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등을 교체하러 오신 핸디맨 아저씨에게 더운 날 고생하신 게 감사해 시원한 음료를 대접했다.
천장이 높은 편이라 사다리 위에서 한참을 애쓰신 후였다.
"아니에요. 라마단이라 못 마셔요. 감사합니다."
‘아 ~ 라마단이 벌써 시작됐구나.‘ 싶었다.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땀 흘려 일하시고 시원한 음료 한 모금 마시지 못한다니 얼마나 힘드실까 안타까웠다.
어느새 라마단 시기구나.. 달력을 찾아보니 올해 하리 라야 푸아사 (hari Raya Puasa)가 5월 3일이다.
이 날은 한 달간의 라마단이 끝났음을 축하하는 날이니 이미 라마단이 시작된 걸 알 수 있었다.
작년 이맘때 학교를 다녀온 막내는 반 친구들을 걱정하며 이야기했다.
"엄마.. 우리 반 친구들 중 몇 명은 아무것도 안 마시고 밥도 안 먹어요. 그래서 목말라 ~ 배고파 ~ 그러더라고요."
낮 기온이 더울 땐 35도까지 올라가는 싱가포르라 조금만 걸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상황에서 해가 떠 있는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지내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거 같았다.
“보통 아이들은 안 한다고 하던데, 라마단을 지키는 친구들이 있어?”
"네. 많이 힘들 거 같은데 아이들이 밥 먹을 때 일부러 안 쳐다보고, PE(체육) 수업 땐 듣지 않고 그늘에 앉아 있더라고요. “
“이렇게 더운데 그걸 한 달이나 해야 한대요. 물통을 아예 안 들고 다녀요. 괜찮을까 걱정돼요.”
“그렇지.. 물도 안 마시는데 PE 수업까지 하면 얼마나 힘들겠니.. 어린데 대단하구나.”
막내 반 친구들 중 몇 명은 라마단 기간에 학교 와서 물도 전혀 안 마시고 리세스 타임에 음식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보통 아이들은 하지 않는다는데 집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나 보다.
싱가포르에 살면서도 이슬람교도를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아 라마단 기간 동안 어떨지 그저 짐작하는 정도였는데, 말레이시아 출신 친구들 비율이 높은 편인 학교라 그런지, 아이는 같은 반 친구들을 보면서 더위에 쓰러질까 걱정도 되고 그들이 믿는 종교에 대한 관심도 생겼나 보다.
방금 온 올해 학교 행사 안내문에도 라마단으로 금식하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적혀있었다. 오후 늦게 있을 행사라 금식하는 학생들은 해진 후 먹을 도시락을 꼭 챙겨 오라는 안내문이었다.
사실 싱가포르 오기 전엔 라마단이 뭔지 잘 몰랐다. 경험할 기회가 없으니 관심도 없었다.
왜 물도 못 마신다고 하는 걸까? 궁금해서 아이들과 같이 찾아봤었다.
라마단(Ramadan)은 이슬람력의 9번째 달에 금식(Fasting)과 기도(Praying)로 한 달 동안 보내는 이슬람 행사로, 해 뜰 무렵부터 해질 때까지 금식을 한다. 보통 어린이, 노약자와 환자, 임산부나 수유기 산모 등은 제외된다고 한다. 단지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 몸과 마음을 수련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한 달 간의 라마단 금식 기간이 무사히 끝났음을 축하하는 날이 하리 라야 푸아사 (hari Raya Puasa)다. "Selamat Hari Raya” (하리 라야를 축하합니다)라고 외치며 축하하고, 이슬람교도들은 우리네 명절처럼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 모임을 갖고 서로를 축복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싱가포르에 와서 살면서 이곳이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가 공존하는 나라임을 처음 실감하게 된 계기는 의외로 이 나라 공휴일이었다.
아이들이 “내일 학교 안 가요.~”하고 얘기하면 왜 안 가는 걸까 싶었고, 찾아보면 이름도 생소한 날에 안 간다고 했다.
구정 (Chinese New Year)이나 크리스마스 (Christmas Day)야 우리도 잘 아는 공휴일이지만, 하리 라야 푸아사 (hari Raya Puasa), 베삭 데이 (Vesak Day), 디파발리 (Deepavali).. 이런 생소한 이름들이 무슨 날일까 호기심을 불러왔다.
지내며 알고 보니 각 종교의 중요한기념일들이었다.
1. 기독교 : 성 금요일 (Good Friday), 크리스마스 (Christmas Day)
2. 이슬람교 : 하리 라야 푸아사 (hari Raya Puasa), 하리 라야 하지 (hari Raya Haji)
3. 힌두교 : 디파발리(Deepavali)
4. 불교 : 베삭 데이 (Vesak Day) - 부처님 오신 날 (힌두교인도 기념한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교의 기념일이 있고 그 외 구정 (Chinese New Year), 노동절 (Labour Day)와 국경일 (National Day)등이 있다.
기념일마다 특정 거리에 화려한 등을 달고 이 날을 축하하는데, 모를 땐 왜 여기 이렇게 화려한 장식과 등이 걸렸나 신기했었다.
구정 (Chinese New Year)엔 차이나타운 일대를 그 해의 동물 모형으로 꾸미고 화려한 점등식을 한다.
( 2021년 차이나타운 일대.. by 서소시 )
크리스마스 (Christmas Day)엔 오차드 일대 거리 전체에서 화려한 장식을 만날 수 있고 매해 다른 테마로 꾸며진다.
( 2018년 오차드 일대.. by 서소시 )
디파발리 (Deepavali)엔 리틀 인디아 일대에서, 하리 라야 푸아사 (hari Raya Puasa)와 라마단 기간엔 Paya Lebar 주변 Geylang Serai 지역에서 화려한 등 장식을 구경할 수 있다.
참 다양한 종교가 어우러져 있는 싱가포르다.
( 2021년 파야 레바 일대.. by 서소시 )
하리 라야가 다가오면 각 콘도 입구나 쇼핑몰 입구, 학교 메인 로비 등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연두색과 노란색으로 꼬아 만든 다이아몬드 모양 장식을 달아 놓는데 늘 그게 뭘까 궁금했었다.
( 끄뚜빳 by 서소시 )
물어보니 말레이시아 전통 음식인 ‘끄뚜빳’(Ketupat)이라고 했다. 어린 야자잎을 교차해 엮어 만든 특이한 모양의 주머니에 쌀이나 찹쌀을 넣어 찐 음식인데, 이걸 모형으로 달아 놓는 것이다. 한 달간의 금식으로 자신의 죄를 속죄한 이슬람 신자들의 신앙적 승리를 표현하는 거라고 했다.
크리스마스에 트리 장식을 꾸미듯이.. 부처님 오신 날에 연등을 달 듯이..
우리에겐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이슬람 축제에는 이런 전통 음식 모양 장식을 다는구나 싶었다.
다양한 문화 배경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살기에, 같은 교실 안에서도 자신이 믿는 종교적 신념을 따르느라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아이는 쓰러지지 않고 하루를 잘 견디기를.. 오늘 하루는 덜 덥기를 바라며 그들을 응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