상도서관도 가고 서면에 도 나가고 해운대. 태종대등을 다녔다. 그리고 나는 애아빠와 관계을 하면서 피가 나서 무서웠다.
나는 힘이 없어서 애아빠가 당기면 당기는 대로 그냥 안기었다. 그런데 식당을 다니면서 보니 키가 작은 아줌마들도 식당에서 일을 하면 팔힘이 상당하고 서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리힘이 장난이 아니겟다는 생각이 든다.
부산에서 코바의 오빠뻘되는 동기에게 전화을 해서 안좋은 소리을 하니 운동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말이 무슨말인지 생각을 못했다. 결혼을 안했었으니 결혼한 친구들의 이야기을 내가 어찌알겟는가?
딸이 이제는 커서 야한 영화을 보기도하면서딸에게이야기햇다. 엄마는 성에 대해서 너무 몰라서 너의 아빠가 야동도 보여주고 해도 엄마는 어쩔때는 무서워서 부부관계을 잘 못햇다고 ..
우리세대는 정절을 중요시하고 어느누구도 성에 대한 교육이없었다. 부탄에 가닌 절의 벽화에 남녀의 관계가 그림으로 그려지고 옛날사람들에게 부처의 깨우침을 남녀의 관계의 환희을 비교햇다는 이야기을 들엇어도 남 관심이 없었다.
내가 강남의 지역지에서일을 할때 강남의 여자들이 속옷을 사기위해 태국면세점을 잧는다는 이야기을 들엇다. 어제 태국의 와코루속옷 홈페이지을 접속하니 참 귀엽기도하고 색도 다양하고 깜짝놀랬다.정작 유럽와코루와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의 교복을 입으면서 속옷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속옷가게을 갓었는데 우리나라는 다양하지도 않다.무리때는 속치마가 허리에서 무릅까지 오는 것이 있엇는데 지금은 그속치마는 없고 슬립도 학생것과 청년,. 노인층은 다른데 구분이 없다.
우리애은 중학생이 되더니 자신이 속옷을 산다고 모바일 폰으로 속옷을 주문했었다,. 그러다가 약간은 바느질이 없는 브래지어을 샀는데 뽕이 다 나온다. 그래서 홈플러스에 가서 내가 속옷을 사며 이런 속옷을 사야한다고 보여주었다..
딸의 중학교의 한친구가 우리집에 와서 며칠 머물면서 팬티을 빨은 적이 있는데 딸이 그 팬티을 보면서 무러ㅏ고 해서 그것은 면팬티야 너도 면팬티을 입어야 한다고 이야기 해주었다.아마 학교에서 체육복을 갈아입는 것을 보면서 애들이 입는 속옷을 보았나보다. 요즘 애들은 메리야스을 잘 안입는지.
고등학교시절에 우리 가정선생님인가이야기 하셧다,. 한학생이 교통사고을 당해서 병원에 가기도 한다고 하면서 속옷을 챙겨입으라고 이야기을 했었다.
기간이 너무나 흐른후에야 알아들은 나는 참 멍청하다. 아머니가 아프셔서 외할아버지 제사가 다가오면서 어머니가 마지막 제사에 참석했으면 한다. 외할머니가 독수공방한 나날들. 첩들의 자식을 돌보면서 얼마나 한심스러우실까'?>옛날은 첩들으 자식을 본처의 호척에 올랐다고한다.어머니 나이가 82세다.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거의 26년7년을 외할아버지 제사에 참석을 못했다./.
첩의 자식인 장남이 제사을 하면서 부르지 않은 것 같다, 어르신들 나이에 여자들을 제사을 재내지 않는다.여자는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남자는 말끔히 차려입고 제사상에 절을 하는 세대다.
나에게 누군가가 성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고 어떻게 하는 것이다 교육을 해주었더라면 ...미루어짐작하건대 외할머니의 독수공방과 나이들어서 잠을 잘때 누가 이블을 덮어주었을까? 중국에는 소녀경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인도에는 카르마수트라라는 것이 있다고한다.
나는 애아빠와 부부관계을 잘 몰랐어도 나중에는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놓고 하고 싶지도 않고 이아빠가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무게도느껴야한다고생각을 했다. 대학써클 친구에게 물어보려고햇더니 같은 시기에 결혼한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부산에서 모라동 아파트에서 버스을 타고 백스코에 가고 해운대까지 가서 유모차을 끌고 다니면서 참 쓸씋하고 ...애아빠와 이야기을 하고 싶었는데 피곤해 하기도하고 말이 없었다. 집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데 쉬는날은 차을 타고 경주나 포항까지 드라이브만 하는 것이다. 나는 애을 안고서 팔이 무척 아팠다. 대전까지 와서 엄마에게 이야기 하니 샤르소부르카송인가 무슨 주사을 놓아주셧다..
애기는 육칠개월이 되면 보행기을 태운다고 한다. 옛날 어머니들은 손으로 안아서 등에 업어서 애들을 키웠으면 참 힘이 세겠다.요즘 애들은 너무 허약하다. 현대아울랫을 갔다가 애기들과 부부가 나와서 외식을 하는데 무척 보기가 좋고 부러웠다.
나는 도회적인 커피숍에서 커피한잔 먹으며 스트레스도 풀고 휴식을 취하는데 애아빠는 드라이브을 하면서 쉬었던 것은 아닌지? 오너드라이브을 하는 친구에 의하면 자기에게 자동차는 둘도 없는 친구라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