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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끝맺음, 프롬..

by 서소시

첫째가 다니는 영국제 국제학교에선 중학 과정(Secondary) 4학년에 해당하는 해에 중요한 졸업시험을 치러야 했다. IGCSE (International General Certificate of Secondary Education)라는 시험인데 2학년이 끝날 즈음 선택 과목을 골라야 했다. 사실 그 결정을 할 때도 언제 한국으로 다시 발령 날지 모르니 이 시험을 마무리하고 갈 수 있을까 했었기에 정말 시험을 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시험의 결과가 다음 단계의 대입 준비 과정이나 진로 선택을 위한 과목 선택 큰 영향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우린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다음 단계를 미리 계획하기 어려웠다.


올 거 같지 않던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친구들 중에 이 시험을 치른 후 대학 진학을 위해 어떤 과정으로 공부할 거냐에 따라 학교를 옮겨 가거나 본인들 나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많을거란 이야기가 들려왔다.


참고로 영국제 국제학교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코스는 2년 과정으로 IB 과정과 A 레벨 과정이 있다. 싱가포르에 있는 많은 국제학교에선 IB 과정을 선택하고 있고 A레벨 과정을 할 수 있는 국제학교도 있다. 반면 싱가포르 공립학교 중 대입 과정을 공부하는 주니어 컬리지에선 A레벨을 선택하고 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다른지.. 어떤 과정이 우리 아이에게 더 잘 맞을지.. 다음 과정을 선택해서 2년을 더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확실했기에 그즈음 아이도 나도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졸업이 다가오고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닥치니 잘 모르는 과정들에 대한 불안과 언제나 따라다니는 불확실함이 참 어렵다 싶었다.


어쩌면 우리와 비슷한 상황일 친구들.. 대부분이 다양한 나라에서 부모님의 일과 관련해 낯선 나라 싱가포르로 온 아이들.. 힘든 사춘기 시기에 익숙한 본인들의 나라가 아닌 이곳에서 만나 함께 공부하고 의지하며 잘 지냈기에 친구들과의 행복한 마지막 추억을 선물하기 위해 부모들이 한마음으로 졸업 파티를 열어주자고 의견을 모았다.


멀고도 다양한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니 이 과정을 마치고 다른 학교로, 자기 나라로 떠나고 나면 또 언제 만날지 모르는 상황이라 이런 시간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고마웠다.


코앞으로 다가온 시험도 부담스럽고 학교에서 준비해주는 시간이 따로 없어 아쉬웠는데, 아이들 만큼이나 마지막을 아쉬워하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모여 의미 있는 자릴 만들어 준다니 얼마나 고맙던지.. 파티엔 아이들을 가르치신 선생님들도 모두 초대되었고 부모님들도 모두 함께 즐기는 파티니 다 참석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가 가져온 파티 초대장엔 드레스 코드가 Formal Dress라고 적혀 있었다. 드레스 코드가 뭐라고? 어떤 타입의 옷을 말하는 건가 찾아보니 진짜 '드레스'를 입고 오라는 거였다.

이런!!!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그냥 아이들 모여서 마지막을 같이 축하하는 자리 정도일 줄 알았는데, 엄마들이 준비하는 파티는 "프롬 파티 (Prom Party)"였다. 잘 몰라도 이거 외국의 고등학교 졸업 파티 아닌가 싶었다. 이제 중학 과정 졸업 시험을 치를 나이의 아이들이 프롬(Prom)이라니 싶었다.


그래서 다른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그냥 아이들 모여 아쉬움 달래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프롬(Prom) 파티인 거냐고..

그녀는 내가 미쳐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른 학교로 옮겨가는 친구들은 만날 수 있지만 본인들 나라로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고, 같이 공부하고 있는 장애인반 친구들은 실제로 나이가 두세 살 많은 경우도 많고 다음 학교로의 진학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경우도 있어서 모두를 위해 제대로 된 졸업파티 프롬(Prom)으로 하자는 의견들이 나와 일이 커졌다 했다.


