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우울증 ....부탄 시골의 산중턱에 외로운 청소년...현대병
청소년의 우울증 ....부탄 시골의 산중턱에 외로운 청소년...현대에는너무나 많은 병 이름을 지어주고 있어
지난해 에 와디즈에서 하는 세미나가 11월에 목원대에서 있었는데 그 근처에서 sk 에테르 스위첸분양을 하느라 바빠서 그 세미나에 참석을 할려고 하다가 못했다.
펀딩을 받아서 책을 출판 한다면 ?브런치 스토리에 방글라글을 올리다가 방글라소요사태가 벌어진 것을 알면서는 방글라 소식을 전하기 바빴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면서 정보통신이 어려우면 인터넷통신은 어렵다. 팩스는 종이에 인쇄가 되어 증거가 남는다. 한데 이메일은 그냥 사라질 수가 있다.
그때인가 내 잘못도 있겠지만 한메일의 소식이 끊어지기도 했다. 어떤 것은 안들어오기도 했다.
그래서 이야기 해 주었다. 제3세계에서 외국인들은 집에도 팩스을 놓고 사용한다고 나는 부탄에서 집에 팩스 선은 있었지만 전화선만 사용했다. 팩스선이 있는 집이 좋다고 미국인 UNV가 이야기을 해 주었고 아무집이나 팩스선이 부탄의 팀퓨집에 있지 않다고 했다. 전화선도 받으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제3세계와 사업을 하려면 우리나라 기업도 팩스전화번호을 회사 홈페이지등에 올렸으면 한다.30년전에 내가 봉사활동을 했던 아사드 게이트 원예센타에는 전화만 있고 팩스선이 없었다.
나는 집에 이번에 어머니가 쓰,던 김조산소 전화번호인 042-533-9362을 다시 받았고 팩스선도 하나 받았는데 아직 팩스을 장만하지 못했다..
요새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어려움에 쳐했던 것은 뒤에서 나을 헤고지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하게 오래 일을 못하고 그랬다. 어머니는 자꾸만 나보고 지역인터넷신문도 명예직이라 생각하고 일을 하라고 했지만 딸의 뒷바라지가 한부모가족지원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들이 우울증에 빠진다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봐라. 밖에 나가고 싶어도 친구와 만나서 커피 한잔, 떢볶이나 마라탕을 사먹을 돈이 없는데 어떻게 만나나? 친구만날때 교복을 입고 만나나>으능정이나 둔산동에 가도 교복입고 커피숍에서 친구와 수다 떠는 청소년이 없다. 학원가에도 사복 입고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 여기에 자라나는 여학생들은 속옷도 남자애들보다 더 챙겨 입어야 한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복지 정책. 내가 대학을 나와서가 아니라 정부 지원이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만 하고 아이 뒷바라지을 하라는데 ....학력이 뒤 떨어지면 학원을 가야 하지만 학원은 먼저 다니는 학생들과 진도가 맞아야 하고 다른 학원은 시험을 쳐야 하는데 시험점수가 안좋으면 안된다고 한다.
과외을 해서 실력을 쌓아야 한다. 전문대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좀 폭넓은 생각을 햇으면 한다. 내가 아이의 과외을 위해서 먹이기 위해서 식당일을 할때는 당장의 카드값과 아이의 교육과 다양한 삶에 대한 이야기을 하면서 힘들어도 무작정 교육방송의 위대한 레슨인가 뭔가을 꼭 틀었다. 해외특파원보고서도 딸이 듣던 안든던 틀었다. 영어을 위해서 BBC,CNN도 틀었는데 영어 울렁증이라고 나중에는 못틀게 했다.
돈이 없는 사람들, 영어 힉원비을 못내는 나는 방송에 기대수 밖에 없다. 한데 더 큰 문제는 요새는 청소년들이 친구들을 학원에서 사귄다는 것이다. 중학교뗴 이야기을 들으니 학기초에 친해진 애들은 같이 같은 영어학원을 다니며 친해지고 같이 학원을 안다니면 친구사이도 멀어진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바운더리가 좁아지는 것이다.
우리딸아이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노래방에 가서 노래을 부른다고 한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다니다가 그다음에는 누구와 다니는지는 이야기을 안했다.아이을 키우고 있으니 다세대 주택에 유치권행사가 들어오는데 자식을 부탁하는 아버지의 마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세입자들을 나몰라라 하지 못하니 딸이 너무 외로웠겠다.
딸도 생각이 .... 할머니에게 다시 같이 살자고 얘기 햇는네 내가 못하겠다고 햇다 .너무나 스트레스가 생겨서 ...하나도 집안일은 도와주지 않으면서 큰소리만 친다. 나는 잠도 잘 못잔다. 딸아이를 다 챙겨서 재우고 내 보도자료나 기사을 쓰고 밤늦게 까지 쓰고 다시 12시전에 어머니 잠자리 봐주고 12시 지난서는 어머니 말씀대로 잘 자고 있는지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 나도 자고 아침에는 쌀을 씻어서 아침 밥읗 해서 밥을 하다가 나중에는 아침밥을 식빵으로 나중에는 힘들어서 밥도 차리지을 못했다. 아침에는 대수간 옷을 입고 대전시청으로 나갔다.
