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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에서 향수병인 홈씩을 어떻게 달랫을까?

외국인 근로자나 유학생들은 어떻게 홈씩을 이겨내고 있을까?

by 박향선

난 대학을 졸업하고 그 다음해에 서울으로 취직돼 올라갔다. 처음에 서울에 올라가서는 매주마다 그러다 한달에 한번씩은 서울에서 대전을 내려왔다 올라갔다.



처음에는 대전에 내려왔다가 서울을 올라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눈물이 났다. 서울역에서 기차을 타고 내려오면서 대전역에 가까워지면 기분이 좋았었다. 대전역에 내려 대전역광장을 걸어나오면 미소가 번지기도 했다.



그러다 한국청년해외봉사단으로 방글라데시에 파견이 되었었다. 봉사단으로 가서 생활에 적응을 하면서 날씨도 더워지고 일에 젖어들 무렵에 슬럼프에 빠지면서 한국으로 돌아가고픈 생각도 든적이 있었다.



가고파란 가곡처럼 난 정말로 2년계약을 해지하고 중간에 한국에 돌아가고픈 때가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오손도손 이야기도 나누고 어머니가 끓여주는 된장국에 밥을 말아먹고 싶었다.



HOMESICK에 걸렸었던 것 같다. 한국청년해외봉사단 국내훈련에서 친하게 지내던 단원들에게서 온 편지도 몇개월 정도 답장을 안하고 있었던 적이 있다. 답장도 안하는데 먼저 편지을 보내온 단원이 있어서 정신이 들기도 했다.



방글라데시수도인 다카에서 한국청년해외봉사단사무소인 호스텔이 있던 웃토라로 가는 길에 공항이 있었다. 어느날은 웃토라 호스텔을 가다가 공항을 가게 되었다. 마침 그곳에서 조그마한 연못가에 커피숍을 발견하고 한국에 가고 싶으면 그 공항 커피숍에 가서 조용히 생각에 잠기거나 하다가 집에 돌아가곤 했다.



고향이 그리워 아니 서울 아니 대전이 그리웠었다. 그럴수록 소니 12밴드 라디오을 머리맡에 두고 그 나라 시간으로 밤 11시가 되면 나오는 KBS 해외방송을 열심히 들었다.



후배들이 가져온 한국소설책이나 다카 한인들에게서 구한 한국책은 향수병을 잊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다카 호스텔에 책꽃이을 준비할 것을 코디네이터에게 제안을 했고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는 KOICA에서 보내주는 월간잡지 원예와 코이카에서 보내 준 원예관련서적을 그곳에 기증하고 왔다. 한데 내 이름을 적지을 않았다. 1996년도 한국청년해외봉사단 귀국모임에서 나눔과 섬김지을 만들때도 내이름을 적지 않았었다.



그밖에 나는 방글라데시 다카의 영국문화원에서 문고판크기의 영어동화책을 빌려 읽고 영어학원을 수강하면서 영어을 공부하고 다카대학근처의 영국문화원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으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으러 애썼었다. 열대의 잠못드는 밤에는 새벽에 일어나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편지을 쓰기도 했다.



왠지 한국이 그리워지면 동료단원들에게 편지을 쓰기도 하고 노을이 지는 저녁무렵에는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을 걸기도 했다. 동료단원들이 보내오는 글을 보며 다른 나라로 파견이 된 나라사정을 알게되고 식견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사드게이트 원예센타을 방문해 한국수녀들이 있는 곳이나 병원등의 방문 기회을 준 수녀을 통해 방글라데시에 내가 와 있다는 생각을 하며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기도 했지만 방글라데시 다카의 잘사는 동네인 굴샨지역에 위치한 한국식당 아리랑에 가서 짬뽕 한 그릇을 먹으며 동료 단원들과 한국음식을 먹으며 이야기을 나누면서도 고향을 그리는 향수병을 달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식당의 한국음식은 너무나 비쌌었다.



조용히 쉬고 싶으면 집 근처에 소나르가온 호텔을 찾았다. 작은 선풍기가 전부엿던 나에게 호텔 로비 커피숍은 굉장히 시원하고 조용해서 조용히 책을 읽다오거나 편지을 쓰거나 커피 한잔을 마시고 호텔밖을 나와서 그 앞에 카오랑 바자르라는 농산물도매시장을 둘러보고 집에 오곤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근로자을 위한 진료센터 자원봉사을 하면서 그들은 어떤 여가 활동을 하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달래는지 젊은 유학생들을 보면서 그들은 공부하면서 어떻게 휴식을 취하는지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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