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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악! 네팔의 밤, 낭떠러지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나.

제2의 생을 선물해준 70일간의 첫 네팔 여행 (1)


여행 기간: 2019.2.20~2019.4.30

카트만두/ 네팔에서 처음으로 향했던 장소, 스와얌부


# 삶과 죽음,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서

- 네팔의 창구 나라얀 마을의 낭떠러지에서의 어느 밤


‘아아악!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느낌이다.

이것은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 맞단 말인가.

제발 현실이 아니기를.’


마치 영화 속 가장 극적인 장면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나는 네팔의 어느 낭떠러지를 홀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내 나이 서른하나.

아직 창창해도 몹시 창창한 나이인데,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가.

정말 난 이 세상을 등지게 되는 것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굴러가게 될까.

어디에 부딪치게 될까.

피가 철철 나게 될까.

분명 많이 아프겠지?

아아, 무섭다⋯.

너무나도 무섭다⋯.’


높은 언덕에 위치한 ‘창구 나라얀’(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힌두 사원이 있는 작은 마을로, 사원은 ‘비슈누’ 신을 모시고 있다. 네팔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원이기도 하다.) 마을의 숙소로 향하던 중 일어난 일이었다. 오토바이 사고였다. 친구가 운전하던 오토바이를 뒤에 타고 가고 있었는데 친구가 왼쪽으로 커브를 돌 때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만 것이다.


왼쪽 무릎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발목에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을 느꼈다. 아파서 ‘아⋯.’하고 신음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래로 구르기 시작을 하는 것이었다. 밤이었기에 내가 길의 가장자리 부분에 걸쳐진 매우 아슬아슬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낮이었다면 길의 가운데로 몸을 재빨리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꽤 높은 곳까지 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바로 아래는 가파른 낭떠러지라는 것도 예감했다. 무엇이라도 볼 수 있다면 붙잡을 만한 것을 찾았을 텐데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었다.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그저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신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제발, 제발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때로 생이 힘겨울 땐 이럴 거면 뭐 하러 사나.

그저 죽고 말지.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저는 아직 하고 싶은 것이 정말이지 많아요.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더욱 충일하게 생을 살아갈 거예요.

그러니 부디⋯.

제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하고 말이다.


또한 부모님께도 마음속으로 이별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엄마, 아빠. 저 네팔에서 이렇게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두 분을 다시는 뵐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때 한국에서 뵌 것이 마지막이었고, 네팔에서 저 이렇게 가면 어떡하죠⋯. 더 잘해드릴 것을⋯.’


그러나 죽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기적이 일어나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니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죽지 않을 거야. 어떠한 기적이 일어나 나를 살려줄 거야.’하면서 말이다. 비행기 추락 사고와 같이 사람이 갑작스러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때, 그 찰나의 순간에 무수히 많은 생각이 오간다고 하던데⋯.


사실이었다.

그 순간, 시간은 정지했고 그 경험은 묘사하기 힘들 만큼 매우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카트만두/ 스와얌부(Swayambhu)에서 마주한 촛불. 영롱하다.




# 나의 구원자, 낭떠러지에서 유일무이했던 나무

- 나무가 내게 가지는 의미


데굴데굴.


도대체 어디까지 나는 굴러가는 것인가.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공포감에 몸에 힘을 거의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나 기다렸던 기적은, 결국 내 편이 되어 주었다. 무엇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나를 꽉 안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 너는 떨어지면 안 돼. 이제 안전하니 괜찮아. 안심해.’라고 말해주는 듯한, 따스하고도 강력한 포옹이었다.


아아, 그때의 안도감이란⋯. 철렁거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후 마을 주민 분들이 손을 뻗어주셔서 다시 중심이 되는 길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침 운 좋게도, 창구 나라얀의 마을 이장님의 차가 사고 현장을 지나갔다. 이 상황을 보신 이장님께서는 당신의 차에 나를 태우시곤 박타푸르에 위치한 박타푸르 병원의 응급실로 데려다주시는 엄청난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차에 몸을 싣는데 가슴이 너무 놀란 나머지 울음이 터졌고, 어머니뻘 되는 여성 주민분들께서 내 눈에서 흐르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셨다. 지금도 생생히 그려진다. 차에 앉아 창문을 내다보는데 여러 주민 분들께서 내가 떨어졌던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바라보시던 뒷모습이 말이다. 병원에 도착해 침대에 누워서도 이 모든 상황이 그저 너무나 놀랍고 믿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참기 어려웠다.


박타푸르 병원의 응급실 병동에서는 흐느끼는 내 울음소리가 넓게 울려 퍼졌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병동과 엑스레이 실을 오갔고 엑스레이 검사 결과, 천만 다행히도 뼈는 모두 무사했다. 연조직 손상이라는 진단 결과를 받았고, 왼쪽 발은 오른쪽 발의 두 배가 되어 보일 정도로 퉁퉁 부어올랐으며 제대로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사고가 난 이후 줄곧 사고 현장에 다시 찾아가고 싶었다. 사고가 난 지점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를 살려준 것이 나무라는 사실을 듣고는 나무에게 고마움을 반드시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고 며칠 후, 낮에 사고 현장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했던 주변 환경을 보고는 꺽꺽 오열을 했다. 깊은 낭떠러지의 저 끝까지 구르고 굴러 떨어지는 나를 상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장에는 큰 바위들, 그리고 사람들이 버린 빈 맥주병들을 비롯한 여러 쓰레기로 가득했다.


나무가 아니었더라면 

사망을 했거나, 

뇌사를 했거나,

반신불수가 되었거나,

혹은 전신에 흉터를 입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였다.


알고 보니 나무 아래에는 하얀 포대자루가 있었다. 바로 그것과 나무의 넝쿨 사이에 걸려 더 이상 굴러가지 않고 내가 멈춰 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만 다른 각도로 떨어졌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나를 살려준 그 나무는 그곳에 있던 유일무이한 나무였다. 또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나무의 넝쿨이 굉장히 독특하다는 것이었다.


‘ㄴ’ 자 모양으로 넝쿨이 길게 늘어져 있는 나무였는데 살면서 그런 나무는 처음 보았다. 마치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 나무는 넝쿨을 길게 뻗어 나를 감싸 안아주었다.

창구 나라얀/ 나의 구원자, 나무 넝쿨. 넝쿨과 흰 포대 자루 사이에 끼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를 살려준 나무에게 거듭 고마움을 전했다. 나를 살려주어 고맙다고. 나를 살려준 것을 잊지 않을 것이고, 나를 살려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니 앞으로 그 이유를 찾으며 살겠다고⋯. 살려준 목숨이 헛되이 되지 않게 앞으로의 생을 살아가겠노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무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는 나뭇잎을 가져다가 당시 읽고 있던 책에 꽂아 넣었다. 마음이 지치거나 나태해질 때마다 나뭇잎을 보면 다시 새로운 기운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나뭇잎을 담은 그 책은 지금 내 방에 소중히 모셔져 있다.


네팔 여행을 갔을 때 들고 간 책에 고이 넣어 둔 나뭇잎. 이제 내게는 더없는 축복의 상징이 되었다.




▼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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