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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Dec 17. 2020

책 리뷰_<2020 제11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세상에 순응하지 않기 위해 소설을 쓰는 작가들

사진출처: yes24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로 치달으면서, 나는 외출의 어떤 명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기엔 허리와 머리가 동시에 아파왔다. 

나는 리프레시를 위해, 그동안 읽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소설책들을 샀다. 

김금희 작가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정세랑 작가의 '목소리를 드릴게요'. 그리고 5500원의 가격에 이끌려 함께 장바구니에 담은 이 작품집(이 책의 적정가는 13,000원이고, 젊은 작가들을 널리 알리자는 상의 취지에 따라 출간 후 1년동안은 보급가로 판매한다고 한다). 


 내가 책을 구매하는 데에는 단 하나의 원칙이 있다. 소설이 아닐 것. 

그동안 비소설 책들이 몸에 좋은 홍삼 같은 것이라면, 소설은 순간적인 달콤함을 주는 사탕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락 영화와 다를 바 없다고. 어릴 때부터 엄마는 책을 사주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셨지만 그게 소설일 때는 언제나 핀잔을 주셨다. '생산적'인 글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 거리두기 기간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소설책을 하나둘씩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의 무료함을 그 어떤 것으로도 달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은 이틀에 한 권씩 소설을 독파하는 '소설 중독' 단계에 이르렀다. 스스로 한정된 독서시간 내에 문학과 비문학의 균형을 잘 맞추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내일 읽을 새로운 소설이 없으면 불안하다. 


 이 작품집을 고른 이유는 매력적인 가격 말고도 또 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쓴 장류진 작가, '내게 무해한 사람'을 쓴 최은영 작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쓴 김초엽 작가의 글을 책 한 권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세 사람의 글을 일단 읽어보고 내 스타일의 작가의 책을 구매해보기로 했다(결국 나는 세 권 모두 구매 목록에 넣었다).



 

책을 덮고, 나는 내가 소설에 대해 단단히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같은 현상에 대해 다루더라도,  논픽션은 사실과 의견을 제공하는 반면, 소설은 경험과 사람(입체적으로 표현된 주인공)을 선사한다. 

그래서 논픽션은 까먹지 않기 위해 메모하면서 읽지만, 소설은 이 다음 다시 읽을 기회를 기약하며 읽게 된다. 


다시  보고 싶은 사람. 다시 겪고 싶은 경험. 소설은 그런 것들을 만났을 때의 기쁨을 느끼게 해 준다. 좁은 나의 방 안에서 독서에 시간과 노력을 조금 투자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걸 나만 알 수는 없어서, 브런치에 그 기분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여 기록해두고자 한다. 


 먼저 이 책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내가 앞으로 쓰게 될 리뷰보다, 각 소설 말미에 오는 훌륭하신 문학평론가들의 작품 해설이 훨씬 유익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안다. 그러니 꼭 이 책을 읽는다고 약속하고 내 리뷰는 가볍게 읽어주기를 바란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모든 부분은 뺐다.)


기본적으로, 김초엽 작가의 작품을 제외한 이 작품집의 모든 소설은 '젠더'에 관해 이야기한다. 


 첫 번째 작품이자 대상작인 강화길 작가의 <음복>은, 가부장제 질서 속 여성들이 위력에 순응하고 생존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남편의 할머니, 남편의 고모, '나'의 시어머니, '나'의 어머니, 그리고 나. 모두 가정의 유지를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포지션이 있다(비록 그게 '명절 빌런'으로 묘사되는 악역이더라도). 그리고 그 위치에서 행해지는 행위와 그들 사이의 관계를 가정 내의 남성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그럼 이 세상의 모든 남성들은 눈치가 없다는 말일까. 아니다. 남성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눈치를 챙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부장제 가정 질서의 재생산에서 남성의 권력은 '폭력'이 아닌 '무지'로 드러난다. 상대적으로 여성은 교묘하고 전략적으로, 가정의 존속을 위해 각자의 최선을 다한다. 세 번의 세대가 지나도록 여전히 여성은 가정 내 암묵적인 위계질서 속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주체라는 점을, 작가는 이 소설로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두 번째 작품인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는, 영문학을 가르치는 시간 강사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그 강사의 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실 이 작품이 내게는 이해하기 가장 힘들었다. 소설의 흐름을 잘 따라갔지만, 말미에 다다르니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의 대화와 생각에는 가장 공감이 갔다. 특히, 주인공인 학생이 자기 의견이 애매한 글을 수업시간에 발제했을 때, 그런 글은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자책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 리뷰글의 부제를 떠올렸다. 글쓰기, 특히 소설은 세상에 대한 순응을 거부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두 등장인물의 성장배경이 용산이다 보니, 자연스레 용산참사에 대한 우회적 언급이 등장한다. 여러 면에서 조금 더 파보고 싶은 소설이다. 다음에 읽을 때에는 이 제목에서 '빛'은 무엇이고 그 빛을 따라가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다. 나의 무지함과는 별개로 최은영 작가가 사회문제를 소설로 다루는 방식이 참 좋다. 



