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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소시 Mar 27. 2022

“다 불태울 거야. 말릴 사람 알려줘.”

(국제학교 엄마들의 자녀 사랑법)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어가 많이 부족한 상태로 싱가포르에 오게 된 첫째..

‘이 시기의 아이를 영어도 잘 못하는데 싱가포르로 데려가는 게 잘하는 걸까?’

‘사춘기야 전 세계가 다 똑같을 텐데.. 아이가 잘 적응해줄까? “


그런 걱정으로 우린 규모가 크지 않은 국제학교에 지원했다. 중학교 (SECONDARY) 과정보다 초등학교 (PRIMARY) 과정이 더 인기 있는 학교였다.


와서 경험해 보니 국제학교 학부모들도 중학교 과정부터는 대부분 앞으로의 입시를 고려해서, 입시 경험이 많은 학교나 좀 더 유명하고 입시 성적이 좋은 학교로 옮겨가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많은 친구들이 다른 국제학교로 옮겨갔고, 덕분에 중학교 (SECONDARY) 고학년으로 갈수록 첫째 학교엔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 아이에겐 오히려 나은 기회라 생각했다.


(국제학교의 단점 중 한 가지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갑자기 떠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양한 나라에서 온 아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나라로, 다른 나라로, 다른 학교로 떠나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잘 지내던 친구와 헤어지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됐다. 사실 늘 우리만 익숙하던 곳에서 멀리 떠나왔는데.. 반대로 친하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경험도 싱가포르에서 처음 해 보게 되었다. 남겨지는 쪽도 많이 서운하고 외롭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학생 수가 작아졌다지만 그럼에도 친구들은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왔다.

한국인은 우리 아이가 유일했고,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랑스,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일본, 영국, 대만, 홍콩, 캐나다, 아일랜드, 러시아 등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오히려 인원수가 작아서 그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며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들이 자녀를 사랑하는 방법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학년 말, 1년 간 함께 공부한 친구들에게 한해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해준 S네 엄마 K.

“뭐 대단한 파티를 해 줄 건 아니고 그냥 아이들 놀 공간 제공 정도야.”

하교하고 바로 반 아이들은 S네 집으로 몰려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K에게서 단체 문자가 왔다.

지금 아이들이 다 불태울 거야. 말릴 사람 있으면 얼른 알려줘.”

‘대체 뭘 태운다는 거지?’

 다시 읽어 보니.. 노트를 찢어서 태우고 있다고 했다.

노트?’


교과서가 따로 없는 국제학교는 선생님의 수업 내용을 필기한 노트나 워크시트로 공부하는데, 마당에서 마시멜로 구워 먹을 거라 지금 그 노트를 태우겠다는 거였다.


‘엥? 엄마가 안 말리고 노트 태우겠다고 안내를 보낸다고?’

한 해 동안 공부한 기록인데 그걸 태우면 어쩌나 싶어 살짝 놀란 마음이었다.


잠시 후 K가 보내온 사진을 보니 그저 웃음이 났다.

아이들은 마당 잔디에 아무렇지 않게 둘러앉아서, 막대로 낀 마시멜로를 하나씩 들고 맛나게들 먹고 있었다. 얼굴이며 팔에 검댕이를 잔뜩 묻히고서.. 활활 타는 노트들도 살짝 보였다.


다음 순간.. 다른 학부모들은 

우와~ 재밌겠다!”, “ 맛있겠다! 나도 가고 싶다.”며 열띤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막는 이가 없었다.


순간 아이들의 노력을 태우면 어째 하고 맘 졸인 내가 그녀들과 너무 다르구나 싶었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려면 뭔가 음식도 준비해야 할 거 같고, 앉을 공간이나 할 거리 같은 많은걸 고민부터 하는 내게 이런 자유로움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중에 집에 온 첫째는 나만큼 놀라워하면서도 상당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고 했다.

자긴 어렵게 필기한 노트가 아까워 동참하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정말 신나 하며 노트를 찢었고 그렇게 구워 먹은 마시멜로는 너무 맛있었다고 했다. 모든 노트를 찢은 건 아니고 내년에 듣지 않는 과목이나 너무 싫어하는 과목부터 찢었다고 했다. 누구 아이디어니 물었더니, S가 우리 노트 찢어 마시멜로 구워 먹을까 제안했고, 아이들이 그래 하자 그렇게 즉흥적으로 된 일이라고 했다. 그녀의 엄마 K가 어디선가 커다란 통을 가져와 준비해줬다고..

아이도 나도 한참 동안은 마시멜로를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거 같다.


저마다 공부한다고 스트레스 받았을 사춘기 아이들을 위해 이런 방식으로 애썼다 응원을 하고 스트레스 해소도 시켜 주는구나 싶었다. 학기 끝난 노트 좀 찢어 맛난 거 구워 먹는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혼자 이게 무슨 일이야 놀란 토끼가 되다니.. 내가 너무 고지식한 엄마구나 싶었고, 이런 추억을 만들어준 K에게 참 고마웠다.




