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랫소리 들리는 이곳은 영어교실입니다!

(싱가포르 영어 선생님)

by 서소시

"자 ~~ 다 같이 불러볼까요?"

"도레도 ~ 도레미레도 ~~"

"도레미 ~ 도미 ~ 도미 ~ 레미 파파 ~~"

살짝 쑥스러워 작은 목소리로 다른 분들과 속도를 맞추며 불러보는 노래..


( H 선생님이 손수 만드신 악보, photo by 서소시 )


오랜만에 악보를 보고 따라 부르려니 쑥스러워 자꾸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 여기 영어 교실 아닌가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이곳은 분명 영어 배우러 온 영어 수업 시간이었기에..


우리 반 선생님 H는 환한 웃음이 귀여운 할머니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악보를 나눠주시며 다 같이 노래부터 부르자고 하셨다.


"도레미 ~" 표시와 함께 "123~ "으로 표시되어 있는 악보는 H 선생님이 손수 그려 만든 거라고 했다.

H 선생님의 선창을 따라 잘 모르지만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조금 어색했던 우린 킥킥대며 편안하게 웃을 수 있었다. 너나 할거 없이 맘처럼 따라 불러지지 않는 노래 실력에 저절로 웃음이 났기 때문이었다.


H 선생님은..

"노래를 부르면 즐거운 에너지가 나오고 이렇게 우리를 웃게 해 주는데.. 안 부를 이유가 있나요?" 하셨다.


간단하게 목을 푼 이후엔 두드리면 여러 가지 소리가 나는 악기도 나눠주셨다. 그중엔 콩이 담긴 플라스틱 병도 있었다. 어릴 적 추억 속 교실 안 풍경과 많이 닮은 모습에 자꾸 웃음이 났다. 아이들과 집에서도 이렇게 악기 연주하며 노래 불러보라고 권하시는 H 선생님..

혹시 악기 연주하는 이가 있으면 다음 시간에 들고 와 같이 연주하며 노래 부르자 하셨다.

'음.. 선생님 ~ 그런데 여기 영어 교실 맞죠?'




이 나이가 되도록 영어 공부가 절실한 삶을 살진 정말 몰랐다. 학창 시절에도 '영어'는 그다지 좋아하는 과목이 아니었고 늘 어렵게 느껴지는 조금은 두려운 존재였다.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한 시절도 있었지만, 세 아이 낳고 육아하는 동안에는 아이들에게 틀어주던 영어 동요를 같이 따라 부르는 정도만 접할 수 있었다.


그랬는데..

갑작스러운 남편의 발령으로 눈 떠보니 싱가포르.. 어쩌겠는가..

학교에서 영어로 공부하려니 난감했을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타향살이에서 언어는 부모 입장인 내게도 너무 중요한 필수요소였다.


학교에서 나오는 수많은 안내문들..

언제 무슨 행사가 있다거나, 어떤 준비물을 챙겨 오라는 등의 일정도 잘 챙겨야 하고..

학부모들 간의 대화에도 껴야 하고..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집주인에게 문제 제기도 할 줄 알아야 하고..

식구 중 누가 아프면 병원 가서 증상도 설명해야 하고..

기본 생활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영어 실력은 필수였다.


버벅거려도 여러 해 살면서 경험하다 보니 자주 쓰는 표현은 익숙해졌지만..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어 갈수록 선생님들과의 상담 시간 때, 자유롭게 대화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답답했다. 가뜩이나 공부하고 있는 과정도 모르겠고 다가올 시험도 다 생소한데 언어까지 부족하니 매번 아이가 가운데서 대신 말해 줄수도 없고..


게다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나라니.. 영어를 말하는 사람마다 자신의 고유한 악센트로 발음했고 그러니 아는 것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살수록 정말 영어 공부가 더 절실해졌다.


여기 올 줄 알았다면 미리미리 영어 공부하고 준비해서 왔으려나..

(찔리지만, 알았다고 다르진 않았을 거 같다.)

가서 영어 공부하면 되지 싶었지만 막상 와보니.. 워낙에 물가 비싼 싱가포르라 기본적으로 숨만 쉬고 살아도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 이곳에서 나를 위한 투자는 욕심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무료로 영어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여성을 위한 평일 오전 무료 영어교실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싱가포르 한 교회에서 하는 영어 교실인데 많은 분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해서 영어를 가르쳐 주는 곳이었다. 여러 다양한 나라에서 온, 같은 입장인 친구들도 만날 수 있고 무엇보다 무료로 영어를 배울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곳인가..


한동안 열심히 다니다가 코로나 팬데믹 시기 동안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가지 못했다. 그러다 올해 다시 용기 내서 영어 교실 문을 두드렸다. 지원자가 많아 모든 강좌에 인원이 가득 차서 좀 기다려야 했지만 운 좋게 연락이 왔고 그렇게 H 선생님 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하는 도전이라 설레기도 하고 조금은 긴장해서 들어간 교실..