 세 번째 작품인 이현석  작가의 <다른 세계에서도>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내용에서는, 이 위헌 결정을 받아내기 위해 칼럼을 연재하는 산부인과 의사들 모임이 등장한다. 낙태죄 위헌을 주장하는 그들의 관점은 제각기 다르다. 차기의 있을 임신에 대해 영향을 끼치지 않는 약물적 임신 중지법과 절박한 상황에서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에 대한 연민. 하지만 주인공은 위 두 논거 모두에 불편을 느낀다. 주인공은 오로지 "여성의 주체적 결정에 대한 존중"이 낙태죄 폐지의 유일의 이유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여성은 '모성애'를 전제로 낙태를 허락받는 것일 뿐이라고. 아직 국회에서는 낙태죄 폐지 법안에 대한 개선 입법의 여지가 남아있다. 하지만 졸속 입법으로 인해, 낙태죄 담론이 이대로 '묻혀'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멈출 수가 없다. 소설에는 다른 형태의 글(기사, 칼럼 등등)에는 없는, 매우 강력한 환기의 장치가 있는 것 같다. 


 네 번째 김초엽 작가의 <인지 공간>은 예외적으로 '장애'가 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되는 모습을 소설로 표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SF 소설 속에서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묘사되는 방식이 정말 참신했다. 소설의 배경은 가상이고, 장애를 가진 구성원과 살아가는 세상은 현실이다. 작가는 현대사회가 '정상이라고 인식되는 것의 총체'를 강요하는 방식, 즉 소외된 구성원을 더욱 소외시키는 방식을 상상 속 배경을 수단으로 하여 표현했다. SF 소설 작가가 장애학을 공부해서 쓴 결과물로 탄생한, 더없이 참신한 소설이다. 보편성은 개별성(또는 소수자)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했을 때 의미가 있다는 교훈을 작가에게서 잘 전달받은 것 같다. 


 다섯 번째 장류진 작가의 <연수>는 가장 몰입해서 본 작품이다. 최근에 운전면허를 따기도 해서, 마치 주인공 대신 내가 운전 연수를 받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읽게 되었다. 작가는 막연한 인생에 대한 두려움을 초보가 운전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에 비유한다. 그리고 앞선 세대 여성이 사회 초년생인 여성에게 인생을 가르쳐 주는 것을, 운전을 가르쳐주는 운전 연수 선생님과 연수자의 관계로 비유한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여성 간의 연대' 메타포지만,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연대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계층 피라미드에서 나름 상위에 위치하는 사회 초년생으로 묘사되는 주인공은, 자녀의 성공에 목매는 운전 연수 선생님과는 달리 비혼 주의를 결심했으며, 세대와 계층이 다른 운전 연수 선생님에 대해 연민과 이질감을 느낀다. 그러니 운전 연수 선생님은 앞선 세대의 여성으로서 '차선 변경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까지는 알려줄 수 있지만, 운전 과정에서의 모든 판단과 극복은 오롯이 주인공의 몫이다. 


 마지막 작품인 장희원 작가의 <우리의 환대>는, 작품 해설이 가장 좋았던 작품이다 (물론 작품 자체도 너무나 좋았다.) 읽을 때는 막연히 작품 속에서 호주가 표현된 모습이 좋았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호주에 열흘 정도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보았던 모든 것들을 이 소설로 다시 보게 된 느낌이다.(당시 내가 느낀 호주의 날씨는 햇살부터 수증기 한 방울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다시 작품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여기서 우리는 We가 아니라, Cage, 즉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축사'이다. 축사가 어떻게 환대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을 가지고 읽는다면, 소설에 접근하는 최상의 시작이다. 소설은 '과연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는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소설에는 사회가 정상적인 가족 형태라고 인식하는 중년의 중산층 부부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부부에게는 낯설고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또 다른 가족이 등장한다. 작품에서 이 낯섦과 혐오의 감정은 '눈부심'이라는 소설 속 장치로 형상화된다. '정상'가족은, '비정상'가족의 눈부심에 차마 눈을 뜰 수 없다.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어느 쪽이 우리(we)이고 어느 쪽이 우리(cage)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 작가가 제목을 고를 때 삽입한 트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로 세상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 


다른 종류의 책들은 내가 가진 의문에 답을 제시해주기에 감사하고, 소설은 나에게 새로운 질문거리를 던져주기에 참 감사하다. 


우리나라 문학계가 발굴해주신 '젊은 작가'들 덕분에, 나는 내가 앞으로 읽을 소설들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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