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보우 수모가 사랑으로 빛난다

by 필이

오늘은 어제보다 10분은 일찍 도착한다. 10분의 여유가 더 주어진 것이다. 신나는 마음으로 샤워부스로 간다.

어?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뭐지? 뭔가 하나 빠진 것만 같은 허전함.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생각나지 않는 찝찝한 허전함. 어쩌겠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 속에 더 빠지기만 하는 것을.


허전함의 원인을 밝히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일단 머리부터 감는다. '씻다 보면 떠오르겠지' 막연하게 생각한다. 평소보다 더 정성을 들여 머리를 감는다. 거품이 뽁뽁이처럼 올라와 하얀 뽀글머리 가발이 되도록 문지른다. 그래도 생각나지 않는다.


몸을 씻는다. 때수건에 비누칠을 해서 하얀 거품이 뭉게뭉게 구름을 이룰 때 온몸을 문지른다. 날마다 샤워를 해도 정성껏 거품칠을 해야 한다. 다 같이 사용하는 수영장 물을 깨끗이 하기 위한 의식이다. 그래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 정도의 정성으로 시간을 들였으면 허전함의 원인이 생각날만도 한데 당최 떠오를 기미가 없다. 포기한다. 수영이나 하자. 나중에라도 생각나겠지.


수영복을 꺼낸다. 수영복에도 정성껏 거품칠을 한다. 부드럽게 온몸을 감싸고 입기 위한 소중한 행위다. 수영복을 입는다. 등이 엑스자로 되어 있어 발을 잘 끼워야 한다. 한발 한발 잘 끼운다. 뽀드득뽀드득 첫눈을 밟듯 수영복이 하얀 거품의 힘을 입어 부드럽게 몸을 가리기 시작한다. 수모를 쓴다. 하얀색 수~~~ 앗! 없다. 수모가 없다.


새로 얻은 수영복이 하얀색에 하늘색 무늬로 되어 있다. 이것과 짝을 이루기 위해 평소 쓰던 검은색 수모가 아닌 하얀색 수모를 챙긴다. 하얀색 수모가 덜 말라 빨래건조대에 걸어둔 것을 이제야 생각한다.


드디어! 허전함의 정체를 찾았다. 드디어 그 범인을 찾은 것이다. 유레카! 노래라도 불러야 하건만 슬픈 노래가 나온다. 파란수영장은 수모를 쓰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다. 당연하다. 머리카락이 빠지면 안되니 수모를 착용하는 게 당연하다. 공공시설인 실내 수영장이니 아주아주 당연하다.


슬픈 노래를 부르며 이젠 수영복을 벗는다. 수영을 마치고 나갈 때와 같이 거꾸로 샤워장을 이용한다.


“와 수영복을 벗노?”


대각선 방향에 있는 샤워부스에서 샤워하는 언니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시간대에 오다보니 서로 얼굴을 안다. 인사도 하고 몇 마디씩은 이야기도 나눈다.


“수모를 안 가지고 왔어요. 이 옷이랑 세트로 입으려고 하얀색 수모 챙긴다는 게. 안 말라가지고 건조대에 걸어놓고 그냥 왔네요.”


울상이다. 기껏 10분 일찍 도착해서 여유롭게 수영하려던 생각이 말 그대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 저절로 찡그려진다. 울듯 말듯. 속상한 마음 잔뜩 묻힌 그런 목소리.


“있어 봐라. 수영하고 나오는 사람한테 빌리면 되지. 가기는 뭐하러 가노? 기껏 와놓고. 조금이라도 하고 가야지.”


“그래도 수모를 누가 빌려주겠어요. 자기가 쓰던 것인데. 빌려줬다가 늘어나고 하면 어쩌려고요.”


“가만 있어 봐라. 그래도 빌려준다.”


언니는 안타까운지 수영복을 벗지 말고 기다리라고 한다. 걱정이 잔뜩 묻은 목소리다.


“샤워나 하고 가죠. 뭐. 괜찮아요.”


일부러 더 밝은 척 말한다. 그리고 수영복을 마저 벗으려던 그때.


“여봐라. 수모 어데 빌릴 때 있나? 여가 수모를 안 가지고 왔다고 갈라 안하나. 어데 수모 빌릴 때 없나?”


당장이라도 씻고 나가려는 필이를 붙잡고 싶은 것인지 언니는 이제 막 샤워하러 들어오는 언니를 붙잡고 이야기한다. 분명, 수영을 마치고 나오는 언니에게 빌리자 그랬는데. 수영을 하러 오는 언니에게 말하면 어찌하는가. 언니가 다급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뭐가 다급하지?


필이가 수영을 못하고 가는 게 그렇게나 안타까운 걸까? 친한 사이도 아니고, 깊은 사이도 아니고, 오며 가며 한 번씩 만나는 사이. 파란수영장에서 같이 수영하는 사이일 뿐인 필이를 어찌하여 이리 챙기려는 것일까. 물음만 있고 답은 없다. 답이 필요치 않는 물음이다. 언니의 정성에 미안해서 필이는 다시 수영복을 끼어 입는다. 느리게 느리게.


“나 수모 두 갠데? 어떻게 알았어?”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 수술한 똥글이 언니다. 언젠가 필이도 다리가 안 좋아서 수영장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서는 무릎 보호대를 준 바로 그 언니. 배가 동그라미인 똥글이 언니다.


