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애들 영어 공부를 미리 좀 시키는 게 좋을 거 같아.”
뜬금없는 남편의 이야기..
“에이~~ 설마..” 하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결혼 초..
“제주도 어때? 가서 살면 좋겠지?”
“제주도?”
그동안 몇 번 여행으로 가본 제주는 너무도 아름답고 그림 같은 곳이었다.
결혼하고 남편 따라 아무 연고 없는 경기도로 와서 첫아이를 낳고, 겨우 마음 나눌 지인이 생겨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었는데 제주도라니.. 괜히 해보는 말이지 싶었는데, 남편은 그 다음주에 제주도 발령이 나서 먼저 떠나야 했고, 난 갓 돌이 지난 첫아이를 안고 홀로 제주도로 이사를 가야 했다.
지금은 꿈에도 그리운 고향 같은 곳이지만, 우리나라인 제주로의 이사와 그곳에서의 적응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즘이야 제주 한달살이 열풍 등으로 육지 사람이 제주에서 살아가기가 편리해졌지만.. 십수 년 전엔 집을 구할래도 부동산이 아니라 ‘오일장’ 지역신문을 보고 직접 전화해 찾아야 하던 시절이었으니.. 제주의 신구간 문화도 몰랐던 우린 왜 집이 이리 없나 고전했고, 1년 치 월세를 한 번에 내는 연세 문화에 놀라는 등 시행착오는 늘 따라다녔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곳에 떨어진 우린, 그곳에서 마음 나눌 제주 지인을 만나고 나서야 함께 추억을 만들며 관광지가 아닌 진짜 제주를 알아갈 수 았었다. 덕분에 제주의 숨은 매력을 경험할 수 있었다. 오름으로 소풍 다니고 한라산 자락에서 공짜 눈썰매를 타면서 행복했던 6년간의 제주 생활 동안 우린 셋에서 다섯 가족이 되었고, 막내 임신 중 막달에 또 한 번 남편의 갑작스러운 발령으로 육지로 이사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어 공부를 시키라니.. 남편의 이야기를 더 믿기 어려웠던 건 다음 발령 예상 지역이 싱가포르였기 때문이다. 해외로의 발령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고, 나 역시 내 일을 재미있게 하고 있던 시기라 하던 일을 다 포기하고 낯선 나라로, 그것도 영어 못하는 세 아이를 데리고 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고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불안함은 현실이 되었다. 얼마 뒤 남편은 발령으로 먼저 출발해야 했고, 홀로 세 아이와 부랴부랴 이사 준비를 해야 했다. 막 초등 6학년, 초등 2학년 그리고 7살이 된 세 아이.. 영어를 좋아하지도 않고 그동안 열심히 공부해 본 적도 없던 세 아이를 데리고 낯선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참 막막했다.
먼저 간 남편이 급하게 살 집을 구하긴 했지만 아이들의 학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싱가포르로 오면서 학교 선택이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제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관광지 이면의 진짜 제주를 알 수 있었던 건 그곳에 사는 제주도 지인분의 도움이 컸다.
싱가포르 역시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나라기에 진짜 싱가포르를 알려면 그들과 함께 배울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경험이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진짜 싱가포르 경험하기!’
그런데 우리가 싱가포르에 오기 바로 직전에, 싱가포르 법이 바뀌어서 모든 외국인이 로컬 학교에서 공부하려면 AEIS (Admissions Exercise for International Students)라는 시험을 쳐야 하고 합격자에 한해 입학이 가능하게 되었다. 단 초등학교 1학년 입학은 결과를 보장해 주진 않지만 지원은 가능하다고 했다. 세 아이 모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 본 적 없었기에 어려운 시험을 당장 칠 수 없었고 로컬 학교로 바로 입학은 불가능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맞는 학교를 찾아야 했다.
그럼에도 ‘진짜 싱가포르 경험하기’란 작은 목표를 위해 도전을 해 보고 싶었다.
국제학교에서 먼저 적응하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로컬 학교로 도전해 보자 방향을 잡았다.
유치원생인 막내는 이곳저곳 발품을 팔아 로컬 유치원에 입학시키고 다른 두 아이를 위한 학교를 알아봤다. 몇몇 국제학교에는 영어를 못해도 입학이 가능한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반이 있었지만, 정말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던 우리 아이들을 위해선 작은 규모의 학교를 보내는 게 맞다는 판단이었다.
수소문 끝에 규모는 작지만 평가가 뛰어난 학교에 이메일을 보내 우리 아이들의 입학을 신청하고 싶다고 문의했다. '영어 실력은 부족하지만 성실하고 착한 아이들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그런데 며칠을 기다려 받은 학교의 답변에 충격을 받았다. 이 곳은 영어 학원(Language Center)이 아니라 영어로 공부하는 학교(School)다. 너희 아이들의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면 6개월간 영어 학원에 가서 실력을 키워 다시 지원하라는 안내였다. 분명 ESL 반이 있는 학교였고 많은 분이 좋은 학교라고 추천해 준 곳이었는데, 아이를 만나 보지도 않고 저렇게 답을 보내다니..
그때 알았다.
학교를 알아보며 어마 무시한 국제학교 학비에 놀라면서도 내가 원하는 학교를 골라 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한참 오답이었다. 준비되지 않으면 아예 입학시험조차 볼 수 없다는 걸..
그냥 겁먹고 포기하긴 싫었다. 아이들을 위해 지금 당장은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부딪히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적응하는 모습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다시 다른 학교의 문을 두드렸고 그렇게 아이들은 너무나 입고 싶어 하던 교복을 입고 등교할 수 있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로컬 학교, 국제학교 모두 교복을 입고 등교한다. 막내가 교복을 입고 유치원 가는 걸 무척 부러워하던 아이들이었다.)
시작은 어려웠지만 한 발씩 가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겠지 토닥이며 그 어려운 첫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