그곳에서 노래부터 부르자는 선생님을 만났다. 예전 선생님들과 다른 수업 방식이라 더 당황스러웠다.




오랜만에 불러보는 노래에 서로 쳐다보며 유쾌하게 웃으면서도 노래 부르기에 진심이신 선생님 모습에 조금 의아하던 찰나..

H 선생님은 자신의 삶에 대해 들려주셨다. 그 속에 노래부터 부르자 하신 이유가 들어 있었다.


말레이시아 페낭이라는 섬에서 태어났다는 H 선생님.. 아버지는 중국에서 넘어오신 분이었는데 상처하시고 세 아이를 데리고 페낭에 와서, H 선생님 어머니와 다시 결혼하셔서 다섯 아이를 더 낳으셨단다. 그렇게 형제자매가 여덟 명인 집에서 자란 그녀는 교회에서 본 피아노가 너무 좋았고 자주 교회에 가서 피아노 연습을 하며 자랐단다.


그러다 정말 운 좋게 피아노 덕분에 미국 유학까지 가게 되었단다. 그 옛날옛적에..

영어를 정말 못해서 학생 때 영어 성적도 별로였는데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영어가 많이 늘었단다.

그 이후 지금까지 피아노를 가르치며 살고 있고 자신이 받은 걸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고 싶어서 이 교회에서 20년째 영어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하고 계신다고 했다.

노래부터 부르자 하신 건 그녀가 음악을 사랑하는 "피아노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음악이 주는 행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셨을까..


'뜬금없이 영어 수업 시간에 웬 악보에 노래?' 싶었지만..

피아노 선생님인 그녀 덕분에 우리 반 친구들은 합창단 수준으로 매번 노래를 부르며 영어 수업을 시작하고 있다. 왠지 긴장되고 쑥스러워 쭈뼛거리던 내게 노래와 함께 시작하는 영어 수업은 새로운 도전으로 긴장되어 있던 마음을 녹여주는 거 같아 H 선생님이 많이 고마웠다.




어느 날엔 수업 후에 모두를 위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나눠 주셨다.

지난 설에 선물 받은 플로스( floss )가 너무 많아서 그걸 이용해 샌드위치를 만들었다며 모두와 나눠 먹으려고 싸 오셨단다.

'플로스 ( floss )를 넣은 샌드위치라고?'

그걸 위에 얹은 빵은 유명해서 먹어봤지만 샌드위치 속에 넣는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어서 대체 어떤 맛일지 의아했다.


H 선생님은 궁금한 이 샌드위치의 레시피도 친절히 설명해 주셨다. 맛 좋은 버터를 잘 펴 바르고 그 위에 플로스 ( floss )만 얹어주면 끝이라고 했다.

'그렇게 간단하다고요?'

들으니 맛이 더 궁금해졌다.

그것만으로 맛있는 샌드위치가 된다며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도 만들어주라고 하셨다. 대체 어떤 맛일까?


참고로 플로스 ( floss )는 일반적으로 돼지고기를 간장, 설탕, 향신료를 섞어 고기가 부드러워지고 쉽고 가늘게 찢을 수 있을 때까지 끓인다. 그런 다음 푹신푹신해질 때까지 냄비에 돼지고기를 볶아 만든다고 한다.

돼지고기 외에 쇠고기, 닭고기, 어류 등으로도 만든다고 한다.

(플로스 floss, 사진출처 : Chinasichuanfood.com)


귀여운 귤까지 함께 챙겨 준 H 선생님의 샌드위치.

가만히 속을 열어보니 이런 모습이었다. 그녀 말대로 정말 간단한 레시피구나 싶었다.


( H 선생님의 floss 샌드위치, photo by 서소시 )


큰 기대 없이 한 입 베어 물었다가.. 깜짝 놀라 말을 잃었다.

'우와 ~~ 이 간단한 조합으로 이런 맛이 난다고?'

생각보다 맛있어서 먹을수록 놀라워하며 정말 맛있게 먹었다. 단짠단짠한 맛에 쫄깃한 식감.. 색다른 조합의 맛이 신기했다.

(상상이 되시나요?)


다정한 이웃집 할머니 같은 귀여우신 H 선생님 덕분에 늘 부담스럽던 영어 교실 가는 날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무료 수업임에도 너무 열심히 가르쳐 주셔서 그녀의 열정에 못 미치는 게 죄송할 정도다.

감사한 마음으로 보답하고 싶어서 영어 수업 가면 더 열심히 노래를 부른다.

" 도레미레도 ~~ 도미솔미도 ~~ "





* 싱가포르 무료 영어 교실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정보를 남겨봅니다.

ㅡ International Baptist Church

(IBC Singapore)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