투박하게 말하는데 이상하게 더 정이 간다. 항상 10시반 수업에 사용할 킥판을 챙겨놓는 언니, 킥판이나 막대 스티로폼이나 여기저기 어질어져 있는 것을 반듯하게 정리해놓는 배처럼 마음도 동그란 똥글이 언니다.

언니가 들어오다 말고 다시 나간다. 탈의실로 가더니 금방 돌아온다. 손에는 수모가 들려있다.


“이거 써라.”


“고마워요. 언니.”


인사를 하고 수모를 건네받는다.


“언니, 이거 산지 얼마 안된 새거잖아요!”


놀라고 만다. 새로 산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레인보우 수모인 것이다. 언니가 아껴 쓴다는 바로 그 모자! 알록달록 무지개 빛깔로 수영장 안을 환하게 밝혀주던 바로 그 모자! 이걸 처음 쓰고 온 날 수영장 언니들이 너도나도 “레인보우 수모를 사야겠다”고 하던 바로 그 모자! 이걸 빌려준다고?


“새거니깐 빌려주지. 못 쓰는 거면 빌려주나?”


또다시 파란수영장이 빨간목욕탕이 되는 순간이다. 파란수영장 어딘가에 비밀의 문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문을 통해 이렇게 갑자기 파란수영장이 빨간목욕탕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귀한 거니까 주지. 안 귀하면 주는가?”


언젠가 약초물을 등이며 다리며 팔이며 듬뿍 발라주던 바로 그 언니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린다.


빨간목욕탕 수증기에 또다시 눈이 붉어지고 만다.


남 주는 것일수록 좋은 것, 귀한 것을 줘야 한다는 엄마의 가르침과도 같다. 피에 새겨진 이 가르침에 따라 필이도 남에게 주는 것일수록 좋은 것을 챙긴다. 못나고 흠 있는 것은 내가 먹고 남 주는 것은 깨끗하고 흠 없는 것을 준다. 그래야 한다.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차라리 안 주는 것이 낫다.


언젠가 세부 여행 갔을 때가 생각난다. 대안 학교에 다닐 때다. 다음 해에 있을 필리핀 해외이동학습을 위해 여덟 살 우리 아이와 답사를 겸한 해외여행을 간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기에 해외에 다녀오는 경험을 쌓기 위한 여행이다.


3박 5일 일정인 패키지여행이다. 패키지 중에 하나가 물 위에서 진수성찬 밥을 먹는 것이 있다. 게며 생선이며 통째로 잘 차려진 밥상이다. 밥을 먹으려던 그때 누군가가 말한다.


“우리 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요? 먹을만큼만 남겨두고 남는다 싶은 음식은 미리 챙겨두면 어떨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는 필이는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우리가 먹고 남은 음식을 여기 계신 일하는 분들이 가지고 가서 먹어요. 이 음식이, 이분들 가족 저녁 식사가 되거든요. 남아서 가져가는 것보다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하고 남는데 미리 손 안대고 챙기면 더 낫지 않을까 하고요.”


패키지로 온 모두가 동의한다. 상에 차려진 음식은 우리 모두가 먹고도 반 이상은 남을만큼 많다.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레인보우 수모 하나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언니는 오히려 오래도록 사용하던 검은색 수모를 착용하고 나에게 빌려주는 것은 오색빛이 찬란한 레인보우 수모다. 필이는 레인보우 수모를 차마 쓰지도 못하고 샤워기 물만 맞으며 서 있다.


“그건 앞뒤 없다. 아무 데나 써도 된다.”


“네, 언니. 고마워요. 잘 쓸게요.”


어디로 써야 하는지 몰라 그냥 있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필이도 씩씩하게 대답하고 수모를 쓴다.


“언니, 언니. 그래가지고 저 언니가 수모를 빌려줘가 내가 이렇게 수영하러 올 수 있었다아이가. 안그라면 샤워만 하고 갈라했는데.”


짝꿍 언니는 앞으로 자전거 타기를 하고 필이는 뒤로 총총 뛰며 이야기한다.


“그냥 가면 안되지. 짝꿍 목소리라도 이래 들어야 하루가 신나는데. 그냥 갔으면 목소리도 못 듣는다아이가.”

“그니깐요. 이렇게 예쁜 수모를 빌려줘가지고 짝꿍 언니 만났잖아요. 진짜 고맙다요.”


“그렇네. 고마운 사람이네. 저 사람 아니었으면 짝꿍 못만날뿐했네. 그라면 안되는데.”


짝꿍 언니도 필이도 어느새 파란수영장 공식 커플이 된다. 파란수영장에 오면 저절로 찾게 되는 커플. 커플인 짝꿍 언니는 수모를 빌려준 이에게 고맙다고 인사다. 필이랑 한마음이 된 탓이다.


파란수영장이 아침을 시작한다. 휘파람을 불며 신난다고 노래부른다. 파란수영장이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아침이다. 행복은 무지개를 타고 우리에게 온다. 짝꿍 언니도 필이도. 수모를 빌려준 언니도 수모를 챙겨주려고 가던 필이를 붙잡는 언니도. 모두의 머리 위에 행복의 무지개가 반짝인다. 참 좋은 아침이다.




오필리아처럼~

필이~^^*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