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목욕탕과의 이별을 가슴에 묻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빨간목욕탕과의 추억, 그곳에서의 사랑, 사람 사는 냄새 풀풀 나던 그곳을, 그 언니야들을 가슴 깊이 묻는다.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꺼내볼 수 있게 필이의 보물 창고 속에 소중히 간직한다. 그 무엇으로도 빨간목욕탕을 대신 할 수 없다. 나의 고향이고 나의 엄마품이었던 곳이기에!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런 줄 알았다.
파란수영장을 다닌지 이주 정도 지난다. 날마다 비슷한 시간에 가니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생긴다. '초급, 어린이풀'이라는 팻말이 있는 레인에서 날마다 만나는 이가 있다. 항상 조금 젊은 분이 조금 나이 든 분의 손을 잡고 온다. 나이 든 분 몸이 불편하다는 걸 바로 알 수 있다. 조금 있으면 나이든 분은 길쭉한 막대모양 스티로폼을 몸에 끼우고 아기가 물에서 놀듯 수영하며 논다. 조금 젊은 분은 자기만의 루틴으로 운동도 하고 수영도 한다.
처음에는 젊은 분과 이야기를 나눈다. 수영에 대한 이야기를. 이 분은 혼자 유튜브나 남들이 하는 걸 보면서 수영을 배웠다고 한다. 같은 초급 레인에 있지만 이미 초급이 아닌 듯하다. 아님, 필이가 초초초초초급이거나. 하하하하. 아무튼 젊은분과 좀 친해진 듯 날마다 인사하고 이야기도 하며 서로 수영을 한다. 그러다 나이드신 분과도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내가 눈이 안 보여가 수영을 할 수가 있나. 뭐가 보여야 남들 하는 거 보면서 따라도 할긴데."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 그냥 듣고만 있는다.
"사람 형체만 희미하게 보이는데, 수영도 몬하고, 남한테 피해주는 거 아인가 몰겄다. 눈도 안 보이는데 이래 한다고."
"아입니더. 피해주는 거 하나도 없어예. 여기는 못하는 사람 하는 곳입니더. 피해주는 거 하나도 없어예."
이번만큼은 강하게 말한다. 강하게 말하니 평소 안 쓰는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정말이니깐.
"눈이 원래는 잘 보였는데, 당뇨도 있었지만도, 3년 전에 큰 충격을 받아가 그때 갑자기 안 보이더니 계속 이러네."
듣고만 있는다. 아주 가까이에서 잘 듣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도록 살며시 손을 잡고서.
"막내딸을 갑자기 안 보냈나. 그라고는 눈이 이래 돼삐네."
손에 힘이 들어간다. 꼭 잡는다. 그것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같이 오시는 분은 그럼 큰 따님인가요?"
"어어어, 요양보호산데 참 잘한다. 안 보이는 내를 옷도 다 입혀주고 이래 델꼬 안오나. 여서는 안 다친다고. 이래 놀다 가자고 안 델꼬 오나."
이날 이후, 우린 좀 더 가까워진다.
어제는 비슷한 시간에 수영을 마쳐 샤워를 같이 하게 된다. 나란히 옆에 서서 샤워를 하는데 나이든 언니는 자신이 자꾸 다른 사람들 방해하는 것 같다며 걱정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웃을 거라며 근심이다.
"언니, 그런 거 하나도 없어요. 아무도 우리 수영 몬한다고 뭐라도 안하고 신경도 안 써요. 이제 언니랑 내랑은 짝꿍해가지고 같이 다녀요. 알았지요? 짝꿍이다. 짝꿍!"
언니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
요양보호사 언니도 웃는다.
샤워실에도 물방울이 매달린다. 행복한 물방울이 말이다. 빨간목욕탕에서 행복이 물방울 되어 방울방울 매달리고 떠다니고 그러다 웃음이 되어 터져버리듯 수영장 샤워실에도 행복의 물방울이 매달리기 시작한다. 웃음으로 터져버리는 행복의 물방울이!
"짝꿍 언니야, 먼저 가요. 내일 만나입시더~!"
큰소리로 인사한다.
"그래, 어여 가라. 낼 보자."
언니 목소리에 기쁨이 가득이다. 행복이 가득이다.
돌아오는 필이 발걸음에도 기쁨이 가득이다. 행복이 가득이다. 가슴이 몽글몽글하다. 가슴 깊은 곳 보물 창고에 숨겨둔 빨간목욕탕이 빙그레 웃는다. 이 녀석은 아무리 웃어도 괴기스러움을 어쩌지 못하면서. 아니, 허물을 벗은 빨간목욕탕은 이제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는다. 영원히 나와 함께 할 빨간목욕탕이. 새로운 만남에 축복을 보낸다. 이번에는 장난끼 가득한 웃음으로!
오필리아처럼~
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