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생을 선물해준 70일간의 첫 네팔 여행 (2)
# 용서는 타인이 아닌 결국, '나'를 위한 것
- 박타푸르 숙소의 침대에서 연습한 '마음에 생채기를 낸 타인을 용서하는 법'
사고 이후 2주 간 박타푸르의 숙소 방에서 베개와 쿠션을 쌓고 다친 왼쪽 다리를 올려 둔 채 아침부터 저녁 식사까지 1층 데스크에 전화를 하여 음식을 배달받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만 침대에서 나와 오른발로 깽깽이를 하며 걸어갔다. 행복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 네팔까지 먼 길을 한 것인데 이게 갑자기 무슨 신세인가 싶어 스스로가 비참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상태가 좋아지면 하고 싶은 것들을 죽 적어보며 기대감에 부풀기도 했다.
너무 놀라고 걱정하실까 봐 부모님께는 계단에서 굴러 다치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참 불편했고, 혼자 그렇게 속을 삭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가슴을 저리고 옥죄어 온 것은 사고 이후 창구 나라얀 마을에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변한 태도였다.
나는 창구 나라얀 마을과 숙소가 모두 마음에 들어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달 가까이 시간을 보냈다. 호스트 부부의 어린 딸과 친척들과도 웃고 대화 나누며 정을 쌓아왔다. 사고 이전에는 ‘초리(네팔어로 ‘딸’이라는 뜻)’라고 부를 정도로 친근하게 대해주던 호스트는 사고가 발생하니 태도가 돌변했다.
우리는 나야 바르사(Naya Barsa, 네팔 달력으로 새해를 의미)를 맞이하기 전날 밤, 박타푸르의 어느 카페에서 여러 사람들과 즐거운 때를 보내고 있었다. 호스트 부부는 창구 나라얀으로 먼저 떠나면서 한 친구가 이후 창구 나라얀으로 향할 것이니 그 친구와 함께 오라고 내게 전했다.
그렇게 말을 전하고는 떠났는데 사고가 일어난 다음 날, 다친 나를 보자마자 하는 말은 “Why did you come back? You made the wrong decision to come back. (너 왜 다시 돌아왔어? 다시 돌아오기로 한 것은 너의 잘못된 결정이었어.)”였다. 나중에 그 친구와 오라고 분명히 말을 하고 떠났으면서 말이다. 어떠한 위로도 없이 나를 향해 책임의 화살을 온통 돌리는 것이었다. 한 달 동안 우리가 함께 웃고 정겹게 보냈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 마치 심장이 갈기갈기 난도질당하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숙소 호스트뿐 아니라 사고를 낸 친구 또한 별 반성의 기미 없이 “You can blame me.(나에게 책임을 돌려도 돼.)”라고 하면서 낄낄 웃고 떠드는 것이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이제까지 그러한 사람들과 따듯하고 깊은 교류를 해왔다고 생각해온 내가 참 우스웠다. 자괴감마저 들었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말이 딱 이 상황이구나 싶었다.
사고 이후, 별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므로 나는 숙소에서 주로 누워만 지냈다. 그러면서 아픈 다리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유튜브에서 용서에 관련한 영상을 찾아 시청하기도 했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그들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는 것’이라는 말을 계속 되새겼다.
‘그들에게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비즈니스는 생업이 달린 문제인데 두렵기도 많이 두려웠겠지. 나는 그들의 마을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떠나는 방문객이자 아웃사이더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생활을 이어나가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위험이 닥치니 내게 책임을 모두 돌리는 식으로 차갑게 대한 것이겠지. 사람은 나약하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어떻게든 미워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생명을 잃을 뻔한 사람을 두고도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지 참 잔인하다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일어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나의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낸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우라는 뜻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렸으므로.
# 시바 신은 정말 나를 부르신 것이었을까.
- 오래도록 만나고 싶었던 네팔에 오게 된 계기
이번 네팔 여행은 10년 넘게 기다려온 것이었다. 꽤나 오래도록 네팔을 가고 싶다고 생각해왔는데 작년에서야 드디어 가게 된 것이었다. 네팔에 가고 싶었던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인 2009년에 읽은 책에서는 안나푸르나를 오르며 감동했다는 어느 대학생의 이야기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또한, 웹툰 작가 낢의 네팔에 관한 만화를 흥미롭게 읽기도 했다.
2012년에는 교환학생으로 태국에 체류를 했는데, 당시 만난 한국계 미국인 친구가 방학 중에 네팔에 다녀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친구는 네팔 여행을 하고 난 후 자신의 생에 더욱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전해주었다. “Thanks, God. Thanks, mom and dad. 하느님, 감사합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라며 유창한 영어 발음과 생생한 목소리와 함께 말이다.
2015년에는 1년 간 동남아시아 장기 배낭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여행 중반부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한 호스텔에서 어느 스위스 여행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네팔에서 거주 중이라고 한 그는 지진 때문에 사람들이 현재 네팔 여행을 꺼리고 있지만, 지진이 난 직후인 지금이 여행을 가기 굉장히 좋은 시기라고 말해주었다.
사람들로 붐비지 않아 한산하기도 하고, 지진으로 어려워진 네팔 경제를 관광을 통해 도울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의 말에 강하게 이끌려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네팔을 지금 가볼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나 결국 동남아시아에 집중하는 선택을 했었다.
2018년에는 유튜브에서 ‘크리슈나 다스(Krishna Das)’라는 미국 출신 뮤지션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전통적인 힌두교 음악을 현대 음악과 조화시켜 명상 음악을 대중화시킨 인물이다. 힌두교에 특별한 호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목소리와 음악에는 분명 힘이 있었다. 중독성마저 있어서 나는 그의 음악을 알게 된 이후로 그것을 셀 수 없이 많이 들었다. 특히 <Om Namah Shivaya>를 말이다. (이 글을 쓰는 2020년 1월 14일 기준, 유튜브에서 이 음악 영상은 무려 1,315만 조회수를 넘어서 있다.)
내가 이 음악에 한창 빠져 지내왔다고 지내자, 한 네팔 친구는 시바 신의 ‘calling(부르심)’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어 이후 누군가 왜 네팔에 왔냐고 물으면 시바 신이 날 부르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전하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 계기는 2019년 새해에 미얀마 여행을 갔을 때였다. 미얀마 친구가 네팔에 가고 싶다는 말을 했고, 이것이 네팔행에 대한 내 마음의 불을 더욱 활활 지핀 것이었다.
이렇듯 네팔에 가고 싶었던 이유가 나에게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2019년 2월 20일, 타이항공으로 태국 방콕을 경유하여 다음 날인 21일 오전에 드디어 네팔 카트만두 트리뷰반 공항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사실 네팔로 향하기 전 나는 출퇴근 시간, 근무 강도, 분위기 등 여러모로 근무 조건이 좋은 직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꽤 오랜 방황을 거쳐 만나게 된 귀한 곳이었기에 의미가 컸으나, 시간이 흐르게 되면 안락함에 젖어 안주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곳에 오래 있을수록 도전이 더욱더 어려워질 것 같아 오랜 고민 끝에 내겐 달걀노른자와 같았던 자리를 떠나는 결단을 한 것이다. 다른 직종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새로운 일을 하기 전에 몇 달간 여행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목적지는 바로 내가 오래도록 외 사랑을 해왔던 네팔로 정했다. 그리고 네팔에서 마인드를 송두리째 리셋(Reset)하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 마지막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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