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으로 뒤집히는 때라도, '살아온 기적은 살아갈 기적'이 되리니.
어제 TV를 돌리다가 스티븐 호킹 박사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영화를 보게 되었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원제는 'The Theory of Everything'이다.
배우 에디 레드메인이 호킹 박사에 빙의되어 연기하는 모습은 매우 놀라웠다.
그렇게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 스티븐과 제인이 정원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그 순간, 나의 시간은 정지하는 것 같았다.
바로 음악 때문이었다.
'어, 이 음악!! 어디서 들었더라?'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뮤지션의 이름이나 음악 제목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후 찾아보니 그것은 내가 유튜브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곡이었다. 하지만 그 영화의 주제곡인 줄은 몰랐다. 그 주제곡은 서정적이고 차분한 음악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과 잘 들어맞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n88MReEC27k
거기에 스티븐 호킹이 하는 말까지 더해져 영화는 나의 마음에 강한 울림을 주었다.
However bad life may seem,
there is always something you can do.
While there is life, there is hope.
"아무리 우리 삶이 나빠 보일지라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있습니다.
살아 있다면 희망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에 그만큼 위로해줄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희망' 하면 긍정적인 상이 떠올라야 하는데 내게는 그것과는 또 달리 떠오르는 상황이 있다.
내가 어쩌다가 발을 들인, 입시 교육에 특화된 어학원에서였다.
그곳에서 나는 다른 강사분들이
"시험 기간인데 무슨 화장을 하고 있어! 눈X 뽑아!",
"(아이가 없는 상황에서) 미안한데요, 걔는 쓰레기야."와 같은 말을 들었다.
이외에도 도가 지나치는 말이 오갈 때가 상당히 많았다. 아이들에게 격한 표정을 짓거나 소리를 지르며 말하는 것 또한 도무지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내가 1년간의 아시아 배낭여행을 다녀온 직후라, 맑은 기운으로 가장 충만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 상황이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평소 내가 지혜를 구하는 인생 10년 선배인 아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어서 힘들다고 말이다. 그러자 언니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언니는 내게 "세상에 너무 희망을 갖지 마."라고 이야기했다.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든 장착해야만 하는 필수 아이템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구나. 내가 순진했던 거구나.'하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나는 희망을 조금씩 버려가기 시작했다. 그 편이 마음이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적 폭력이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상황은 자주 맞닥뜨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픔의 정도는 그보다 더 클 수도 있는 언어폭력을 비롯한 각종 폭력이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차라리 희망을 버리는 것이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덜 아프기 위해, 나는 물건을 버리듯 희망을 조금씩 버리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자정에 가까운 시각에 내가 근무하는 원으로부터 긴급 문자가 왔다.
코로나 19가 '심각' 단계 격상에 따라 확산 방지를 위해 방과 후 과정반(종일반) 운영이 긴급 돌봄 체제로 운영된다는 내용이었다.
교사들은 정상 출근을 했다. 오늘 몇 명이 왔는지 부 원장님께 여쭈자, 단 12명이 등원했다고 하셨다. 내가 근무하는 원은 규모가 꽤 있는 곳인 데도 말이다. 게다가 요즘은 맞벌이가 기본이기에 원생의 절반은 종일반에 등록되어 있다.
마음이 심란해졌다. 내가 얼마 전 사랑니 발치를 하기 전에 맞은 마취 주사처럼, 연일 들려오는 뉴스는 나의 표정을 잃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제 본 영화에서 호킹 박사님이 하신 말씀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While there is life, there is hope."
"While there is life, there is hope."
"While there is life, there is hope."
그래.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어.
희망을 잃지 말자. 잃어선 안돼.
그렇게 오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말하며 다가 올 학기 준비를 했다.
매일 글쓰기 작업이야 게으른 나를 어떻게든 구슬리면 할 수 있는 노력이다.
