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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넌 외국인이야! (작은 위로의 큰 힘)

by 서소시

다음 발령지가 싱가포르로 결정된 후 그제야 우리 가족은 싱가포르가 어떤 나라인지 찾아보았다. 세계 지도상에 어디쯤 있는 나라인지.. 어떤 언어를 쓰는지.. 안전한 나라인지.. 날씨는 어떤지.. 종교는 어떤지..


싱가포르를 검색해 보니 눈길을 끄는 건 대부분 이런 것들이었다. 화려해 보이는 관광지들,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 그리고 여러 가지 여행 후기들..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나라.. 아이들이 즐거워할게 많아 보이는 관광지.. 딱 그랬다!


여행을 위한 소개는 넘쳐나는데.. 우린 그곳에서 학교 다니고 생활하며 살아가는 정보가 필요한데 그런 정보는 많지 않았다.



데자뷔 같은 삶..

우리 가족이 너무나 사랑하고 다시 돌아가 살고 싶다고 노래하는, 이제는 고향보다 더 그리운 곳 제주도에 살 때도 그랬다.

제주는 누구나 가보고 싶은 곳,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아이들과 함께 즐길거리가 많고 제주에서 꼭 먹어야 하는 맛있는 음식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은 제주를 여행하고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시간들을 소개하지만, 그곳에서의 진짜 삶을 소개해 주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관광지가 아닌 삶을 위한 터전으로서의 제주는 낯선 이방인인 우리 가족에게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고 부딪치며 경험하고 나서야 진짜 모습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첫째를 같이 키우며 친해진 제주 언니에게 어느 바다가 제일 예쁘냐고 물었을 때, 무심한 듯 진심인 언니의 대답을 잊지 못한다.

“이 바다도 저 바다도 다 제주 바다인데, 이건 이렇게 이쁘고 저건 저렇게 이쁘지. 뭐 특별히 대단한 바다를 애써 보러 가냐.”라고..

제법 몇 해를 살면서 제주를 아는구나 싶었는데, 난 여전히 관광객 모드였던가 보다.


가족이 자주 찾아가는 이름 없는 작은 바닷가가 오히려 관광객이 안 와서 보기도 놀기도 좋다고 대답하는 언니를 보면서.. 진짜 예쁜 바다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바다라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알 수 있었다. 관광지가 아닌 진짜 제주를 알아가는 방법은 수많은 여행 후기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있다는 걸..




제주에서의 경험 덕분에 우리 아이들에게 진짜 싱가포르를 경험하려면 관광객들이 소개하고 올린 글 속에 있는 싱가포르가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경험하며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진짜 싱가포르임을 알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 어린 둘째와 셋째는 싱가포르 공교육을 경험하며 친구들을 통해 진짜 싱가포르를 알아가 보자 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과정은 영어만 늘면 금방 적응하고 잘 따라갈 수 있을 거라 만만하게 본 게, 큰 실수였다. (덕분에 아이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싱가포르 사립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게 된 막내는 따라가야 할 공부가 많아서 힘들어했다. 학교 선생님이 잘 가르쳐 주신다며 개인 수업을 듣지 않겠다 우기는 막내 덕에 막내도 나도 참 많이 헤맸던 시간이었다. (투션을 참 싫어하는 막내다. 지금까지도)


싱가포르 학원은 한국과 다르게 대부분 일주일에 한 번,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의 수업으로 이루어진다. (피아노 같은 악기는 일주일에 한 번 30분~ 45분 정도로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 )이 정도 시간으로 부족한 실력을 따라잡기란 어려워 보였다.


중국어 학원에 상담 가니 수준 차이가 많이 난다고 개인 선생님을 구하길 권했고, 영어도 중국어도 아직 잘 모르니 엄마랑 하고 싶다고 해서 둘이서 얼마나 헤맸는지..

중국어 글자는 그림처럼 이미지로 외우길 좋아했지만, Oral 시험 같은 경우는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니 참 막막했다. (초등 1학년도 수준이 어렵다.)


학교에서 듣고 오길 주어진 그림을 보고 상황을 묻는 질문이 나온다고 해서, 그냥 꼭 알아야 하는 말만 외워가자 했었다.

예를 들면, 교실 풍경의 그림에 아이들이 싸우고 있는 장면, 달려가다 넘어진 아이, 청소하는 아이..

이런 장면을 보고 선생님이 질문하면 답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랑 “(넘어진) 이 아이가 아프다.”,“ 싸우면 안 된다.”

