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온 지 여러 해라 더 그랬겠지만유난히 추웠던 올 12월 한국의 겨울을 경험하며 아이들도 나도 가장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은 건 온통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들에관한 거다.
말할 때마다.. 추워서 호호거릴 때마다 하얗게 따라 나오던 입김에서..
맛있는 만두와 호빵을 쪄내는 가게 앞에서.. 생각만 해도 다시 먹고 싶어 미소 지어지는 따끈따끈한 추어탕 그릇 위에서..
막 구워져 나와 먹음직스럽던 겨울의 별미 군고구마 위에서..
매번 피어오르던 하얀 연기를 보면서 우리가 겨울의 한가운데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리운 또 하나의 연기 가득했던 풍경.. 그건 따끈따끈한 목욕탕을가득 채웠던 수증기였다.
(매일 무더운 싱가포르의 여름 속에 살면서도 이상하게 한국의 목욕탕과 찜질방은 그립고 가고 싶은 곳이다. )
코로나 이후로 몇 년 간 한국가기도 어려웠기에 괜히 더 그리웠던 그곳.. 마침 부모님도 오랫동안 못 가셨다고 해서 온천물이 나오는 가족탕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정말 오랜만이라 딸들과 엄마를 모시고 함께 가족탕에 가면서 설레었다.
몇 년 만에 가는 온천탕인지..
무더운 싱가포르에서 살아온 아이들은 어릴 때 가본 목욕탕 기억이 전부라 물살이 세서 금방 채워지는 가족탕 시설에 한번, 뿌연 수증기가 가득 찬 공간에 또 한 번 놀라워했다.
뜨거운 물속에 들어오는 것도 힘들어했지만 가득 채워진 수증기 때문에 숨 쉬는 걸 더 어려워했다. 들어왔다 못 참고 금방 도망가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자꾸 웃음이 났다.
우리 아이들에겐 목욕탕은 어떤 곳으로 기억에 남으려나..
그리웠던 풍경 속 따끈따끈한 탕 속에 엄마와 함께 앉아 있으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싶을 만큼 행복했다.
목욕탕과 함께 떠오르는 추억들이 이 공간을 가득 메운 물방울만큼 방울방울 가득이다.
어린 시절 목욕탕은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반가운 놀이터였기에 언니, 동생과 뛰어놀며 즐거웠었다. 가끔 뛰다가 넘어져서 혼나기도 했지만 목욕하러 가는 날이 늘 기다려졌었다. 남동생 머릴 삐삐처럼 묶어주고 얼마나 재미있어했던가.. 목욕하고 나와 마시던 우유는 왜 그렇게나 맛있었던 건지..
참 씩씩하고 부지런했던 울 엄마..
마른 체형의 엄만 세 아이 목욕탕에 데려가면 차례로 눕혀놓고 순서대로 때 밀어주면서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늘 씩씩하셨다.
고집 센 언니가 팔을 안 펴고 웅크리고 있다 엄마한테 혼나는 모습을 보고 난 뒤로는 아파도 꾹 참고 엄마가 하라는 대로 가만히 있었던 덕분에 난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적어도 목욕탕에서는..
내 기억은 그랬는데.. 엄마 말씀은 달랐다.
그렇게 차례로 씻겨 내보내고 나면 힘이 빠져서 정작 본인은 씻을 힘이 없어 멍하니 앉아 있으셨단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이렇게 마르고 힘이 없어 나중에 애나 낳겠냐고도 하셨단다. 엄마에게도 세 아이 육아는 버거운 일이었던 거다.
줄줄이 딸을 낳다 어렵게 낳은 아들마저 7개월 때 조산하는 바람에 당시엔 너무 귀했던 인큐베이터에 넣어야 했단다. 돈도 많이 들었지만 살 수 있을지.. 살아도 자라며 정상이 아닐 수도 있을 거란 소리까지 들으셨다니.. 그 때문에 남들 다 잘만 낳는 아들 유별나게도 낳는다고 유난히 아들 바라기셨고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할머니에게 시집살이 엄청하셨다는 엄마.. 할머닌 시집가면 남의 식구 되는 딸들은 별 필요 없다 하셨었다.
