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외국인 무료진료소 문을 여는데 한몫을 해
방글라데시에서 나는 좋든 싫든 여러 병원을 방문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방그라데시에 도착하자마자 덥고 습한 날씨에 감기가 걸려 현지인이 하는 의원에 을 갔다. 방글라데시는 교수를 하거나 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도 오후시간에는 개인 병원을 차려 환자들을 진료한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파견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면서 습하고 차가운 날씨에 감기에 자주 걸렸다.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진료를 보고 처방전을 써주어 병원밖으로 나가 약국에서 처방전대로 약을 사야 했다. 나의 믿음이 부족했던가? 아니면 제3세계 국가에서는 선진국 제약회사에서 약을 임상실험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약을 먹다가 말기도 했다.
아사드 게이트 원예센터에서 병든 가지을 꺾어 버린 손으로 땀이 나는 목을 만져 생긴 빨간 발진으로 친구와 다카 굴산에 위치한 외국인진료센터를 방문핫기도 했다.
독일에서 공부한 훤칠한 키에 잘생긴 방글라데시인 의사가 영어로 진료를 보는 아주 분위기 좋은 병원이었다. 이 의사는 나의 목에 생긴 발진을 진료하면서 이 의사가 책을 펼치며 진료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의사의 진료를 받으면서 방문상담을 생각하게 되었다. 원예센터에 찾아와 집으로 초대하여 정원을 보여주거나 바나나 과수원을 보여주거나 하면 책을 보고 공부해서 아열대원예작물에 대해서 재배 키포인트을 이야기 해주곤 했다.
어느 날은 아사드 게이트 원예센터에 자주 방문하는 어느 수녀가 나을 데리고 시슈하스피탈이라고 불리는 어린이 병원에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미국에서 원조로 지어진 병원으로 그 수녀는 약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 방글라데시는 어디를 가든 병원에서는 의사가 처방전을 써주면 환자들은 병원밖의 약국이나 양철지붕의 약 파는 곳에서 처방받은 약을 사 와서 치료를 받는 구조였다. 병원에 입원을 해도 처방받을 약을 살 돈이 없으면 치료를 받기 힘들다.
어느 날에는 한 방글라데시 사람이 나을 찾아왔다. 자신의 아내가 배가 아파서 애을 낳아야 하는데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다. 배가 아픈지 여러 날이 지났다고 했다. 아마 다카 종합병원이었던 것 같다. 그 남자와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가서 애을 낳게 도와주었지만 사산아을 낳았었다. 그 환자를 병원에 입원시켜 애을 낳게 하는 동안 돈을 안 가져가서 은행에 가니 마감시간이라고 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작정 다카의 굴산에 위치한 한국인 식당인 서울식당에 가서 직물가게를 겸 하는 남자사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돈을 꿔서 다시 병원을 갔을 때 간호사는 사산아을 보여주었다.
한 번은 봉사단원으로 같이 갔던 동료단원이 현지병원에 특실에 입원을 해서 병간호를 하고 죽을 쑤어다 주고 해서 가보고 방글라데시 대사관 영사부인이었던 한국해외봉사단 선배 언니가 현지 산부인과 병원에서 애기을 낳아서 병원을 방문해 보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국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 무료 진료소에 봉사를 다니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25년 전에는 외국인을 위한 병원들이 많지 않던 시기이고 외국인근로 자을 위한 무료진료소 수준이 워낙 열악했었다. 그들의 아픔을 들어줄 영어를 할 줄 아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별로 없었고 서울 신림동에 요셉의원을 찾는 외국인 근로자의 하소연을 들어줄 인력도 턱없이 부족하던 때이다. 매주 금요일마다 찾은 요셉의원에는 나는 약사의 약을 조제하는 일을 도와주거나 외국인 근로자가 오면 말상대를 해 주는 봉사활동을 하다가 부탄 UNV로 나갔다.
그때 가슴이 가장 아픈 것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여권을 고용주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땅히 진료받을 곳이 마땅히 없던 그들은 청주에서 고양에서 의정부에서 천안에서 안양등 경기도 지역등에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신림시장 요셉의원을 찾아서 왔었다.
부탄을 다녀온 후에 전화를 해보니 영등포로 옮기어 한국인만 진료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동성중고등학교의 강당에서 이주일에 한 번씩 외국인 무료진료소가 섰는데 외국인 진료소가 경기도 일원에서 오는 외국인근로자들로 문전성시을 이루었다. 그곳에서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진료하는 일을 돕는 자원봉사자교육을 받아서 자원봉사자로 투입이 되었다. 라파엘 클리닉이라고 불리었는데 외국인 근로자 무료 진료소가 서는 날에는 학교밖에서는 외국인근로자을 위한 아열대작물등을 파는 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보건복지부에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병원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기도 하고 대전에서는 대화동의 한 교회에서 하는 한국어교육에 자원봉사자로 일하다가 그 교회 전도사에게 대전에도 외국인 근로자 진료소가 섰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서울 라파엘 클리닉을 인터넷으로 보라고 했고 그들은 일을 진행시키오 대전 중구 은행동에 외국인 무료진료소을 열었다. 지금은 외국인 근로자 복지회관으로 발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외국에서 살면서 가장 서러울 때가 아플 때가 아닌가 생각으로 결혼하기 전까지는 외국인 근로자을 위한 진료소등에서 봉사활동을 했었다. 그때 느낀 점은 무료진료소등의 외국인 상담소을 찾아가며 느낀 점은 그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이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상담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부자로 생각을 한단다. 개발도상국의 엔지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반인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일하는 것을 보아서 일 것이다.
어느 외국인 상담소에서는 의료공조를 하고 있었다. 병원에 가는 것은 많은 돈이 필요하므로 한 달에 얼마씩을 내서 의료비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외국인들에게까지 의료혜택이 주어지지 않았고 비싼 진료비을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했다.
세월이 흘러서 가끔씩 병원에 가서 보면 임상실험에 참여하실 분들을 찾는다는 포스터을 보면 나 혼자 미소를 짓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