언젠가 코바 충청지역 후배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부모님과 같이 산다고 하니 참 좋겠다는 것이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집안살림을 어머니가 다 해주지 않냐고 나는 웃고 만 말았다.하루제 삼시세끼을 차리면서 내 옷은 헌옷을 입었다. 세 조카들을 돌볼때도 헌옷을 입었다. 어머니는 그래도 큰 아들만 생각하신다. 내가 가르치지 못해서... 아이들이 가방만 들고 학교을 가면 마음이 안좋다고 ...
그전에 살던 집에서 집세을 받아서 이집을 고치면서 남은 돈은 얼마 안되지만 어머니 이야기을 들으니 큰 아들 가죽공예 배우는데 보태라고 주셧단다. 나중에는 보험에서 약관대출을 받아서 조그마한 가게을 월세도 얻어주셧다.
내가 조카들돌보면서 대전에서 취직이 안되어서 대전에서 지역신문사나 공부방을 하겠다고 가게 을 사용하겟다고 하자 안된다고 했다. 남들은 대출을 받아서 아파트을 한채 얻어서 공부방을 하면서 돈을 버는데 말이다.
어머니에게 신협과 삼성카드 빚에 대해서 이야기 한적이 있다. 아무말 말고 있으란다. 벌써 15녀전일이다. 그런이야기을 햇다. 동네 아버지 친구분이 다 죽어가는데 돈이 없어서 병원에 입원을 하지 못하자 그 아줌마가 어머니에게 사정해서 어머니가 그집을 찾아가서 주사을 놓아주어서 그 아저씨가 살았다고 한데 그럴수가 있느냐고.,.....이야기을 들으니 큰 남동생과 어린올캐와 조카들이 살던 아파트대출을 위해서 신협에서 대출보증을 어머니 친구분들이 해주었단다
나는 이세월을 어떻게 넘기며 살다가 요즘에 큰 올캐였던애에게 문자을 넣었다. 만약에 나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우리 딸을 부탁한다고 어머니는 이제서야 미안하다 내가 불쌍하다 하신다.
내가 그냥 외국으로 나갔거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면 ....친구들은 부부 합산해서 600백만원이상을 번다. 천만원을 넘기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혼자서 이혼녀로 딸을 키우는데....애아빠도 술을 마시고 대장암때문에 죽었다고 하지만.....
오늘은 비가 내린다. 한부모 가족지원정책이 뭔가 수정이 되어야 한다. 청소년이 어른보다는 가벼운 용돈으로 친구도 만나서 웃고 더들 수있는 환경이 되러면 사회간접자본으로 청소년, 청년이 갈곳이 있어야 한다.
저개발 국가는 갈 곳이 산으로 들로 있지만 그들에게는 사람들을 만날 길이 없어서 도로을 놓는다고 한다. 어는 독일사회간접자본 프로젝트 메니저는 결혼할 사람을 만나게 해주기 위해서 길을 놓는다는 것이다. 부탄의 깊숙한 집에는 길이 없이 산에 집이 한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우울증에 걸렸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병들의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카톨릭에서는 고해 성사을 한다. 물론 고해성사로 폐해가 많아서 지금도 행해 지는지 모르겟지만 말이다. 한데 누군가에게 자신의 일을 이야기 하고 상담을 받고 하다보면 마음이 게운해 진다. 그리고 홀로 집에만 있지 않고 교회나 성당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쾌활해 진다. 내 친구 하나도 내가 방글라데시을 다녀왔는데 나을 잡고 자기의 어려웠던 시간을 이야기 하며 남편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집에서 친구들 모임을한다는 우울햇던 이야기을 했다. 연연생의 두 아이을 돌보고 하면서 말이다.누군가가 아이들을 좀 돌봐주고 쉴수가 있었다면 ...
그런데 내가 부탄을 다녀왔는데 이 친구가 삶에 적극적으로 변했다. 교회을 일주일에 한번 시댁에 가서 시어머니와 가는 것을 힘들어 햇는데 그때는 교회의 각종 모임에 참석을 하고 교회행사에 참석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치마을 만든다고 미싱을 한다고 이야기 햇다..
가만히 보니 대전에는 청소년들이 가까이에서 갈곳이 많지가 않다. 너무 소비향락으로 변했다. 그리고 종교적 문화활동은 좀 물러나고 교복입으면 커피값을 50%할인해주는 청소년 카페 , 한밭도서관에서 청소년에게 음료값을 50%할인등을 제안햇었는데...한밭도서관 커피는 충남대 학내 커피숍의 아메리카노 2000원보다 비싸다.
나는 대전 태평동에 살다보니 충남대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딸아이와 어머니을 모시고 살때는 버스을 타고 대전예술의 전당을 가는 것도 너무나 멀게 느껴지고 대전 천문대을 가기위해서 환승을 하는 것도 너무나 멀게만 느껴 졌었다.
요새는 딸이 고등학교을 졸업하자 모든 것이 끝난것 같고 식당에 일을 하면서는 아침에 나와서 시원한 아침바람을 맞으며 관평동 가는 길도 가깝게 느껴지고 아침에 커피한잔을 사서 마시는 것도 아침잠을 깨우는 휘파람 같았다.
몸이 안좋아서 일상의 아침을 뒤로 하면서 내가 쓴글을 와디즈 펀딩으로 책을 출간할 생각을 하다가 주춤하다가 이제 다시 몸을 추수리고 와디즈에 노크한다.
과연 내가 방그라데시에서 살다가 느꼈던 것을 한국으로 돌아와 대전에서 살며 또 딸을 키우며 세상에 나아가며 느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