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찬 공간..그 울음소리를 쫓느라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냉랭한 에어컨의 찬기까지 더해지니 이 어수선함이 괜히 불안한 마음을 더 들썩이게 했다.새해 벽두부터 이 새벽에 응급실에 앉아 있을 줄이야..
39도..
며칠 전, 너무 피곤하다며 씻고 나면 좀 나을까요 하던 막내가 체온계를 들어 보여줬다. 믿고 싶지 않은 수치.. 고열이었다.
매일이 여름인 나라에서 살다가 유난히 추웠던 한국의 겨울을 만났으니 아이 몸도 더웠다가 추웠다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적응하기 어려웠을 테다. 싱가포르로 돌아오자마자 막내 열이 높았다.
급한 대로 해열제를 먹였는데 열은 안 떨어지고 더 올랐다. 코로나 테스트도 해보고 독감 테스트도 해봤는데 모두 음성이었고, 의사 선생님은 목도 안 부었다며 다른 증상이 없으니 줄 수 있는 약은 해열제뿐이라고 했다. 왜 열이 나는지 원인을 모르니 아무 약이나 쓸 수 없다고.. 열나고 바로 검사하면 음성이다가 나중에 양성인 경우도 많아서 더 불안했다. 이미 코로나도 독감도 앓아봐서 얼마나 아픈지 알기에 더..
시기도 하필.. 왜 아이들은 꼭 이럴 때 아픈 걸까..당장 새해 연휴 기간이라 동네 병원마다 문을 다 닫았다. 그렇게 막내는 며칠 동안 열이 나도 그저 해열제로 버티야 했다. 잘 먹지도 못하고많이 힘들어했다.
2023년 새해를 축하하는 폭죽이 집 근처 공원에서 펑펑 터지며 솟아올랐다. 해마다 내다보며 새해 소원도 빌고 영상도 찍곤 했는데 아이가 아프니 내다볼 여력도 없었다. 열나는 아이를 닦이느라 정신이 없었다.매번 환호하며새해를 맞는 설렘에 들뜨게 만들던 폭죽 소리는아픈 아이 걱정으로 불안한 심장박동에 부스터가 되어 내 속도 펑펑 터트렸다.
제발지나가는 2022년과 함께 아프고 힘들었던 일들도.. 나쁜 바이러스도 다 같이 떠나가 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게 아픈 탓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도 막내는 여러 날 등교하지 못했다.
( 싱가포르 학교는 매년 새 학기 시작이 1월 3일이다. )
다행히 열이 내리고 내일은 학교 갈 수 있으려나 했는데한밤에 놀란목소리의 막내가 황급히 나를 찾았다.
어머나! 온몸에 발진이 올라오고 있었다. 팔이며 다리, 배에도 등에도 다..
애 셋을 키웠으니 발진 정도에 놀랄 일은 아니나 왜 열이 났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온몸에 발진까지 올라오니 그냥 무시하기 어려웠다.
밤 12시를 향해가는 시간.. 늦은 시간이지만 내일 학교를 갈 수 있을지 발진의 원인을 확인해야 했다. 전염성 있는 건지 아닌지..
( 어린이 병원 응급실 입구 by 서소시 )
그렇게 달려온 응급실..
싱가포르엔< KK Women's and Children's Hospital>이라는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전문병원이 있다. 그래서 어린이 전문 응급실이24시간 따로 운영되고 있다.
입구에따로 마련된 부스에서 왜 왔는지 묻더니 바로 코로나 테스트부터 했다. 테스트 비용은 SGD $10 ( 약 만원 정도)이었다. 음성이 확인되어야 응급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다시 간호사 선생님과 만나 어디가 아파 왔는지 이야기하고 간단한 기본 검사 후 수납을 한 뒤 대기실로 가 기다려야했다. 야간 응급 진료비는 무려 SGD $135 ( 대략 십삼만 원 정도)..
대기실로 들어서니 아이구나! 아픈 아이들이 이렇게 많다니.. 넓은 대기실엔 많은 아이들과 부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보호자도 한 명만 같이 들어올 수 있다는데 어쩜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지..
( 응급실 진료비.. 비싸다. by 서소시 )
막내와 한쪽 의자에 앉으며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싶어 막막했다. 만화 화면 옆으로 아뿔싸.. 스크린에 대기시간이 160분이라고 쓰여 있었다. 괜찮다 해도 내일 학교 갈 수 있으려나 싶던 그때..
