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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랑 그녀

by 서소시

처음 싱가포르에 이사 올 때, 한 달 먼저 온 남편이 혼자 급하게 집을 구했다. (갑작스런 발령으로 매번 이사마다 남편이 혼자 먼저 가서 집을 구하고 난 아이들과 짐 싸서 따라오는 수순이었다.) 사실 월세 개념이 익숙치 않은 우리에게 매달 얼마씩.. 그것도 큰돈을 내야 하는 싱가포르의 렌트비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아이들 학교도 정해지지 않았고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는 싱가포르 내에서도 좋은 학교가 많이 모여 있는 지역이라 렌트비가 엄청 비쌌다.


그나마 저렴한 곳은 지하철 역에서 멀거나 각종 편의 시설이 모여있는 쇼핑몰에서 떨어진 지역이었다.

처음 남편이 사진을 보내주며 이곳은 월세 얼마에 시설이 이래 하고 설명해줘도.. 그저 보이는 월세에 놀라 이런 집이 이 가격이야 하고 놀라기만 했다.


가격이 그나마 저렴한 지역에 집을 계약하고

"지하철 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야. 주변엔 다 콘도고 지역이 조용해. "

첫 집에 대한 남편의 설명을 들었을 때, 오히려 시끄러운 상가 지역이 아니라 잘됐다 싶었다. 지하철 역에서 10분 정도면 가깝고 위치도 좋네 했었다.


예전에 싱가포르에서 살았던 친구는 이 얘길 듣고 "단언하건대, 싱가포르에서 10분 못 걸어. 버스 정거장이 가까운지 확인해 봐."

살았던 친구의 조언인데도, 뭘 10분인데.. 그랬다.


그런데.. 진짜 싱가포르에 와 보니..

뜨거운 태양 아래 쉘터 없는 거릴 10분간 걷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른 걸음으로 10분이지 세 아이와 걷기엔 싱가포르의 더위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뜨거운 태양만이 문제가 아니라 억수같이 퍼붓는 비도 문제였다.

장이라도 보면 짐을 들고 걸어오면서 정말 너무 힘들다 생각뿐이었고 한국의 배달 서비스가 눈물 나게 그리웠다. (지금은 싱가포르도 배달 서비스가 좋아져서 집 대문까지 배달된다. )


그래서인지 부동산 중개인은 우리 콘도에 한국인이 안 산다고 했다. 그런가 보다 했다. 지내보니 이 콘도는 옆쪽으로 산책길이 지하철 역까지 이어져 있어, 길가에 야생 버섯이 자라고 걷다보면 커다란 도마뱀도 만나게 되는 조용한 동네로, 싱가포르 학교도 근처에 없어서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시간이 되자,

"어.. 이거 분명 김치찌개 냄샌데.."

어느 집에선가 김치찌개를 끓이는 냄새가 올라왔다. 그냥 흉내내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맛있는 냄새였다.

"아.. 혹시 어느 층에 한국인이 사시나 보다." 했다.


또 어느 날은 맛있는 불고기 냄새가 , 또 어느 날은 라면 냄새가..

분명 한국분이 사시는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에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 콘도는 한 층에 세 집만 있고 엘리베이터 버튼이 층마다 다 눌러지지 않아서 오직 그 층에 거주하는 사람만 해당 층에 내릴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근데.. 여러 날 지켜보니 음식 냄새가 다른 층이 아니라 우리 층에서 나는 거 같았다.

분명 이사 와서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 양쪽 집 다 중국어가 유창한 싱가포리언들이었는데..

한국 음식 냄새는 우리 층 이웃집이 분명했다.


아.. 아마 남편이 한국 분인가 싶었다. 그래서 한국 음식 종종 하시나 보다 하고..


그러던 어느 날, 막내 유치원 등원시키러 나가는데 옆집의 그녀가 출근하다가

"버스 놓치겠다 어서 가자." 하고 아이와 내가 말하는 걸 듣고 갑자기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한국분이 이사 와서 좋아요." 하고..

그냥 나 한국어 알아 하면서 어설프게 하는 " 안 녕 하 세 요~ " 가 아니었다. 너무나 오리지널 네이티브 한국어였다.

어.. 저번에 분명 서툰 영어로 버벅거리며 인사하는 내게 자긴 싱가포리언이라고 했었는데..


"한국분이세요? " , "아님 혹시 남편분이 한국분이세요? "

혹시 인사말 정도 아는 걸까 싶어 영어로 묻는 내 물음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아니에요. 한국어 공부했어요. 좋아해서 korean language center 가서 2년 동안. " 한국어로 대답했다.

그랬구나.. 어떤 언어를 좋아해서 2년 정도 공부하면 나도 과연 그녀처럼 유창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싶어 문득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너무 자연스러운 그녀의 한국어에 반갑기도 하고 뜨끔하기도 했다. 그동안 아무도 한국어 모른다고 아이들에게 너네 이렇게 할래~ 잔소리하며 떠든 소리를 그녀는 다 알아 들었겠다 싶으니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그럼 한국 음식 냄새도 그 댁인 거죠?" 하고 물으니

(영어로 물어야 하나 한국어로 물어야 하나 혼란이 왔다)..

음식도 너무 좋아해서 종종 해 먹는다고 했다.


아~~ 진짜 한국을 좋아하는 분이구나 싶었다. 한국어를 이렇게 완벽하게 구사하는 외국인을 그것도 옆집에서 만날 줄이야..


일로 바쁜 그녀를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그 후로 그녀를 만나면 영어로 안녕하고 인사하는 내게 완벽한 풀 문장 한국어로 대답하는 그녀였다.

'아.. 반갑고 좋은데.. 나도 영어로 대화하고 싶다고..'

그런 내 맘도 모른 체 한국어로 말할 수 있음에 신나 보이는 그녀였다.


어느 날은 띵똥 하고 저녁시간에 찾아온 그녀..

"이 음식은 OOOO이에요. 돼지고기랑 새우랑 여러 가지 야채가 들어갔어요. 돼지고기 괜찮죠? 맛보라고 가져왔으니 프라이팬에 구워 먹어요."

이렇게 완벽한 한국어로 설명해주며 싱가포르 음식을 전해주고 갔다.


아직 아는 사람도 많이 없는 타국에서 얼마나 눈물 나게 감사한 일이던지..

그럼에도 그녀의 완벽한 한국어를 들으며 내가 그녀의 한국어 실전 회화 파트너가 된 기분이었다.

나도 저렇게 유창하게 영어로 그녀랑 대화하고 싶다고!!!

어쩔 수 없이 그다음부터 그녀를 만나면 한국어로 반갑게 인사하게 되었다.


받고만 있을 수 있나.. 나도 할 수 있는 요리를 나누며 그렇게 정을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며 지냈다.


그러다 1년이 지나고 아이들 학교가 정해지면서, 교통이 불편한 지역이라 아침 일찍 등교하는 아이들 때문에 급 이사가 결정되었고 , 고마웠던 그녀와 작별해야 했다. 참 아쉬웠다.


우리 이사가~ 하고 인사하러 갔더니 그녀 집엔 메이드만 있었고, 한국 사랑 그녀는 한국에 벚꽃 보러 여행갔다고 했다.

아.. 그녀의 한국 사랑은 정말 진심이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작별 인사도 못하고 떠나와서 많이 아쉬웠지만.. 한국을 정말 좋아해 주고 무엇보다 유창한 한국어로 영어 못하는 내 부담을 덜어준 그녀가 지금도 가끔 그립고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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