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모두 GOOD이고 EXCELLENT 야?

(싱가포르 국제학교)

by 서소시

생일이 빠른 첫째는 또래보다 키가 많이 컸다. 태도도 조용하고 얌전해서 모두들 아이가 또래보다 빠를 거라고 했지만 태몽도 거북이인 느린 아이였다. 몇 번의 유산으로 세 아이의 엄마가 될 거란 상상도 못 해 봤는데 제주에서의 삶이 우리에겐 축복이었던지 바라던 동생이 그것도 둘이나 생겼다. 터울 큰 어린 동생들이 연달아 둘이나 생기면서 갑자기 더 언니답길 요구받는 것도 슬픈데, 오름으로 바닷가로 자연에서 뛰어놀다가 갑자기 육지로 이사 가야 한다고 했을 때 첫째는 많이 슬퍼했었다.


그렇게 이사 와서 처음 입학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는 너무 이방인이었다.

조용한 아이가 한마디 하면 아이들은 다시 말해 보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 들어본 제주 방언이 신기해서 그런 거였지만 부끄럼 많은 아이에겐 목소리 내기가 참 어려운 일이었을 게다. 게다가 아이들은 유치원 친구, 같은 아파트 친구, 같은 교회 친구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친한 상태였고, 갓 태어난 막내에 세 살배기 둘째를 챙기느라 바쁜 엄마는 큰 의지가 되어 주지 못했다. 아이들과 함께 놀게 해주고 싶은데 하교할 때 보면 놀이터에서 노는 친구도 없고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을 다닌다고 했다.


그래서 첫째를 데리고 학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처음 찾아간 영어 학원에서부터 나는 이상한 나라의 한심한 엄마였다. 처음 시작하는 초급반을 문의하자 초등학교 1학년에 초급반은 없다고 했다. 이미 유치원 때부터 시작해서, 그런 반을 원하면 적어도 네명의 인원을 모아 오면 개설 가능하다고 했다.

"초등학교 1학년인데 시작반이 없다고요?"

놀라는 내게 돌아온 시선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엄마구나 하는 눈빛이었다.

(돌아보니 첫째 때 이미 미리 준비시키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면서 막내까지 참 꾸준하게 똑같은 시행착오를 겪게 했나 보다.)


그래서 같은 반 엄마들에게 어떤 학원을 보내는지 물어봤다. 같은 학원을 다니면 자주 얼굴 보고 더 친해질 기회가 생길 거라 기대하면서.. 그렇게 소개받아 피아노 학원도 등록하고 동화책으로 영어 배우는 수업도 친구들과 함께 듣게 되었다. 친구들과 친해지면 잘 적응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몇 달 지나 피아노 선생님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하셨다. 태도도 너무 좋고 차분한데 자꾸 틀리고 집중을 못한다고 하셨다. 아이를 꼭 안아주며 물어봤다. 피아노 배울 때 어떤 마음이냐고.. 아이의 대답은 너무 뜻밖이었다.

'엄마랑 동생들은 집에서 뭐 하고 있을까? 어떤 놀이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빨리 치고 집에 가고 싶어서 자꾸 틀리는 것 같다고..


문득 친구랑 같이 다니면 친해지고 좋아할 거란 생각 이면에,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학원을 가고 공부를 시작해야 할 때라고 너무 당연하게 여긴 내 마음을 발견했고 이게 아이를 진정 위하는 걸까 싶었다. 안고 있던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키만 컸지 아직 너무 아이였다. 얼마 전까지 제주의 자연에서 뛰어놀던 아이인데 도시에 왔다고 초등학생이 되었다고 너무 달라진 생활이었나 보다. 아이의 마음은 못 헤아렸구나 싶었다.


그즈음 제주도가 나오는 TV 화면 앞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봤다. 정말 쿵 하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어른인 나도 고향보다 더 그립고 다시 가고 싶은 제주인데.. 돌쟁이 때 내려가서 7살에 올라올 때까지 유년기의 모든 기억이 제주인 아이에게 지금 이 도시 생활이 얼마나 적응하기 힘들었을까 반성이 됐다.


살면서 즐거움을 표현하고 위로가 되어줄 악기 한 가지.. 건강하게 내 몸을 지킬 운동 한 가지는 배울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우리 아이에게 피아노가 맞는 악기는 아닐 수 있는데 왜 당연히 지금 배워야 한다 생각했을까? 아이가 어느 순간 이 악기 소리가 너무 좋아요 하며 배우고 싶다 하는 그때 배워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학원을 다 끊고 아이와 이야기했다. 언제고 네가 배우고 싶을 때 그때 다시 도전해 보자고... 큰아이와의 이 약속은 세 아이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학원보다는 아이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룡 만나러 고성으로 해남으로 떠나는 시간을 더 갖게 되었다.

봄 냄새 맡으러 가고, 가을 색깔 찾으러 다니고.. 잠자리에 들기 전 불 끄고 나란히 누워 옛날이야기, 엄마 어릴 적 이야기, 뉴스에 난 기사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지냈다.


몇 년 후 아이는 오카리나 소리가 아름답다고 배우고 싶다고 했고 다시 악기와 친해지게 되었다. 바이올린에도 도전하게 되었고 우쿨렐레도 배웠다. 배우고 싶어 도전했기에 더 즐겁게 배울 수 있었다.