효자였던 아버진 마음고생 심한 엄마를 전혀 위로할 줄 모르셨으니 얼마나 더 외로우셨을지.. 형편마저 어려웠던 그 시절 힘들었던 고비마다..
" 난 너희보고 산다!" 하셨던 엄마..
그래서였는지 철든 이후로 내 목표는 하나였다.
"×× 나 차고 나오지."
또 딸을 낳아 너무 서운했다는 아빠가 하신 그 말씀을 전해 들은 날..
둘째도 딸이라 나로 인해 힘겨웠을 엄마의 시간을 내가 잘 사는 모습으로 보상해 드리고 싶다고.. 나 때문에 엄마가 속상해서 눈물 나는 시간은 없게 해 드리겠다고 다짐했었다. 쓸모없는 딸이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고 좋은 성적을 받으면 할머니께 달려가서 보란 듯이 자랑을 했었다. 그럼 할머닌 사촌 오빠를 불러 네가 이런 성적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었다. 딸인 내가 무언가 잘하는 건 안중에도 없으셨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는데..
진짜 그러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죄송하게도 그 목표를 다 이뤄내진 못했다. 떠오르는 것만 꼽아봐도 이미 여러 번 엄마를 울렸으니..
감히.. 단언했었다.
엄마처럼 안 살고 싶다고..
엄마의 삶의 이유가 우리가 되고 우리 보고 참고 견디며 산다는 그 말씀이 너무 무거운 덩어리가 되어 버겁기만 했다. 갚아야 할 채무 같았고 그 말씀이 엄마의 고단한 삶과 함께 엮어져 아픈 장면들이 줄줄이 떠올라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나는 엄마처럼 안 살 거야!!!"
하고 싶은 것도 다 해보고 가고 싶은 곳도 다 가고.. 그렇게 나를 먼저 위하며 살 거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는데..
꼭 엄마처럼.. 나 역시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아이가 셋이라면 아들 낳으려고 많이 낳은 거냐 아직도 이런 소릴 듣는다. 딸들도 여전히 세명 중 막내가 남동생이라고 하면 아~ 하는 소릴 듣는단다. )
엄만 세 아이 육아로 힘들어하던 내게 힘들어도 키워보니 알겠더라며.. 내가 제일 부자라고 하셨다.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이들이 주는 기쁨이 세 배로 클 거라고..
엄마처럼 안 살 거라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는 세 아이 키우면서 뼈저리게 알아가고 있다.엄마가 우리만 바라보고 사신다는 이야기가 너무 답답했었는데..
그 말씀 안에 얼마나 큰 희생과 인내가 있어야 했는지 겪어 보고서야 알게 되었으니..
어느 날인가 아이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 스스로 깜짝 놀란 날.. 그때 알았다.
그 말씀은..
너희를 위해 인내한 내 시간을 알아달라는 생색도..
그러니 꼭 갚아야 한다는 보상받고 싶은 욕심도 아니었던 거다..
그저 애쓰고 버텨온 엄마 스스로에게..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 더 버텨!' 하고 외치는 다짐이었고..
힘든 와중에도 보기만 해도 예쁜 그래서 더 지켜내야만 했던 어린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이었고..
남은 힘을 끌어 모아 버텨내기 위한 자기 주문이었던 거다..
그 말씀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이었는지 엄마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다니..
유난히 마른 체형이었던 엄마는 흐른 세월 동안 더 말라 있었다. 엄마 등을 밀어 드리면서.. 가녀린 엄마 모습에 마음 아파서 자꾸만 손에 힘이 빠졌다. 행여라도 아프실까 봐..
그렇게 엄마를 닦아 드리면서.. 이렇게 닦아서 없어질 수 있는 거라면.. 엄마의 고단했던 지난 시간들을 지워드리고 싶었다.
오랜만에 보는 손녀들과 함께 웃으며 보내는 따뜻한 기억으로 충분히 불리고 불려서.. 소소하나 이렇게 함께하며 나누는 사랑으로 닦아내고 또 닦아내서.. 그렇게 고단하고 아팠던 지난 시간들을 닦아내고 싶었다.
일주일 내내 비가 많이 와서 으슬으슬 추워진 싱가포르 날씨 탓인지 엄마와 함께였던 가족탕의 뜨거운 온기가 그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