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결혼 기념일

by 운해 박호진

해마다 다가오는 어떤 날을 기념한다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결혼기념일을 으뜸으로 여긴다. 물론 개인의 기념일 중에 생일도 있다.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로 부터도 축하와 선물을 받지만 가장 큰 인륜지대사인 결혼에 비길 수는 없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는 것으로 유교문화에서는 음(陰)과 양(陽)이 합하여 균형을 이루고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숭고한 일이며 가정을 이루어 자손을 번성시키는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우선순위의 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는 결혼기념일 마다 여러 방법으로 챙겨왔다. 젊은 때는 장미꽃다발을 안기기도하고 어떤 때는 아내가 갖고 싶은 선물도 하고 그렇지도 못할 때는 근사한 외식도 했다. 물론 아내는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지만. “그러는 당신은 내게 뭐 해 주는데?” “밥해주고 애들 낳아 줬잖아!“ 피차 괜한 트집이다.

그러다가 아들과 딸이 결혼하고 난 이후로는 결혼기념일 즈음이면 주로 여행을 다녔다. 젊은이들처럼 하는 이벤트가 새삼스러워서일 거다. 그간 아들딸 부부의 생일이며 결혼기념일을 꼭 꼭 챙겨주어서인지 걔들도 우리 기념일은 챙겨준다. 스포츠 용품점에서 옷이랑 신발을 사주기도 하고 더러는 봉투를 내민다. 이번 결혼기념일에도 딸은 삼청각의 식사가 포함된 흥겨운 공연을 예약해주었고 며느리는 두툼한 봉투를 내어 놓았다.

마흔두 번째 결혼기념일 맞아서 동해로 갔다. 숙소는 일찌감치 예약해두었는데 강릉이나 속초 등 이름난 곳을 제쳐두고 주문진으로 정했다. 여름철이면 엄청 비쌌던 호텔을 아주 저렴하게 예약할 수가 있었다. 평창을 지나 대관령 넘을 즈음 안개가 자욱하다. 바로 내일을 알 수 없는 나이라 짙은 안개 속으로 차를 몰아가는 기분이 묘하다. 점심은 강릉의 맛집에서 해결하고 주문진 해변을 찾았다. 거센 파도가 바위를 넘어 옹벽에 들이친다. 잠시 넋을 잃고 파도에 따라 몸을 일렁여 본다. 힘차게 몰아쳐서 부서지고 하얀 거품이 되는가 싶더니 이내 기를 모아 또 몰아친다. 아무도 없는 해변을 걸어보며 넌지시 손목을 잡아본다. 온기가 쩌릿하게 느껴진다.

어쩔 수없는 노인네다. 이번 여행에서는 돈 아끼지 않고 맛난 식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손님이 북적대는 해변 횟집에서 멈칫거렸다. 2인상에 11만원이란다. 뭐야, 그 돈이면 도회에서 멋진 레스트랑이나 정갈한 한정식집에서 저녁을 즐길 수 있는데. 생선회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아내가 소매를 끈다. 뒤통수에 호객꾼의 쌀쌀한 눈길이 닿는 느낌이다. 시장 쪽으로 걸으니 회센터라고 환한 간판이 눈길을 끈다. 들어서니 여러 가게가 저마다 간판을 단 노점들이다. 기본 횟값이 훨씬 저렴한데도 이것저것 해산물도 챙겨주고 회를 먹고 나니 얼큰한 매운탕도 나온다. 이만한 안주에는 소주 한 병이 딱 좋다.

모처럼의 바깥 잠자리가 정갈해서 좋다. 덤으로 14층에서 내려다보는 화려하지 않은 야경이 별처럼 잔잔히 다가와서 정겹다. 이런 날에는 트윈베드 보다는 더블베드가 제격이다. 하얀 시트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꿈속으로 잦아든다.

바닷가 아침 공기는 참 상쾌하다. 어제 그토록 사납던 파도는 아직 잠에서 덜 깨었는지 잔잔히 출렁일 뿐이다. 일찍부터 문을 연 어시장에서 반건조오징어랑 노가리 등을 샀다. 며느리랑 나눌 참이다.

아! 잊은 게 있다. 아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술기운에 나만 들떴었구나. 모든 게 미안하고 고맙소. 아이들 훌륭히 키워내고 못난 서방과 여태 살아주어서 고맙소. 젊어서는 땡 고집에 제 잘난 독불장군이었고 늘그막에 아픈 사람 두고 싸돌아다니며 죄만 짓다가 이제야 청소며 설거지며 거들며 당신 눈치 보는 내가 나도 밉소. 아프지 말고 제 발로 걸어 다니며 금혼식, 회혼식하는 날까지 미운 정 제쳐두고 고운 정만 쌓아 갑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