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의 첫 번째 집은 먼저 온 남편이 혼자 급하게 구했는데,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에 있는 콘도였다.
싱가포르 생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오후 내내 뜨거운 태양이 방마다 들어오는 서향이었다는 점(햇빛에 데워진 방이 밤까지도 더웠다. 싱가포르에선 하루 종일 해가 비치지 않는 북향이 선호된다), 오래된 콘도라 밥하다 갑자기 가스가 떨어지면 Lpg 가스통을 전화 주문해야 했고, 하던 밥을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새 콘도는 그럴 필요 없다).경험하며 참 난감한 부분들이었다.
반면에 아이들과 수영하다 수영장 주변에서 주먹만큼 큰 달팽이 떼를 보고 크기에 한번, 그 수에 또 한 번 놀라곤 했었다. 집 앞으로 산책을 나서면 커다란 도마뱀을 만날 수 있었고, 길가에 널린 버섯을 보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집에서 걸어 나와 바로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다니.. 우리가 정말 다른 나라에 와서 살고 있구나 실감이 났다.
(집 앞에서 만날 수 있는 도마뱀치곤 크다)
살면서 알게 된 게,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란 뜻은 생활에 필요한 인프라가 부족하단 뜻이기도 했다. 주변에 HDB(Housing and Development Board)라는 싱가포르 공공 아파트가 없는 조용한 주택가였는데, 알고 보니 HDB가 있으면 1층에 호커센터나 마켓, 병원 등이 있어 편리한 부분이 많았다.
내가 집을 구하러 다닌 게 아니라 다른 콘도는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었고, 콘도마다 입구를 지키는 시큐리티가 있고 게이트가 쳐져 있어 입주민 외에 방문하는 사람은 이유와 전화번호를 적고 들어가야 하는 시스템이라 감히 구경해 볼 용기도 안 났다.
나중에 학교에서 친해진 친구들이 사는 다른 콘도에 놀러 갔다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싱가포르 콘도는 다 우리 콘도 같은 줄 알았는데 신세계였다.리조트 같은 멋진 콘도가 정말 많았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넓은 야외 공간과 다양한 크기의 수영장, 콘도 내에 슈퍼와 식사가 가능한 카페가 있는 곳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콘도들이 있다니..
마침 막내 학교가 정해지고 통학하기 어려운 거리라 이사를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슈퍼 있는 콘도가 끌렸고, 아이들 학교와도 중간쯤 위치라 이곳으로 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뛰어놀 공간이 많아 힘들게 적응 중인 아이들에게도 선물 같은 집이 되겠다 싶었다. 좋은 지인분도 여기 살고 있어 더 좋을 거 같았다.
이사를 결심하고 입주 시기에 맞는 집이 없어 고생하다 겨우 집을 구해 이사 올 수 있었다. 싱가포르에서의 이사는 정말 힘들었다. 직접 짐을 풀고 정리하느라 밤늦게까지 정신없이 바빴는데 갑자기 피아노 연주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40분경이었다.
"빠라 밤 빠~~ 빠라 밤 빠~~ 빠라 밤 빠~ 빠라밤 ~~"
전주 만으로도 가슴 뛰는 캐리비안의 해적" ost <He's a Pirate>였다!!!
대단히 수준급 연주였다.
"우와 ~~" 아이들도 나도 너무 행복했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누군지 몰라도 우릴 환영하는 거 같았고 좋아하는 곡을 피아노 연주로 들을 수 있어 기뻤다. 어느 집 사는 이가 이리 연주를 잘하나 즐거운 마음이었고이사오길 정말 잘했구나 싶었다. 다른 곡 연주 좀 더 안 해주나 바라기도 했다.
그땐 정말 몰랐다. 이 날 이후 어떤 일이 펼쳐질지..
며칠 뒤 또다시 늦은 시간에 피아노 연주가시작되었다.12시가 다된 시간..
똑같은 캐리비안의 해적 ost.. 역시나 너무 훌륭한 연주였다.
'뭘까? 누가 피아노 전공하는데.. 연주회라도 있나?'
'늦은 밤에 피아노 연습해야 할 급박한 사연이 있나 보다.' 그리 생각하며 이해해 보려 했다.
그런데 며칠 뒤 또 그 시간에 들리는 연주..
이번엔 무한 반복이었다. 한곡쯤이야 하며 이제 곧 끝나겠지 싶었는데, 다시 "빠라 밤 빠 ~" 이어지는 연주.. 도돌이표도 아니고도대체 우리가 좋아하는 캐리비안의 해적에게 왜 그러세요?이 곡 정말 좋아하는데 ..
연주는 며칠에 한 번씩 늘 비슷한 늦은 시간에 시작되었고 항상 캐리비안의 해적 ost 한 곡이었다.
