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직원의 도움으로 셋집부터 살림살이 마련해
방글라데시에서 남들과 다르게 여유가 있었던 것은 내가 아사드게이트 원예센터에 간 시기가 겨울이라 농한기였다는 사실이다. 12월에 오피서 오더로 발령을 받아 센터에 갔을 때는 한가한 시기였다.
카운터 파트너였던 아이사의 여유로운 센터생활을 이방인인 내가 방해는 하지 않았는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고마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돌보듯이 내가 부임하기 전에 내가 살 집을 찾기 위해 릭샤를 타고 같이 돌아다니며 TO LET이라고 쓰인 네모난 간판을 보며 내가 집을 구할 때까지 서포트을 해 주었다.
센터에서는 그 집에 들어놓을 침대를 사는 것도 도와주었다. 조립식 침대가 아니라 조끼다라는 나무 조각을 이은 평상에 네 귀퉁이에 나무 막대기을 세워 모기장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사드 게이트 원예센터 용역직 직원들은 내가 요와 이불을 사는 것도 도와주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생산되는 솜으로 요와 이불을 만든 것이었는데 빨간색으로 싸서 이불을 만든 것이었다. 나는 조끼다 위에 빨간 욕을 깔고 잤다. 침대 매트가 아니라 말이다.
딸을 키우면서 솜이불이 환경적으로 좋다 해서 솜이불을 타서 다시 솜이불을 만들었었다. 아마 방글라데시에서도 솜이불을 해년마다 새로 타서 다시 실로 꿰매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내가 살던 집에는 도시가스가 들어와서 가스레인 지을 샀었는데 화구가 두 개가 있는 것으로 판이 단단했다. 밑에는 받침대가 없었지만 식당의 가스렌인지와 같이 단단했다.
일본인 협력대인 JOCV가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나는 하얀 면이불과 천장에 다는 커다란 선풍기를 선물로 받았었다. 아마 내가 살 던 집에 있는 스탠드형 작은 선풍기을 보아서 큰 선풍 기을 선물로 주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선풍기을 내가 상처를 치료해 주던 여자에게 선물했다. 상처가 빨리 아물라는 생각에....
책상을 목공소에서 맞추었다. 내가 사용할 책상을 종이에 치수를 적어서 주니 그대로 똑같이 만들어 주었다.
방글라데시의 거리에 익숙해 지자 간간이 대나무 의자, 대나무 책상 등을 파는 가구점도 눈에 들어왔다.
아이사에게 물어서 천을 파는 가게에도 가서 커튼을 할 천을 사고 테일러샵에 커튼 치수를 적어서 건네주니 금방 커튼이 완성되었다.
아이사는 내 살림살이을 사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느 날 그녀는 이슬람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가 들리자 사무실에서 양탄자를 깔고 기도를 올렸다. 나는 그녀의 기도 올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슬람 기도시간은 하루에 다섯 번 울리는데 기도시간을 알리는 확성기의 아잔 소리가 들리면 남자들은 하얀 뚜삐을 머리에 쓰고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향한다.
방글라데시는 개방적인 이슬람국가로 공산 국가라고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허용이 돼서 90%가 이슬람 힌두교도가 약 9% 나머지는 가톨릭, 기독교, 불교등을 믿는 국가였다.
어디를 가나 특히 나이 든 노인들은 하얀 모자인 뚜삐에 남자전통복장인 방자비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피스에 나가는 사람들이나 릭샤꾼들은 와이셔츠를 많이 입고 다녔다.
여자들은 혼자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드물었고 여자들은 바깥에 나갈 때 남자들과 같이 나간다고 한다. 남자들이 시장에서 장을 봐서 집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아사드게이트 원예센터에 근무할 때 맨샤햅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방글라데시 전통복장으로 여성들이 입는 샬로와르는 주머니가 없다. 남자들이 입는 전통복장인 윗옷에는 주머니가 있었다. 그래서 종종 방자비라고 불리는 옷을 입고 다녔다. 방글라데시의 돈 단위는 따까라고 하는데 종이지폐와 동전들을 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농한기에 다카의 이퀴발 로드로 이사를 하면서 아서드게이트 원예센터의 직원들은 나의 다카 생활의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피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