그런데 코로나 19 앞에서는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내가 득템한 26만 원짜리 네팔행 티켓을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 했다. 도서관에서의 니체 읽기 프로그램도 아직 일정이 남아있는데도 폐강되고 말았다.
내가 이제껏 신청해 놓은 강연이나 모임도 오늘 모두 취소해야만 했다. 두 개의 트레바리 독서모임, 한겨레 교육문화센터에서의 여행 작가 관련 수업, 문토에서의 연기 수업, 그리고 모티브 소사이어티에서의 자서전 쓰기 모임 모두를 말이다.
번거롭게 취소해야 하는 상황도 피곤했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모두 놓치는 것이 참 아까웠다. 하지만, 지금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지적 욕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목숨도 목숨이지만, 생업이 위협받는 분들도 많은 상황에서 말이다. 프리랜서 강사인 우리 엄마도 결국 당분간 출강을 중단해줄 것을 회사들로부터 요청받으셨다.
이렇게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코로나 19가 주는 위압감에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확진 판정까지 받지는 않았더라도, 바이러스가 주는 부정의 기운은 슬프게도 우리를 이미 온통 전염시켰다.
그 바이러스에 어떻게든 대항해 보고자 나의 학창 시절부터 든든한 벗이 되어준 故 장영희 교수님의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몇 년 전, 전화 너머에서의 그 언니는 내게 희망을 너무 갖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는데 이제는 하늘에 계신 교수님은 여전히 긍정과 희망을 노래하고 계셨다.
언젠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느 학생이 내게 물었다.
“한 눈먼 소녀가 아주 작은 섬 꼭대기에 앉아서 비파를 켜면서 언젠가 배가 와서 구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비파로 켜는 음악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물이 자꾸 차올라 섬이 잠기고 급기야는 소녀가 앉아 있는 곳까지 와서 찰랑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는 자기가 어떤 운명에 처한 줄도 모르고 아름다운 노래만 계속 부르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녀는 자기가 죽는 것조차 모르고 죽어 갈 것입니다. 이런 허망한 희망은 너무나 비참하지 않나요?”
그때 나는 대답했다. 아니, 비참하지 않다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든 안 부르든 어차피 물은 차오를 것이고, 그럴 바엔 노래를 부르는 게 낫다고. 갑자기 물때가 바뀌어 물이 빠질 수도 있고 소녀 머리 위로 지나가던 헬리콥터가 소녀를 구해 줄 수도 있다고. 그리고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그 말은 어쩌면 그 학생보다는 나를 향해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
-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에필로그 중에서 -
코로나 19는 강력한 놈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보인다.
운명의 신은 우리를 어떠한 길로 안내하실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활기를 잃게 되지만, 이럴 때일수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안과 공포의 늪에 더더욱 빠져들기보다는, '공동체'라는 자각과 더불어 연대하는 힘을 길러야 할 때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오늘, 곧 만나게 될 6세 아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정성껏 했다. 다음 달이면 새롭게 만날 아이들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턱밑까지 물이 차올라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교실 안의 먼지들을 닦아냈다.
교실을 단장하기 위해 벽에는 알파벳 카드를 붙이고, 갈색을 띤 지류를 찾아 오려내며 나무 교구를 만들었다. 수업 시간에 쓸 자료들을 찾고 또 찾았다.
현재 우리 원은 비상 체제로 돌아가고 있으며 아이들과 교사들 모두 마스크를 착용한 채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새봄은 결국 올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풍랑으로 뒤집히는 때를 맞는다고 하여도,
곧 위기의 운명에 처해진다고 하여도,
나는 비파를 켜겠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겠다.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과 무관하게, 바닷물이 나를 서서히 뒤덮는다고 하여도 나는 그 눈먼 소녀처럼 희망을 이야기하겠다.
누군가는 그것이 허상이라고 하여도,
나를 두고 어리석다 하여도,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리겠다.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기 때문이다.
While there is life, there is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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