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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소시 May 04. 2022

제주 바다만 바라보고 싶어요

'행복한 추억'이란 치료제

그런 곳이 있다.

힘들고 지칠 때 그냥 그곳에 가서..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  그저 멍하니 있어도 좋을 거 같은 곳..


지친 내 몸과 마음이 무엇도 할 힘이 없을 만큼 지쳐 있을 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을 때..

왠지 그곳에서라면.. 그냥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날 거 같은..

생각하면 괜히 눈물 나고.. 마음속 무언가가 몽글몽글해지는..

걱정 없고 덜 힘들었던 그때의 작고 어린 나를 만날 수 있을 거 같은 곳..


우리 아이에겐 제주가 그랬다.

힘든 고비마다 첫째는..

그저 제주에 가서 우리가 어릴 때 자주 갔었던 한적한 그 바다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고 싶다고 했다.



"제주? 가면 좋지. 엄마도 너무 가고 싶다!"   

우리에겐 고향 같은 곳.. 제주!

첫째가 돌 지나 내려간 제주에서 7살 무렵 육지로 이사 나왔기에 아이에게 행복한 유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아이와 함께 날마다 걸었던 집 앞 길가..

하나만 손에 쥐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했던 스티커 팔던 조그마한 문구점, 아이를 즐겁게 해 줬던 디즈니 공주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비디오 가게, 바람이 불면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보리밭, 제주의 돌담길, 유치원 버스가 지나가던 한적한 도로.. 그 풍경이 지금도 눈앞에 그려진다. 살면서는 참 심심한 풍경이었는데..

눈물 나게 그리운 고마웠던 지인분들과 추억 가득한 음식들..

모든 게 한 세트처럼 '제주'란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데..

 

아이는 그냥 그 바다 앞에 앉아 있고 싶다고만 했다..

'생각보다 더 지치고 힘들구나..'

곧 있을 중요한 시험이 많이 부담되는 모양이다.


"왜 꼭 제주 바다야? 여기도 예쁜 바다 있는데.."

(사실 싱가포르 바다엔 컨테이너선이 많아서 아름다운 뷰를 만나긴 좀 어렵다.)

"그러게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제주 바다에 가서 바다 보고 앉아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바다 색깔도.. 바람도.. 파도도 다 좋을 테니.. 그저 그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을 거 같아요."

아이에겐 제주가 마음의 고향.. 그 이상이 되었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제주로 출장을 가야 한다고 했다. 제주를 간다고?

2박 3일 짧은 일정이었지만..  앞뒤 생각할 새 없이 그냥 지금 따라가야 한다 싶었다.  

급하게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짧아도 제주 갈 생각에 너무 신나 있었는데..


사람 일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고..

하필 그 시기에 학교를 다녀온 막내가 머리가 어지럽고 힘들다고 했다.

피곤해서인가 했는데 열이 심상치 않게 나더니, 세상에나 이 더운 싱가포르에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그냥 감기도 아니고 독감이라니.. 이 나라에서 독감에 걸려 고생할 줄은 상상을 못 했다.

막내는 정말 심하게 열이 나고 아팠다. 할 수 없이 모든 일정은 다 취소했다.

첫째의 실망은 말할 수 없이 컸고 제주 간다고 기뻐했던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이가 너무 심하게 아프니 남편도 출장을 연기했는데, 한차례 연기했던 출장을 꼭 가야 할 상황이었고 다른 곳은 몰라도 제주는 꼭 따라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첫째에게 제주 바다를 꼭 보여주고 싶었다.

제주가 고향인 둘째는 자기 고향이 궁금하다고 했고, 회복한 막내에게도 제주의 귀한 음식을 먹이면 좋을 거 같았다. 그렇게 어렵게 다시 표를 끊었고 그리운 제주를 향해 떠날 수 있었다.  


못 올뻔했는데 어렵게 도착한 제주.. 눈물이 났다..

그리운 풍경이 있고 고마운 사람이 있고..

눈에 익은 제주 공항의 모습만으로도 고향에 온 듯 너무 행복했다.

6년을 살았고 오래 떠나 있었기에 많이 변한 모습이 조금은 낯설고 안타까웠지만..

아이가 보고파하던 애월 ~하귀 순환도로를 따라 그 바다를 향해 가면서 그리웠던 풍경을 만나니 그저 설레기만 했다.


아이는 그리웠던 그 바다 앞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그 바다에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좋아?"

"응. 좋아!"

제주 바다 앞에서 우린 한동안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았다.


