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수 파견으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서
방글라데시를 다녀온 지 내년이면 30년이다. 차 한 잔을 마시다가 방글라데시를 다녀온 것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글라데시를 다녀온 직후에는 참 힘들었다.
그 당시에는 방글라데시가 싫었다. 그 나라 한국국제협력단에서 파견이 돼 방글라데시 정부기관에서 공무원들과 같이 일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주변인으로 내가 있다는 것이 싫었다.
아사드게이트의 원예센터에서는 센터 직원의 건너편에 책상과 의자가 하나 주어졌는데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도 해보고 방글라데시를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그 책상에 앉아서 콜릭이 주는 듀트차을 마시며 멍청히 창밖을 바라보는 것도 못할 만큼 힘이 들었다.
그래도 현지인들이 많이 신경을 써줘서 그들과 웃고 울고 보내온 세월에서 내가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고 부모님을 돌보면서 내가 그들로부터 많이 배웠다는 생각도 든다.
책상에 앉아서 그들이 뱅갈리로 말하는데 처음에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격한 발음으로 이야기하면 귀가 아팠다.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면 영어로 물어왔다.
그 나라의 최고 명문대학인 다카대학 근처에 있는 영국문화원(브리티쉬 카운실)에 가서 여러 가지 책을 보면서 개발도상국의 문제도 인식하고 보건위생도 생각하고 아열대 작물에 대한 책을 보고서 역시 영국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할 일이 많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서는 여러 가지 사정상 내가 생각한 일을 추진하기가 힘이 들었다.
대전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가 교보문고, 영풍문고, 종로서점, 을지서점을 가서 무작정 책을 읽어보고 외국에 관련 서적도 찾아보면서 한국청년해외봉사단 파견국 대상으로 현지어와 정보를 담은 서적을 만들까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96년 초일이다. 여동생이 을지외국어서적에 다녀서 내가 9개국 현지어와 여행 정보책 자을 만들려고 한다고 하니 극구 반대 했다. 돈이 안된다는 것이다. 서울의 여러 서점의 외국어 코너를 봐도 제3세계 언어책이 구석에 있었다.
을지외국어에서 본 인도네시아어 책자는 기둥 맨 아래칸 책꽂이에 있었는데 먼지가 쌓여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해외배낭여행유행이 일어서 여행 정보책자는 많았지만 현지어 책자는 많지 않았다.
몇 군데 출판사에 전화를 하니 한 군데에서 50페이지로 내용으로 콘텐츠를 가져와 보라고 하셨다. 여러 책을 서점에서 보고 5개국 여행회화 책을 사서 집에서 동생출판 사겠도 한 번 보고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리고 서울 종로 2가의 YMCA빌딩 지하 첼로 커피숍에서 모였을 때 동기들에게 여행회화, 여행 정보책을 만들어보자고 이야기를 하고 각 국에 한 명씩을 정해 원고을 부탁했다.
시차도 다른 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 사는 동기들은 바쁜 와중에도 태국과 인도네시아 한국어로 파견되었던 단원은 나에게 원고을 내주었다. 나는 이 책을 출판해 줄 출판사와 연락도 잊은 채 다른 일로 바빠서 이 책을 출판을 못하고 UNV로 부탄으로 파견되었었고 부탄에서 돌아온 후 동기들과는 서먹서먹해졌다.
모두들 결혼해서 결혼생활에 바빠서 내가 기획해서 원고을 쓰고 문방구에서 복사해 각국에 한 명씩 나누어 주었던 원고을 모두들 잊고 살았던 것 같다.
한국청년해외봉사단 귀국모임 홍보국장을 맡아 나섬회 회지를 준비하고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해외원조 NGO에 대해서 소개 원고을 작성하는 일로 NGO을 전화해서 방문해 취재를 해야 했다. 그리고 9개국 여행회화와 여행정보책 출판을 미룬 채 외국으로 나가야 했다.
그때는 그 일이 좋아서 했다. 무엇인가에 기록을 남기고 돈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때 내가 컨텍을 했던 동기들도 좋아했다. 귀국 후에 무엇인가 한다는 것에 뿌듯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그 일을 추진하려고 하는데 지원금이 아쉬웠다. 혼자서 기획해서 하다 보니 사람을 만나면 커피를 사야 하고 차을 한잔씩 사야 했다. 서울이다 보니 물가도 비쌌고 말이다. 사무실도 없어서 집에서 전기장판에 누워서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일했다.
그러면서 방글라데시의 가족주의 문화가 부러워서 아버지 환갑잔치를 앞두고 처음으로 광주의 넷째 고모집과 둘째 고모가 산다는 해남을 방문해 아버지 환갑잔치를 알리고 참석을 부탁했다. 머나먼 여행길이었다.
그리고 국민학교 6학년 때 동생들과 대전의 동남쪽 인가 흑석리로 물놀이를 가고 가족 여행을 한 적이 없다. 그 해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참석가능한 동생가족들과 여름에 물놀이를 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릭샤 운전사들이 성서드 버번(국회 의사당)을 가로지르며 순다르 바타쉬(아름다운 바람)를 말하는 정말 그들의 순수함을 느낀다. 물론 릭샤꾼들이 돈을 더 달라고 해서 실랑이도 벌이고 돈이 아까워서 오토바이 버스를 타고 다니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 시절에 어떤 아이에게 학교에 다닐 때 신을 운동화를 사달라고 해서 사주길 잘한 것 같다. 속으로는 투덜거렸지만 말이다. 그 아이는 나에게 은반 지을 주었던가 안 받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