( 대기 번호로 진료받을 진료실 번호를 알려준다. by 서소시)
막 유모차를 밀고 들어오는 아기 엄마 손에눈에 익은 익숙한 여권이 들려 있었다. 초록색이 선명한 그건 바로 우리나라 여권이었다. 한국분인가 보다 하며 저절로 눈길이 갔는데마침 앞줄에 있는 분들에게 ABCD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타향살이 오래되다 보니 먼 나라에서 한국분들을 보면 반가우면서도 애써 아는 체를 하진 않는데.. 그 새벽 시간에 아픈 아기 때문에 놀라서 달려왔을 아기 엄마를보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한국분이시죠? 안녕하세요. 이쪽이에요 " 하면서..
( 달려가면서 나도 스스로에게 놀랐다. )
아기 엄만 아기가 7개월로 많이 어린데 토를 여러 번 해서 왔다고 했다. 문득 큰아이가 돌쯤에 너무 많이 토해서 응급실을 찾았던 그 밤이 떠올랐다. 아기도 힘들 테지만 많이 걱정되고 놀랐을 아기 엄마도 안쓰러웠다. 오래전 아이가 많이 아픈가 싶어 놀라고 무서웠던 어린 내가 오버랩되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혹시 도울 거 있음 얘기해 달라고 했다.
얼마 뒤 당황한 빛이 역력한 아기 엄마가 잠깐 아기를 봐달라고 했다. 대기 시간을 확인하러 일어났다가 아기가 또다시 토했다고.. 에어컨 바람에 젖은 옷이 추울까 봐 갈아입히고 싶은데 더 토할까 봐 못하겠다고 했다. 많이 당황한 아기 엄마가 간호사 선생님께 상황을 알리러 간 사이.. 혹시 낯선 사람을 보고 아기가 놀랄까 봐 유모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기와 눈높이를 맞췄다.
또 토할까 봐 가만가만 아주 조금씩만 천천히 유모차를 움직이며..
"아이고 착하다~ 아픈데 울지도 않고 너무 장하고 기특하네~~ 조금만 있으면 엄마 금방 오실 거야."
그렇게 무한 칭찬을 해줬다.
기특하게도 아인 낯선 듯 긴장하면서도 울지 않고 잘 있어줬다.
돌아보니 힘없이 앉아있는 막내가 보였다. 괜찮냐고 물었더니.. 자긴 괜찮으니 아기 도와주란다. 그러면서 아기가 예쁘다며 힘없이 웃고 있었다. 아직 힘들 텐데 녀석..
다행히 금방 아기 엄마가 돌아와 고맙다고 했다. 아픈 아기 때문에 경황없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아기 토에 젖어있는 엄마의 한쪽 어깨도 내 눈엔 추워 보였다.
주위를 둘러봐도 생수 파는 자판기도 하나 안 보였다. 돌아보니 다행히 정수기가 보였다.
"물 한잔 드릴까요? 숨 돌릴 새 없이 경황없어 보여서요.. "
그렇게 물 한잔을 떠다 건넸다.
먼 나라 응급실에서 이 새벽에 한국분을 만나니 뭐라도 도와주고 싶었나 보다..
드디어 막내 진료 차례가 왔고 진료 잘 받고 가시라고 인사했다. 다행히 아기도 진료받으러 들어간다고 했다.
막내는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아픈 거라며 낫는 과정에서 올라온 발진이라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 전염성 있는 건 아니라고.. 원인은 모르지만 며칠 올라오다 곧 괜찮을 거란 그 한마디에 이미 다 나은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괜찮다"는 말은 참 신기한 힘을 가진 말이다. 의사 선생님의 그 한마디에 온갖 걱정 근심이 사라지니..
약을 받으러 가서 다시 대기하다 보니 누군가 놓치고 간 아기 신발 한 짝이 눈에 들어왔다. 저걸 놓친 줄도 모르고 아픈 아이 챙기느라 정신없었을 아이 엄마 모습이 그려져서 홀로 남겨진 신발에 더 눈길이 갔다.
( 어린이 병원 약국 by 서소시 )
처방받은 약을 받으면서도.. 몇 시간 뒤 학교 가야 하는 막내가 안쓰러워 종종걸음으로 병원을 나서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