"너 제주에서 유치원 다닐 때 영어로 노래하고 놀이하는 수업 있었는데.. 너 혼자 영어 공부하기 싫다고 했던 거 기억나? 다른 이모들이 영어 공부해야 외국 여행 가면 음식도 주문할 수 있고 훨씬 더 좋다고 했던 거.."

"기억나.. 나 그때 전 외국 여행 안 갈 건데요. 우리나라에서 살 건데요. 그랬지."

참 알 수 없는 게 인생인가 보다.. 그랬던 아이가 외국에서 영어로 공부하느라 힘들어하고 있으니..

우리가 싱가포르에 와서 공부하게 될지 정말 누가 알았을까?  


제주가 고향인 둘째가 태어난 산부인과도 지나가 보고 우리가 살았던 동네도 한 바퀴 돌아보고..

유치원 버스 지나다니던 길도 따라가 보고..

너무 많이 변한 모습에 우와~하며 신기해하기도 하고, 저긴 똑같다 하며 변함없는 모습에 반가워도 했다.


둘째 돌잔치를 했었던 아라동을 지나며..

제주에서 태어났으니 제주를 기억하는 이름을 짓자던 남편이 고른 예쁜 이름 아라..

"당신 성이 뭔지 알지? 박씨거든. "하고 놀랐던 기억.. 하필 성씨가 '박'이라 물 건너간 이름이지만 '아라'라는 이름이 얼마나 예쁘냐며 아이들과 웃기도 했다.


내게는 "제주는 언니!" 하고 한 세트로 떠오르는 고마운 지인 언니도 퇴근하자마자 보러 달려와 주었다.

돌쟁이 아이들 안고 만났었는데 아이들이 이만큼 클 동안에도 언제나 고맙고 따뜻한 정을 나눠주고 있는 고마운 언니.. 먹고 싶을까 봐 들고 왔다며 제주 귤을 들고서..


제주 귤을 보니 눈가가 더워졌다. 언니 덕에 제주 살 때 귤을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귤을 담아주는 노란색 컨테이너도 언니 덕에 알았고 가족분들 드시려고 약 안 주고 키우는 귤을 언제든 와서 따가라 해주셨던 고마운 언니 부모님 덕분에 매해 귤이 넘쳐났었다.


외롭고 낯선 곳이었던 제주가 가슴 따뜻한 기억 가득한 곳이 되게 도와줬던 언니..

제주가 이리 아름답고 고향보다 더 그리운 곳으로 남은 건.. 다 언니 덕이었다.

몇 년 만에 만나니 얼마나 반갑던지.. 감사한 인연이다.

돌쟁이로 만나 또롱또롱 귀여웠던 꼬마들이 의젓하게 쑥 커서 다시 만나니.. 그 세월이 언제 이리 흘러갔나 싶고 잘 커준 아이들이 내 새끼마냥 고맙고 반갑고 든든했다.


제주는 조금 더 관광지스럽게 변한 곳도 있었고,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인 곳도 있었다.

아이들과 억새가 춤추는 제주의 오름을 오르고, 떠나오기 전 자박자박 걸으며 행복했던 사려니 숲길을 함께 걷고 푸르름 가득한 녹차밭을 거닐었다.

제주가 거기 그대로 있고 어려웠지만 우리가 와닿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 시간이었던지.. 아이말대로 그냥 이곳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삶이 버겁고 힘겨울 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이를 이 바다로 이끌었을 테고.. 문득 감사했다.

쉬어갈 수 있는 '행복한 추억'이란 치료제가 있다는 거니..  

행복했던 그 기억은 좋은 거름이 되어 아이 마음속에 있었나 보다..

그래서 지쳤을 때.. 잠시 쉬었다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리셋 버튼을 켜기 위한 거름이 되어 주었나 보다.


그런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가..

제주 바다가 늘 아름답게 푸르기를..

언제고 힘들 때 다시 달려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 위로받고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를..


어쩌면 둘째와 셋째에겐 싱가포르가 그런 곳이지 싶다.

아니 솔직하게 이곳이 첫째의 제주처럼 '행복한 추억'의 치료제가 될 수 있게 행복한 추억이 가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졌다.  

아이들은 어딘가에서 그저 바라만 보고 싶다고.. 그 안에 가 있고만 싶다고 할까..

그저 눈부시게 초록 초록한 풍경 안에 앉아 있고 싶다고 할지도..

아이들 손잡고 초록 초록한 풍경 속으로 나가봐야 할 거 같다. 마음속 단단히 행복한 추억 담아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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