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응원합니다.

아내의 투병 생활을 떠올리며

by 운해 박호진


사람을 편하게 두질 않는다. 힘든 일 견디어 왔는데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와 노년의 인내와 용기를 시험하려든다. “박 선생님, 저 XX암이래요.” 갑작스레 내뱉는 말에 잠시 먹먹해졌다. 너무나 열심히 또 당당히 살아온, 그러기에 주변과 세상에 늘 감사하며 사는 그녀에게 이게 웬일이냐. 내게 닥친 일이 아니지만 불현 듯 내 아내가 겪었던 기억과 겹치며 암담해졌다.

나른한 오후, 경전철을 타고서 막 자리에 앉았는데 아는 이가 앞에 섰다. 코로나19가 한창일 즈음 같은 수업으로 만나서 알고 지내는 사이다. 남자처럼 훌쩍한 키, 생김새처럼 시원시원한 말투, 미소 짓는 얼굴로 늘 내게 먼저 인사해 오는 동년배의 여인이다. “저 XX암이래요.” 잠깐의 침묵 후에 “누가 그래요?”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좀 전에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조직 검사를 맡기고 오는 길이란다. 무슨 말을 하랴. 잠시 망설이다가 위로랍시고 “요즘은 치료가 잘되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하였다. 몇 정거장 남았는데 자리라도 양보할까, 아니야, 갑자기 아픈 사람 취급하긴 싫어서 그냥 앉아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는 게 어색하여 한마디 보탠다. “제 아내도 오래전에 앓았답니다.”


2008년 봄이었다. 아내가 가슴에 멍울이 잡힌단다. “병원 가봐.” 한창 회사가 바쁠 때라 별스러운 생각 없이 말했다. 다음날 받은 전화. “나, 암 이래.” 하늘이 노래졌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보호자 없이 혼자 그 말을 듣는 아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염려마! 내가 무슨 수를 쓰서라도 당신을 꼭 살려 낼 거야. 당시에는 암이라 하면 죽음을 떠올리던 때이다. 권위 있고 수술 실적이 많은 교수를 찾아서 부산대학교병원으로 진료를 옮겼다. 일반적인 호르몬 계통이나 유전적 요인의 발병이 아니고 악성 요인이라 수술하고 예후를 지켜보자고 한다. 서둘러 수술 날짜가 잡혔다.

수술 전날 밤, 레지던트가 그림을 그려가며 수술 절차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마취와 수술 과정의 위험성, 수술 후의 신체의 변화와 부작용, 만일의 경우 사망 위험까지 설명하고는 수술동의서에 서명하란다. 늦은 밤, 조용한 진찰실 분위기 탓일까, 더럭 무서워졌다. 펜을 잡은 손이 떨렸다.

이튿날, 수술실 앞에서 주치의 교수를 만나 간절히 부탁했다. 꼭 살려달라고. 수술은 길어졌다. 수술 중 채취한 임파선 조직에서도 암세포가 발견되어 모두 잘라 내었단다. 장장 여덟 시간. 가장 긴 하루였다.

수술 후, 한 달간의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머리카락이 빠졌다. 한 움큼씩. 아니 한 아름씩이다. 매일 매일 샤워실에서 검디검은 아내의 머리카락을 훔쳐내며 많이도 울었다.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눈썹까지 다 빠졌다. 어이없게도 반질반질한 민머리가 ‘참 잘 생겼다.’ 생각했으니 나도 참 못났다. 가발을 쓰고 틈나면 여행을 다녔다. 치톤 피치가 좋다며 이름난 편백숲을 찾아다니고 각지의 휴양림을 순례했다.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서로 무너질까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잘 먹어야 이긴다. 아내는 모래알 같은 밥알을 삼키고 고기를 씹었다.

치료 1년 즈음, 희소식이 날아왔다. 때마침 표적치료제(허셉틴)가 나왔다. 정말 다행스러웠다. 여섯 번의 추가 항암 치료를 아내는 용케 이겨 내었다. 그렇게 5년, 10년 넘기며 완치가 되었다. 미덥지 않은 민간요법은 일체 마다하고 충실히 병원 치료를 한 덕도 있으리다.


그녀가 암 진단을 받고서 아마도 내가 맨 처음 만난 사람이었을 것이다.

“저 XX암이래요.”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던지고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담담해 보이는 그녀보다 도리어 내가 당황했다. 뭔 말을 해야 하나.

그녀는 다음 정거장이다. 내가 먼저 내리며 당부했다. “용기내시고 마음만은 아프지 마세요.” 떠나는 전철을 한참 바라보며 괜한 걱정을 한다. 오랜 세월 홀로 지낸 그녀 곁에서 따뜻한 국이라도 끓여줄 사람이 있는지, 수술동의서 서명은 누가 하는지. 아니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이 있지 않은가.

‘당신은 또 한 번 더 당신을 시험하려 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겠지요. 그리고 당당히 이겨내어 감사하겠지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 앞으로도 이웃으로, 글 벗으로 오래도록 함께하기를 염원합니다.’

나도 몰래 콧등이 시큰거렸다. 아내의 기억이 보태진 탓이리다.

손이라도 따뜻하게 잡아줄걸. 그러지 못한 내가 부끄럽다.

“당신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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