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주는 삶으로
오늘 미루고 미루던 대청소를 했다. 밀린 숙제를 오늘 끝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아이가 태어난 후, 물건이 점점 많아졌고 거실은 주로 아이가 노는 공간이라 작은방에 온갖 물건을 가져다두었다. 작은방은 서재라는 원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그냥 창고가 되었다. 아이가 크는 성장속도가 빨라 물건의 수명은 대체로 짧다. 한동안 잘 쓰다가 아이의 관심이 떨어지거나 쓸모없게 되면 다른 물건으로 대체한다. 그 물건이 아니어도 될 만큼 많은 물건이 아이를 위해 생산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버리자니 언젠가 쓸 것 같은 생각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게 된다. ‘막상 있으면 언젠가 쓰게 된다’는 육아선배인 친구의 말에 공감하는 순간이다.
물건을 정리할 때 가슴에 대보고 설레지 않으면 버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를 설레게 하는지 아닌지 나에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면 어떤 물건을 버려야할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에게 가슴에 물건을 대고 “이 물건이 설레니?”라고 물어본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을 테다. 작아진 옷은 바로 정리대상이지만 장난감은 없으면 막상 내가 아쉬운 것들이 많아 선뜻 정리하기 쉽지 않다. 결국 장난감 상자에 최근 아이가 잘 가지고 노는 장난감과 잘 안 가지고 노는 장난감으로 분류해 넣어둔다.
그러고 보니 집에 대부분이 아이를 위한 자리로 바뀌었다. 당장 나와 남편의 편리함보다는 아이의 편안함을 우선으로 고려하게 된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조금씩 집안구조와 가구를 바꿨다. 아이를 돌보는데 최적의 동선을 고려하여 가구를 다시 배치하거나 버리고 새로 산 것도 있다.
우리집을 떠난 가구 중 가장 아쉬운 것은 소파이다. 리클라이너 기능과 미니수납, 컵홀더, 무선충전기가 있는 홈바의 기능도 있어 가장 좋아한 가구였다. 남편과 앉아서 이야기도 나누고 맥주고 마시고 영화도 보고 낮잠도 잤던 그야말로 애착가구였는데 아이가 태어나니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소파가 눈엣가시가 되었다. 막상 버리자니 아쉽지만 아이가 놀 자리가 없어 결국 시댁으로 보냈다. 소파가 있던 자리에는 매트를 깔고 베이비룸을 설치해서 안전하게 아이가 놀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매트 위를 기어 다니며 노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소파 생각이 전혀 없다가도 무릎과 허리, 발목이 시큰거릴 때면 너무 그립다.
소파의 자리는 아이의 매트와 장난감이, 작은방의 책상은 아이의 물건이, 안방의 옷장 하나는 아이의 옷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자리를 하나둘씩 내어주며 아이의 자리를 만든다.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사람은 하나 늘었으니 우리의 자리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어릴 적 책상에 줄을 긋고 짝꿍에게 절대 넘어오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던 기억. 넘어오는 물건은 가져가고 넘어오는 팔은 한 대 때리겠다며 단단히 각오를 다지던 기억. 하지만 같이 쓰는 책상에 줄은 어린 우리에게 너무도 침범하기 쉬운 것이었다. 그렇게 뺏기거나 빼앗은 연필과 지우개를 보며 흐뭇함과 동시에 서러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넘어온 팔을 내어주며 한 대 맞을 때면 서러움에 북받쳐 책상 끝자리로 가 씩씩거리며 짝꿍이 선을 넘어오기를 벼르기도 했다. 책상 위 나의 자리만큼은 절대 양보하기 싫었다.
자라면서 자리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단순히 자리 그 자체에 대한 열망에서 벗어나 더 좋은 자리에 대한 열망이었다. 좀 더 편한 자리, 넓은 자리, 안정적인 자리. 자리를 차지하고도 열망하는 삶은 계속 반복되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나의 자리를 점점 잃어간다. 사회에서의 자리, 집에서의 자리, 심지어 내 마음의 자리까지. 무언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해온 삶이 아이를 통해 내어주는 삶으로 차츰 변하고 있다. 이제는 자리를 내어주고 비켜주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기왕이면 황급히 자리를 뜨기보다 곰실곰실, 봄볕 같이 따스한 온기를 남겨두고. 단, 내 마음의 빈자리는 남겨두지 않은 채로.
자리를 잃은 상실감보다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지금 식탁에서 글을 쓰고 있다. 자리를 내어주다 밀리고 밀려 식탁까지 오게 된 것이다. 고작 식탁이 지금 나의 자리이지만 충분히 행복하다. 노트북을 펼치고 글을 쓰고 책도 읽고 색칠도 하고 좋아하는 영화도 보며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편 것처럼 햇볕 아래서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하늘도 이따금 쳐다보면서 살랑이는 바람을 느끼면서 어렴풋이 들리는 새소리에 귀도 기울여보면서 조금씩 내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나가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