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당장 버리라. 아 인물 다 베린다.”
발차기 쌤의 말이다. 새로 산 반신 수영복과 그동안 입던 분리형 수영복을 하루하루 번갈아 가면서 입는다. 그러다 기존 수영복을 입은 날, 보다 못한 발차기 쌤이 수영복 버릴 것을 명한다. 늘어지긴 했지만 입고 수영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인물이 달라진단다. 그렇게나 낡았나? 하긴 오래 입긴 입었다. 몸에 딱 붙던 것이 나풀나풀 거리는 것 보면 많이 늘어나긴 한 모양이다. 이젠 오래도록 함께 하던 이 수영복과 이별을 해야 할 때인가 보다. 그래도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집에 챙겨온다.
이젠 새로운 수영복이다. 먼저 살 때 두 개를 구입한다. 이 수영복은 디자인이 다르다. 뒤가 엑스자 끈만 있고 등판이 없다. 이건 뭐 윗옷을 안 입은 것만 같다. 그런데 다리는 무릎 바로 위까지 내려온다.
이런 수영복은 뭐라고 할까? 같은 반신수영복인데 디자인과 길이만 다른 걸까? 이름이 무엇이면 어떤가. 중요한 건 이 수영복은 입기가 더 불편하다는 것이다. 등이 없는 대신 다리가 길고 위쪽으로는 끈만 있으니. 이건 입는 데도 불편하고 입고 나서는 더 불편하다. 또다시 옷을 다 벗은 것만 같다. 천이 모자랐던 걸까? 등에 어찌 이렇게 천이 없는가. 아하. 결국 옆에서 샤워하는 언니에게 등에 있는 엑스자 끈을 좀 올려서 바로 해달라고 부탁하고서야 새로운 수영복 입기를 성공한다.
부끄러움은 필이 몫이다. 혼자 부끄러운 나머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수영장 안으로 들어간다.
“수영복 또 샀나?”
“아니예요. 그때 두 개를 샀는데 그동안 안 입다가 오늘 입은 거예요. 근데 등이 휑한 게 이게 또 너무 이상해서…….”
필이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 상황이 무척 난감하다.
“뒤에 함 보자.”
언니들이 필이 등을 보여 달란다. 보여준다.
“이렇게 된 게 불편하다. 입고 벗기도 힘들고. 내맨치로 이렇게 유(U)자로 된 걸 사야 된다. 이게 입고 벗기 편하다.”
“몰랐어요. 수영복도 참 다양하네요.”
“우짤기고. 새로 산 건데. 많이 입고 늘어나면 버리고 새로 사라.”
“네. 그래야겠지요?”
또다시 필이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이 된다. 참 표정 한 번 웃기다.
“또 함 봐라. 니 아무도 안 본다고 했제. 허리 피고 당당하게 수영해라.”
요양보호사 언니다. 자꾸 웅크리는 필이에게 따끔하게 하는 말이다.
“내는 비야 말이제. 옷이 우예 생겼는가 모른다.”
짝꿍 언니다. 헐벗은 듯 부끄러워 물속에서 나올 생각도 안하는 필이에게 하는 말이다. 언니 말끝에는 걱정이 묻어있다. 기껏 수영하러 와놓고 수영도 안하고 물속에만 숨어 있는 필이가 안되었나 보다.
“수영복 예쁘네? 먼저 것도 예쁘더만 오늘도 예쁘네?”
시누이, 미순이 언니다. 오늘부터 동네 목사님과 늦게 온다. 요양보호사 언니랑 짝꿍 언니는 그전에 다니던 시간에 오고 미순이 언니는 목사님과 좀 천천히 온다. 미순이 언니는 아침에 일찍 일을 하고 온다. 날이 더워서 조금만 늦어도 일을 할 수가 없단다. 언니는 농사를 짓는다. 무슨 농사인지 모른다. 물어봐야겠다. 시원시원하게 큰 소리로 필이 수영복 예쁘다며 광고를 한다. 이것 참 난감하다. 수영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필이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예쁜데 와 그라노? 딴 사람들도 등 다 파졌는데? 저 함 봐라. 저도 등이 없네.”
아하하하하.
미순이 언니는 성격이 화통한 건지 목소리가 화통한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언니의 시원시원한 목소리에 수영장 언니들이 다시 필이를 쳐다본다. 그리고 한마디씩 한다. 수영복 이쁘다며. 아하하하하. 또다시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이 된다. 참 난감하다.
수영을 한 건지 안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은 잘도 간다. 어느새 나가야 할 시간이다. 킥판으로 배를 가리고 킥판 두는 곳까지는 무사히 온다. 다음이 문제다. 샤워장 입구까지 무사히 가야 한다. 아무도 필이를 보지 않기를!
“저 함 봐라. 허리 안 피나?”
앗! 아무도 안 볼 때 샤워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요양보호사 언니의 큰소리에 필이는 얼른 접은 허리를 바로 펴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인다. 그래도 언니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는 한다. 얼굴은 여전히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하고.
휴우. 무사히 샤워장에 도착한다. 뒤쪽 구석 자리로 가서 겨우겨우 수영복을 벗는다. 막 수영복을 벗고 머리를 감으려는데 뭔가 툭 앞으로 온다.
“아나? 얼굴에 발라라.”
손바닥 반 만한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다. 안에 노란 액체 덩어리가 있다.
“이게 뭐예요?”
“레몬이다. 레몬. 얼굴에 발라라.”
하아~!
이것 참. 파란수영장이 빨간목욕탕이 되는 순간이다. 빨간목욕탕에서 언니야들이 "얼굴이나 발라라"며 주던 천연 곡물 마사지크림이 생각난다. 아니다. 마사지크림을 건네던 언니가 생각난다. "얼굴이나 발라라." 하고서는 등까지 발라주던 언니.
“니는 목욕탕 어디 갈끄고? 내는 동산에 목욕탕 간다. 거도 군에서 하는 거라 싸다. 새로 지어가꼬 깨끗하고. 거 온나. 알았제?”
언니는 지리산 가는 길에 있는 마을 복지회관 목욕탕으로 오라고 몇 번을 당부한다. 그곳은 차로 가도 꽤 가는 거리다. 필이는 언니가 말한 목욕탕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파란수영장에 온다. 언니가 보고 싶다.
파란수영장에 갑자기 복희 언니가 나타난다. 얼굴이나 발라라며 레몬즙을 준다.
플라스틱 통 구석에 붙은 레몬까지 싹싹 긁어다 얼굴에 바른다. 이번에도 얼굴에 발라라고 했지만 양이 넉넉해 팔이며 배며 다리까지 바른다. 빨간목욕탕도 파란수영장도 언니들의 사랑에 눈물이 난다. 어디서 이렇게나 사랑받았던가.
등을 쫙 펴란다.
당당하게 걸으란다.
이대로의 필이가 예쁘단다.
배가 나온 대로,
다리를 저는 대로.
이대로의 필이가 예쁘단다.
얼굴이나 발라란다.
젊었을 때 가꿔야 한단다.
예쁜 얼굴 잘 가꾸란다.
빨간목욕탕 언니야도
파란수영장 언니야도
필이더러 예쁘단다.
지금 모습 이대로 예쁘단다.
예쁘다는데 눈물은 왜 나는 건가.
모른다.
아무래도 눈물샘이 고장난 게 틀림없다.
오필리아처럼~
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