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과 편안함, 친근하고 정겨움, 소박하고 서민적인 단어, 누룽지와 숭늉. 이름만 들어도 구수하고 군침이 돌아 고향마을의 친구 찾듯 어린 시절로 찾아간다. 무쇠 가마솥에 밥을 지은 후에 솥바닥의 잔열로 눌어붙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누룽지의 깊고 구수한 맛은 어디에 비하랴. 누룽지는 군것질거리 귀한 시절에 간식이었고 여행길의 요긴한 비상식량이었다. 식솔 많았던 그즈음 가마솥 누룽지에 쌀뜨물을 붓고 끓여낸 숭늉은 밥그릇 바닥을 긁던 아이들의 배를 채우는 노릇도 하였다. 그 쌀뜨물 숭늉 맛은 지금도 못 잊는다.
누룽지와 숭늉은 우리나라의 가마솥 문화와 함께 탄생하여 오랜 세월 동안 서민들의 간식과 구황식(救荒食)을 겸했던 친숙한 음식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누룽지를 취건 밥(炊乾飯)이라 하여 약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병이 있을 때 소화와 치료를 돕는 환자식으로 누룽지를 활용하였다 한다. 또 누룽지는 딱딱하고 수분이 적어 보관과 휴대가 쉬워 군량미나 먼 길을 떠나는 여행자의 비상식량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서당에서 천자문을 외우던 아이들이 지루함을 달래려 “하늘 천, 따 지, 깜밥 눌은 밥”이라고 외우며 웃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만큼 누룽지는 친숙하고 인기 있는 간식이었음을 보여준다. 누룽지에 물을 붓고 끓인 숭늉은 솥을 씻는 실용적인 목적과 함께 식사를 마무리하는 토속 음료 역할을 하였다. 숭늉은 값비싼 차 문화가 발달한 중국, 일본과는 다른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식문화를 형성하였다.
요즘은 누룽지와 숭늉을 접하기가 어렵다. 편의와 영양, 맛을 추구하는 압력밥솥은 아예 밥이 눋지 않는다. 쌀은 절약되지만, 숭늉이나 누룽지는 맛볼 수 없다. 그래도 간식이나 아침 간편식으로 누룽지가 널리 먹힌다. 음식점에서 후식 메뉴로 누룽지가 나오는 곳도 더러 있고 누룽지삼계탕도 메뉴로 등장한다. 프라이팬으로 혹은 전자레인지로 누룽지 만드는 법이 소개되고 누룽지 만드는 기계도 판매한다. 손쉽게 누룽지를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예전의 가마솥 누룽지 맛은 아니다.
글 벗으로 동행하는 이로부터 현미 누룽지를 한 소쿠리 선물 받았다. 고맙게도 먹성 좋은 나를 위하여 정성 들여 손수 만든 것이리다. 바삭바삭 씹히는 식감과 구수한 맛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따뜻하게 끓여 먹으니, 하루가 든든하고 차에 두고 먹으니 자꾸만 손이 간다.
김장 도우러 아들네가 왔다. 워낙 김치를 좋아하는 며느리 때문에 절임 배추만 80kg이다. 굴깍두기에 파김치까지 종일 일감이 젊은 손 둘을 더 보태니 금새 끝났다. 김장 뒷손 거들며 틈틈이 누룽지를 먹었는데 손자가 따라 먹는다. 초등학교 2학년인데 식성이 어미를 닮아서 산나물이며 채소며 청국장이며 시래기까지 토속 음식은 뭐라도 좋아하는 녀석이다. 바삭바삭 씹으며 잘도 먹는다. 사탕이나 초콜릿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는 손자가 누룽지를 맛있어하는데 할애비 욕심만 차릴 수 없어서 돌아갈 때 몽땅 싸주었다. 연신 싱글벙글. 내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고소하고 배부르다. 이래저래 정으로 주고받고 사랑으로 나누니 따뜻한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