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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단 언니 말에 대성통곡을 했다.

by 서소시

내게는 요리 잘하는 형부가 있다.

아이들이 한국 가면 먹고 싶은 음식 중에 이모부의 함박 스테이크를 노래 부를 만큼..


언제부턴가 언니집에 가면 형부가 며칠 동안 공들여 준비해 만들어주신 따뜻한 집밥을 준비해 주셨다. 어딜 가도 우리 식구만 해도 이미 대식구라 그냥 나가서 사 먹자고.. 오랜만에 한국 가면 먹고 싶은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하며 말려봐도.. 형부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집밥을 준비해 기다려주신다.

"어딜 가도 이런 거 못 먹어. ~" 하시면서..


그건 맞는 말씀이다. 미안해서 자꾸 말리지만 먹다 보면 이걸 어떻게 만드시는 건지 비법을 묻게 만드는 맛이었다.

"좀 알려줘 봐요 형부. 이거 뭐 넣고 어떻게 하는 거예요?"

아무리 물어도 영업비밀이라며 알려주진 않으신다. 그냥 많이 먹고 가라신다.


(형부가 준비해주신 집밥.. by 서소시)


이미 배가 터질 것 같은데 돌아보면 다음 메뉴가 나오고 있다. 아이들이 쓴 '먹고 싶은 음식 목록'을 보셨는지 하나라도 더 먹여주고 싶어서..

정성 들여 지은 솥밥에.. 감자탕에 불고기, 함박 스테이크까지 잘 차려진 저녁을 먹었건만.. 고구마와 감자를 넣어 달콤하고 바삭한 고로케도 만들어주시고 뜨끈하고 시원한 어묵탕도 연이어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 가족을 위해 준비해주신 따뜻하고 정성 가득한 맛있는 밥상.. 그 속에 담긴 진한 정을 느끼며 열 마디 말보다 더 속 깊은 형부의 마음을 마주했다. 고맙고 미안해서 그저 맛있게 먹었다.


그런 형부가 계셔서 참 많이 감사하다. 언니가 일하느라 바빠 형부 식사도 잘 못 챙겨준다던데 힘드시죠 여쭤보면..

"내가 차려먹으면 되지. 내가 더 잘해!" 하신다.




언젠가.. 아마 셋째를 낳고 세 아이 돌보느라 밤인지 아침인지 정신없이 힘들던 시기였나 보다. 늘 혼자만 멀리 살아 더 외롭고 힘들었던.. 셋을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한 일이었고 감당이 안 됐다. 엄마가 오셔서 한 달이나 도와주고 가셨는데 그 빈자리가 커서 더 힘들던 때였나 보다.


오랜만에 언니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셋 돌보기 너무 힘들어. 진짜 힘들어."

그렇게 하소연하는 내게 언니는..

"에구.. 시간이 더 필요해. 지금은 정말 힘들겠지만 조금 더 지나고 나면 이제 좀 살만하다 싶은 날이 올 거야." 그랬다.

대체 언제 살만해지는 날이 온다는 건지.. 그저 그 지나가야 한다는 시간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져 더 막막하고 버거웠다.


"난 요즘 같으면 정말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해. 형부가 일찍 와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두 아이들 학교 잘 다니고.. 그냥 지금 같으면 정말 좋겠어."

그렇게 언니와 전화를 끊고..

나도 모르게 대성통곡을 했다.


사랑하는 언니가 행복하다는데 그게 배 아픈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너무 힘들다 보니 언니가 말하는 '행복'이란 느낌이 너무 멀게 느껴졌었나 보다.

남편은 많이 바빴고 세 아이 홀로 독박육아를 하면서 지쳐있어 더 그랬을까.. 어쩌면 나도 몰랐던 산후 우울증이 있어서였을까..

그날 언니가 부러워서 정말 많이 울었다.


돌아보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어여쁜 세 꼬맹이들이 제일 예쁠 때였는데..

그저 예뻐하고만 있을 순 없는 현실..

육아는 전쟁이었다.

특히 막내는 한번 울면 정말 크게 울고 잘 멈추지 않아서 이웃집에 과일 사다 나르며 죄송하다 사과할 정도였다. 아랫집 할머니는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며 아이가 너무 울더라며 타박을 하셨다. 하도 밤마다 큰 소리로 많이 울어서 새벽에 울면 온 아파트가 들썩이는 듯해 안고 집 앞 공원으로 뛰어가야 하던 시기였으니..


그땐 많이 지쳐있었나 보다. 몸도 마음도..

그래서 행복하다는 언니가 많이 부러웠었다. (울었단 이야긴 해보지 않아 글을 읽으면 놀라려나..)