그렇게 기본 문장만 외워 연습해 갔다.


시험을 치고 온 아이의 반응..

선생님이 비슷한 상황의 놀이터 그림을 보여 주셨다고.. 그런데,

“아이가 아프다. 왜 아프냐?”라고 물어보셨단다.

왜? 인지 이유를 물을지 몰랐던 아이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뭐라도 공부한 거 아는 건 다 말하지 그랬냐고 했더니..

“통(痛)~~ 은 알죠.. 근데 왜 인지 말하라는데 ‘넘어졌다’를 모르는걸요.”

그 와중에 질문은 알아 들었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영어도 초등1학년이 이렇게 어려운 걸 알아야 하나 싶은 수준이었고, 수학도 정답을 맞혀도 풀이과정이 정확하지 않으면 감점되는 정확한 룰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같은 학교 친구 엄마가 소개해준 선생님 S.T

유치원 선생님이신 S.T는 우리 사정을 들으시고 1주일에 한번 2시간 수업을 해주기로 하셨다.

따라가야 할 공부의 차이가 너무 큰데 일주일 한번 2시간으로 될까 하는 나의 조급함에 선생님은 차근차근 쌓이면 따라갈 거라고 걱정을 덜어주셨다.


괜히 어려운 길을 선택해 아이를 고생시키나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선생님이 잘 가르쳐 주시는지, 설명은 알아듣는 건지 물으면 아이는 그저 “네~” 할 뿐이었다.

그렇게 쌓여가는 시간 덕분이었는지 아이는 학교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갔고, 알수록 자기가 다른 친구들보다 영어며 중국어며 얼마나 못하는지를 정확하게 인지하게 되었나 보다.


하루는 수업하고 나오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너무 못해서 숙제를 많이 틀렸다 했더니,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당연하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넌 외국인이지 않니.. 외국인이 다른 나라 언어를 모르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지 그게 몇 살인데 아직 이것도 모르느냐와는 상관없는 거다.”

“ 많이 틀리며 배워야 실력이 는다. 틀리는 걸,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S.T 선생님은 막내가 숙제를 많이 틀려 갔을 때도,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해 멍 해 있을 때에도 수시로 들려주셨다.

넌 외국인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고 잘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 거고 이 시간이 쌓이면 잘하게 될 거니 걱정마라.”


아이에겐 “그럼 넌 외국인이야!”이 말이 큰 응원이자 위로가 되어 주었다고 했다.


그럼 그럼.. 우린 외국인이다.. 싱가포르 공부가 어려운 거지..

그리고 출발이 늦었기에 우리가 아직 가야 할 길이 더 있는 거지 그게 네가 모자라서는 아니니..

그렇게 작지만 큰 응원 덕에 아이는 학교 생활을 잘 따라갈 용기가 생겼고 잘 적응해 나갔다.

(사실 영어가 부족한 나에게도 이 말씀은 위로가 되었나보다. 이 나이에도 여전히 영어 앞에 초라해지지만 외국인인 내가 이만큼 알아듣고 살고 있으면 잘하고 있는 거라고..)


너무나 감사한 인연..

선생님은 우리에게 싱가포르는 ‘NO CRIME’ 아니고 ‘LOW CRIME’이니.. 항상 몸조심하라고 해 주셨다.


초등 저학년 과정부터 이렇게 어려운데 계속되는 경쟁 속에 공부해야 하는 싱가포르에서 어떻게 해야 하냐는 물음에도.. 지금 기초를 잘 다지면 아이가 스스로 잘해 나갈 거라고..

그런 응원들이 참 따뜻했고 큰 힘이 되었다.


잠시 함께 공부했고 오래 안부를 전하지 못했는데도, 너무 감사하게도 아이의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하는 시기에 선생님과 남편 분까지 같이 마음 써주고 조언해주시고 응원해 주셨다.

어느새 사춘기가 된 막내에게 쉴 때 뭐 하냐 물으시고 책 읽는 거 좋아한다고 답 했더니, 나가서 친구들과 뛰어 놀기도 해야 한다고.. 친구도 중요한 시기니 즐겁게 학교 생활하라고 응원도 보내주셨다. 지금의 네 성장을 누구보다 기쁘게 생각한다 하시면서..


지금도 막내와 난 감사한다. 응원해주신 말씀 잊지 않고 있다고.. 정말 큰 힘이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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