아이들은 6시 20분쯤 일어나 등교해야 해서 보통 9시쯤 잠들었는데, 가끔은 예민한 막내가 "빠라 밤 빠 ~~" 소리에 놀라 깼고 울다가 잠이 들기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깨어 있을 때 즐기면서 들으면 박진감 넘치고 스펙터클한 신나는 음악이지만.. 조용한 밤에 갑자기 울리는 "빠 람밤 빠 ~~ 빠라 밤 빠 ~~"는 심장의 울림을 빠르게 만들었고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처음 마음과 다르게 대체 어느 집이 이리 매너가 없나 싶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곡이라도 너무 늦은 시간에 반복해 듣기엔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연주가 시작됐을 때 찾아보러 복도로 나와 살펴봤는데,소리가 울려 퍼지니 위층인지 아래층인지, 우리 층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가까운 곳은 확실한데.. 한층에 8집이 있고 무려 40층이나 되는 규모가 큰 대단지다 보니 더 막막했다.
'대체 어느 집인 거야?'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에게 "너네 집도 피아노 연주 들려?" 물었더니, 반대편 끝 라인이라 크게 들리진 않지만 우리 층인 거 같다고 했다.우리집 방향이라고..
어느 집인지 알아야 항의라도 하지 싶어 다음 연주 시작과 동시에 나와 몇 번 더 들어보니 바로 우리 옆집!
현관문이 가까이 붙어 있는 집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구조상 현관과 거실이 일자 구조로 길어서 거실에서 치는 피아노 소리가 현관문 쪽에선 확인하기 어려웠다.
누가 사는지아직 만나지 못해인사도못한 집..
일부러 찾아가 인사를 하고 피아노 연주하시냐고 물어봐야 하나 고민이 됐다.
첫인사에 항의를 하려니 사는 내내 서로 불편해질까 걱정도 되고 이 집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라 애매했다.
어느 집인지 못찾고 속만 타는 와중에도 연주는 계속됐다.
남편이 회식으로 늦는 밤이나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심란한 밤이면, 이 음악 때문에 심장이 더 빨리 두근두근거리고 불안해지기도 했다. 해적선이 나를 향해 돌진해오는기분..
어느 날은 꿈 속에도 해적들과 한바탕 싸우느라 피곤해 일어나기 어려운 날도 있었다.
분명 너무 좋아하는 곡인데.. 상황에 따라 이런 기분일 수도 있구나 알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내린 여성분이 그 집으로 가는 걸 봤다. 얼른 인사를 건넸는데 정말 순식간에 한번 쳐다보더니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인사도 안 받아주다니..
저분인가 싶었다. 이 집이 맞나 확신이 안 들어서 마음만 답답했는데 찾아가 물어보고 싶은 마음마저 사라지게 만든 순간이었다.
"밤마다 '빠라 밤 빠 ~~'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어째야 할까요?"
지인분들께 캐리비안의 해적을 막아낼 방법을 의논하니 인사도 나누지 않는 사람이라면 직접 두드리지 말고 콘도 매니지먼트 오피스에 알려 항의하란 조언을 들었다. 항의를 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할 테고..
'한밤중에 연주가 시작되면 녹음을 해야 하나?', '다른 이웃들은 항의를 안 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며칠 뒤 연주가 들려오자 녹음해야지 하고 나서려던 찰나, '잘하긴 진짜 잘한다 ~' 감탄이 먼저 나왔다.
참.. 사람 마음이..
이렇게 훌륭한 연주를 듣는데 이리 늦은 시간만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고, 늦은 시간인만큼 서정적이고 차분한 연주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밤마다 시작되는"빠라 밤 빠 ~~" 연주와 함께 내 심장은 쿵쾅쿵쾅 두근거렸지만.. 바로 문을 맞대고 있는 집과 불편해지는 것도 너무 싫어서 그냥 이 상황을 즐겨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시끄러운 소음이었다면 도저히 못 참을 테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연주곡이지 않은가..
그 뒤로 연주가 시작되면 '오늘은 박자가 좀 빠르네.', '어, 힘이 더 들어갔는데..', '어머, 틀리는 날도 있네..' 그리 평가하며 듣게 되었다.
기분 좋은 날엔 자장가처럼.. 힘들고 피곤한 날엔 제발 반복없이 한 번으로 끝내줘라 주문을 외우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이 흘러 우린 당연히 이사를 결정했다. 아무리 좋아해도 밤마다 찾아오는 캐리비안의 해적을 막아낼 방법을 못 찾은 이유였다.
"빠라 밤 빠~~ 빠라 밤 빠~~ 빠라 밤 빠~ 빠라밤 ~~"
"와~~ 캐리비안의 해적 <He's a Pirate> 다!!!"
얼마전 우연히 듣게 된 전주..
순간, 아이들도 나도 웃음이 터져 버렸다.
우리 가족에겐 잊을 수 없는 음악!
사는 동안엔 소음도 아닌 것이 밤마다 찾아와 우릴 괴롭혔지만 이젠 이 전주만 들어도 웃음이 나는 추억이 되었다. 진짜 캐리비안의 해적에게 왜 그러셨나요? 지금도 왜 오직 그 곡이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