그 뒤로도 매해 한해 과정이 끝날 때마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어느 해에는 아예 “WORLD AWARD” 행사를 열고 서로에게 어울리는 상을 시상하는 자리를 가졌다. 미리 아이들 스스로 만든 설문지를 나눠주고 아이들이 생각하는 서로에 대한 이미지로 투표해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아이에게 엄마들이 시상하는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상이 발표되면 친구들의 환호 속에 앞으로 나와서 엄마들이 준비해준 초콜릿 선물을 받았다.


“나중에 나라를 위해 일할 사람”,

“나중에 이성에게 가장 인기가 많을 사람”,

“나중에 TV에 많이 나올 사람”,

“먼 미래에 TV 광고를 찍을 사람”..

이렇게 받으면 기분 좋은 상도 있었고..


“먼 미래에 가장 많이 외형이 바뀌어 있을 사람”,

“나중에 은행을 털 것 같은 사람”,

“먼 미래에 가장 안 씻을 거 같은 사람”

사춘기 아이들답게 이런 짓궂은 상도 있었다.


인기 많은 아이들이 오히려 짓궂은 상을 받았고 조용한 아이들이 받으면 기분 좋은 상을 주로 받았던 걸 보면 아이들이 서로를 배려한 부분도 있었던 거 같다.

 

아이들의 짓궂음도 추억이 될 수 있게 자릴 만들어 함께 준비해주는 엄마들의 적극성에 고맙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사춘기 고학년 아이들인데.. 게다가 소심한 난 짓궂은 질문은 빼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아이들에게 설득할거 같은데.. 아이들 스스로 만든 추억거리를 그대로 지지해주고 함께 즐기는 마음이라니.. 덕분에 아이도 나도 오래오래 기억할 추억이 많아졌다.




또 어느 날인가는 M의 엄마 E가 급하게 단체 문자를 보내왔다.

우리 딸 M이 하고 싶은 CCA가 있는데 3명밖에 신청 안 해서 폐강 위기야. 누가 같이 할 사람 는지 물어봐줄래?”

“활동적인 M이 하려는 CCA가 대체 뭐야?” 하는 내 질문에 아이의 대답은 랬다.

그 스포츠 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왜 강아지가 막 원반 잡으러 뛰어다니는 거 같은 경긴데 사람이 하는 거예요.” 아이의 표현에 웃음이 났다. 


대체 무슨 경기일까 궁금해서 같이 찾아보니 얼티밋 프리즈비(ULTIMATE FRISBEE)라는 경기였다. 그냥 원반을 던지고 잡는 게 아니라, 럭비와 비슷한 스포츠로 럭비공 대신 원반을 이용해서 패스하고 득점하는 경기였다. 영상을 찾아보니 많이 뛰어다녀야 하는 경기였다.


PE시간에 한 번씩 했다는데.. 아.. 매일 낮 기온이 34도, 35도까지 올라가는 무더운 싱가포르에서 원반 잡으러 달리는 경기라니..


잠시 뒤, “우리 집 OO이가 같이 할 거야.”,“이 경기하려면 인원이 많아야지. 우리 애도 조인할게.” 엄마들의 답 문자가 이어졌다.

우리 아이의 대답은 “굳이~~ 이 더위에~~”.


아이가 좋아하는 운동을 할 수 있게 같이 할 친구들을 찾아주려 애쓰는 엄마의 사랑은 똑같구나 싶었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함께할 수 있게 도움주는 마음들이 모여 M은 이 CCA를 신나게 할 수 있었다. 우리 아이가 운동 좋아하는 적극적인 성향이었다면 함께 동참했으면 좋았을텐데 싶다가도, 그러다 이 더운 나라에서 열사병으로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이 더 앞서고 말았다.  지지하기 보다 걱정이 앞서는 나와 침 많이 다른 그녀들..


세상 어디를 가도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겠지 싶다. 그리고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으리라..

다만 그녀들이 자녀에게 보내는 지지와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자세는 닮고 싶은 점이 많았다. 


“이것보다 저런 게 더 낫지 않을까?”, “이럴 땐 이런 게 더 나은 거 같아.”하며, 세상을 좀 더 경험해 봤다고 이왕이면 더 잘하고 더 좋은 결과를 얻길 바라며 다른 길을 제시하고 보는 내 모습과 비교돼서.. 종종 나를 돌아보곤 했다.


위험한 일만 아니라면 아이들의 선택에 대한 지지를 먼저 보내는 그녀들.. 작지만 큰 차이인거 같다.  그 응원의 힘으로 아이들은 어떤 선택 앞에서도 자신을 믿고 좀 더 용감할 수 있으리라.











< Daum에 실린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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