물론 지금은 진심으로 언니가 여유 있어 보이고 행복해 보여 형부에게 감사하다. 언니 곁에서 맛있는 집밥 해서 챙겨주는 다정한 형부가 있고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멋지게 잘 자라준 어여쁜 조카들이 있어서.. 언니를 볼 때마다 너무 좋다고 진심을 담아 전한다.




며칠 뒤 겨우 시간을 내서 차 한잔을 놓고 둘이 마주 앉았을 때 언니가 문득 건넨 말이었다.

"나이가 드는지.. 이번에 느낀 게 너네가 가까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싶더라. 살가운 네가 엄마 곁에 살았다면 엄마가 더 좋아하셨을 거 같고."

언니의 한마디에.. 이상하게 뜨거운 울컥함이 목구멍 가득 차올랐다.

"그러게.. 가까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참 많이도 싸우며 자랐는데..

언닌 나와 참 많이 달랐다.

어릴 땐 왜 우리 언닌 나와 이렇게 다를까 하며 섭섭함도 많았다. 같은 날씨에도 하늘 빛깔 따라 슬픈 흐린 날과 운치 있고 감성 터지는 기쁜 흐린 날을 구분해 부르던 나와 달리 언닌 뭔가 이성적이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언닌 시인이다.


체격도 늘 통통했던 나와 달리 날씬했고 둘이 같이 다니면 자매냐고 묻기보단 친구냐는 소릴 더 많이 들었었다. 엄마 친구분들이 오랜만에 언닐 보면 "어머 너 이뻐졌다." 하셨고..

날 보면 "네가 그렇게 공부 열심히 한다며.." 하셨었다. 이런.. 이렇게나 안 닮은 자매라니..


어떤 게 맞는 건지..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거냐고 질문하면 늘 돌아오는 답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묻기 전에 고민을 해봐. 나도 아무도 안 가르쳐줬거든.."

그렇게 냉정하게 대답하던 언니였다. 그냥 알면 가르쳐주지.. 참 많이 서운했었는데..


그런데.. 살아보니 언니 말이 맞는 말이었다.

세상에 정답이 있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

내가 받은 문제는 내가 찾은 정답으로 풀어가야 하는 거였다. 어떻게 풀어갈지 고민하고 잘 생각해서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거..

그게 우리네 인생이더라.

한참 어렸던 내게는 그런 언니가 참으로 까칠하고 냉정한 언니였었다.


멀리 사는 동생이 잘 있는지 걱정도 안 되냐며.. 한 번을 먼저 안부도 안 묻는다고 툴툴거려 봐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더라며 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렇게 무심히 말하는 언니..

안 서운할래야 안 서운할 수가 없었다.

나 같으면 낯선 나라에서 혼자 안 외롭냐.. 지낼만하냐.. 먼저 물어줄 거 같은데..




그랬는데..

멀리 살다 보니 언니가 있어서.. 다정한 형부가 있어서.. 감사한 일이 더 많았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런 거 같다. 늘 말이 앞서지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그저 마음만 안타까운 나와 달리, 무심한 듯 하지만 부모님께 자주 찾아가서 챙기는 언니가 있어서.. 맘 편히 멀리서 살 수 있지 싶다. 첫째는 타고나는 거라던 아버지 말씀이 무슨 말인지 언니를 보면서 알아간다. 나도 나이가 드나 보다..


어쩌다 보니 결혼한 이후론 늘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거리에서 살아 남보다도 더 못 보고 살고 있지만.. 현명한 언니가 있어 늘 고맙다.

난 아직도 제 버릇 못 고치고 해결 못하는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늘 전화부터 걸고 있다. 이럴 땐 어쩌면 좋냐고..

"생각부터 하라고!!! 고민해 봐.." 하던 언니는 이제 없다. 여전히 답이 없다 하면서도..

언닌 이야길 들어주고 워워 진정시켜 주고.. 내가 보지 못한 시선을 들려준다. 이런 언니가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감정적인 나와 다른 시선으로 차분히 상황을 봐주는 언니가 있어.. 나와 다름이 이렇게나 고마운 일이구나 싶어 새삼 고맙다.


이제 다시 언니가 요즘 같으면 너무 행복하다 한다면.. 진심을 다해 박수치며 내 일보다 더 기뻐할 거다. 언니가 말한 '그 힘든 시간이 지나 보면 살만해진다'라고 했던 시간이.. 그 막막했던 시간이 드! 디! 어! 지나간 것일까.. 내 속에도 여유란 게 생긴 모양이다.


내겐 나와 닮지 않은 언니가 있다.

그래서 진심으로 고맙다.

생각보다 어려운 세상살이에.. 나와 다른 시선이 있음을 알려주는 닮지 않은 언니가 있어서.. 속 좁은 내 마음의 그릇이 조금은 더 여유 있는 크기로 커갈 수 있었지 싶다.








< Daum 에 실린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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