영어도 배우고 싶어 하지 않아, 배우고 싶어질 때를 기다려보자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결정된 싱가포르로의 이사!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많이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국제학교로 도전하는 게 맞을까 많이 고민했지만 어쩌면 이 기회로 영어 공부가 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부끄럼 많고 겁도 많은 첫째는 매번 익숙하던 곳에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경험으로 인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경험이 많았기에 좀 더 움츠러들었다. 나이도 많은 데 가서 아이들이 말도 못 한다고 놀리면 어떡하냐고.. 사춘기는 만국 공통일 텐데..

영어권에서 온 친구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 중엔 너와 같은 시간을 보낸 아이들이 있을 테니 그 마음을 알거라 다독이며 한 걸음씩 가보자 응원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밤새 잘 못 잔 아이는 통통 부은 얼굴로 등교를 했고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려 애썼다. 내내 초긴장 상태였던 아이가 어느 날 너무 신기하다며 이야기했다.

오늘 역사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숙제 발표를 했는데, 숙제가 다 너무 달라 신기했다고.. 큰아이는 영어가 부족하니 한국에서부터 자주 사용하던 마인드맵을 이용해서 숙제를 해 갔는데, 어떤 아이는 정말 몇 장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장문의 글을 써 온 아이도 있고, 어떤 아이는 시대별 특징을 그림으로 여러 장 그려와 발표했다고.. 그래프를 그려온 아이도 있고.. 이게 같은 숙제를 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양했단다.


어느 날은 과학 숙제를 들고 왔는데, 도어벨 회로도 그림 한 장이었다. 벨이 고장 났다면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인지 적고 그 이유를 적으라는 문제였다. 수업시간에 이런 회로도에 대한 부분을 배우고 있냐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교과서가 없어서 어떤 부분을 배우고 있나 궁금했는데, 배운 부분을 확인하기 위한 숙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원리를 찾아보고 탐구하는 숙제였다.


다음날 첫째는 아이들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주장하며 토론했다고, 저건 아닌 거 같은데 싶은 아이도 자기주장을 열심히 하는 모습에 그저 신기했단다. 정확한 정답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자기 생각을 펼치는지 보면서 아이는 신선하게 느꼈고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가자마자 생일이 빨라 중학교 (Secondary) 과정을 하게 된 아이는 영어를 못해서.. 어쩌면 그래서 까칠한 사춘기 아이들 속에서 더 무난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분명 쌀쌀맞은 태도를 보이거나 뭐라고 분위기상 안 친절한 말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니 ‘What?’ 하고 넘길 수 있었다고 했다. 나쁜 말은 제일 먼저 배운다고 아이도 어쩌면 알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냥 모르는 척 넘기며 버티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다른 학년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인 줄 알고 긴장해서 체하고 집에 와 운 적도 있었다.


한국에선 글쓰기를 좋아해 글짓기 대회에서 상도 받고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걸 즐기는 아이였는데, 중학생이니 써야 하는 에세이 주제는 어려워졌는데 쓰고 싶은 만큼 써내지 못하니 그 좋아하던 글쓰기가 제일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이미 아는 내용들인데도 영어로 다 바꾸어 공부해야 하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선생님들은 우리나라 언어로 되어 있는 책을 읽고 내용을 이해한 다음에 영어로 된 책을 읽으라고 조언해 주셨지만, 교과서도 없을뿐더러 그냥 암기를 해서 따라갈 수 있는 수업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 속에서 아이가 받아온 중간 성적표..

교과목마다 성적이 몇 점하고 표시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학습능력, 수업 태도, 노력도 등에 대해 평가가 되어 있었다. 대부분 Good이고 Excellent 였다.

'왜 다 Good이지? 영어가 그새 늘었나? 부족해도 노력을 더 많이 봐주시는 건가?' 싶었는데.. 이런 평가 방법을 이해한 것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학기 초 전 학년에 배운 내용을 시험 치고, 그 점수를 기준 삼아 올해 아이가 그 점수보다 1점이라도 올랐다면 Excellent 하고 평가하는 것. 아이들마다의 기준에서 과정을 평가하는 방식이라 영어 실력이 부족한 아이에겐 칭찬 일색의 성적표가 위로가 되었다. 그 위로로 아이는 한 걸음씩 내디딜 수 있었고 적응해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부모 상담 (Parents Consultation) 시간에 만난 각 과목별 선생님들은 아이의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드라마 시간에 아이가 쓴 대사가 매우 창의적이었다, 노력해 온 숙제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사랑스러운 아이다, 그녀를 가르치는 게 기쁨이다, 틀리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틀려야 는다 등등 작은 부분까지 기억해 응원과 격려를 해주셨다. 얼마나 고마운 평가인가.. 적응하느라 애쓴 아이에게 더없이 큰 선물이었다.




아이는 좋아하는 오카리나로 학교 오케스트라 팀이 되었다.

'오카리나를 끼워줬다고?'

참여하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받아주신 건지..

얼마 지나 《 A Celebration of the Arts 》라는 음악, 댄스, 드라마 등을 공연하는 작은 행사가 있었는데, 스타워즈 (Star Wars) 테마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팀에 홀로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아이가 보였다.


아이들의 공연은 완벽하게 준비된 무대가 아니라 어설프고 실수투성이의 귀여운 무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무대를 즐기고 도전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더 큰 박수를 보내고 함께 웃으며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케스트라 팀 안에서도 너무 틔는 아이였는데 그 시선을 두려워않고 좋아하는 악기로 함께 공연을 즐길 수 있게 된 아이의 도전에, 그 성장에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다.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그 시작이 남들보다 늦더라도..

새로운 시작이 두렵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 보면 그곳이 어디든 닿아 있을 테니..

나아가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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