그랬구나.. 첫째 학교엔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을 위한 반이 따로 있었다. 몇 과목은 함께 수업 듣고 종종 만났었는데 졸업 시험을 위한 선택 과목을 정하고 과목별, 수준별 수업을 시작하면서는 같은 과목을 선택한 경우가 아니고는 자주 만나지 못한다고 했었다. 모든 아이들을 배려한 자리라니 더 의미가 크겠구나 싶었다.




드레스는 싱가포르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건지 막막했다.

단체 채팅방에는 남학생들의 엄마들이 파티에 입을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아이들의 사진을 올렸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소년에서 남자가 되었다며 감격해하고 다른 엄마들도 너무 멋지다며 칭찬 글들을 올렸다. 멋지게 차려입은 의젓한 모습을 보니 내 아이마냥 뿌듯했다. 아이들이 이렇게 컸구나 실감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여학생들의 엄마들은 조용했다. 어떤 걸 준비해야 하나 더 고민이 됐다.


며칠 뒤 첫째는 친구들과 같이 옷 구경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딜 가야 드레스 구할 수 있는지, 친구들은 어떤 옷을 고르는지 잘 보고 오라고 당부했다. 나갔다 온 아이는 친구들이 고른 드레스가 너무 많이 파여 있었다며 놀라서 왔다. 아이들끼리 갔으니 그냥 구경도 좀 꺼리는 눈치였다고 했다. 입어보는 것도 쉽지 않았나 보다. 에구나..


그즈음 우린 또 한 번의 이사를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이삿짐을 싸다 말고 아이와 급하게 나가서 몇 벌 입어보았다. 꾸미는 쪽으론 센스 없는 엄마라 어떤 스타일을 골라줘야 할지 잘 모르겠고 막상 입어보니 나이에 안 맞게 너무 많이 파인 드레스가 대부분이라 난감했다.


그 와중에도 막상 드레스를 입고 나온 아이를 보고 있자니 왜인지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참 울보였고 엄마 바라기였던 아이.. 자라면서 많이도 아팠고, 잦은 이사로 어쩌면 많이 외로웠을 첫째가 어느새 나보다 더 커져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간 시간들이, 잘 못해준 일들이, 이 아이와의 소중했던 추억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 건지.. 영화에서처럼 갑자기 초능력이 생겨 무언가 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옷 하나 다르게 입은 것뿐인데 쑥 커 보이는 아이를 보니 채워주지 못한 내 부족함이 더 크게 보여서 시간이 멈췄으면 싶었나 보다. 더 잘해줄걸.. 더 안아줄걸.. 혼자 많은 어려움을 감내하고 견뎌온 아이가 안쓰럽고 미안했다.


몇 벌을 입어봐도 도저히 고르지 못하고 돌아오면서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드레스 길이가 기니 구두도 신어야 하고, 저런 드레스에 어울리는 가방도 필요할 테고.. 평소 화장도 안 하고 관심도 없는 아이라 눈썹도 정리되어 있지 않은데 어쩌나 싶었다. 나 역시 꾸미는 쪽으로는 능력치가 '0'이라.. 난감했다.


반 친구들도 다들 파티를 많이 기대하는지 어떤 드레스를 샀다는 둥, 어디 가서 헤어를 한다는 둥 이야기들이 많았고 전해 들을수록 뭔가 부담스러웠다. 학교에 등교했다 오후 네시에 하교 후 저녁에 시작되는 파티라 뭔가를 준비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어렵게 많이 과해 보이지 않는 드레스를 골랐다. 다른 친구들이 골랐다는 드레스보다는 얌전한 스타일로..

다음은 고민하고 찾아봐도 방법을 못 찾겠어서 염치없지만 지인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가 이곳에 와서 적응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같이 지켜봐 주신 분들이라, 난감하셨을 텐데도 너무 감사하게도 아이를 위해 도와주시기로 했다. 엄마인 나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화장해 본 적 없는 아이를 위해 화장 예쁘게 되라고 마사지 팩도 해 주셨다. 두 분이서 열심히 화장도 해 주시고 머리도 세팅해서 예쁘게 묶어 주셨다. 너무 죄송하고 정말 많이 감사했다. 지금 생각해도 부담스러운 부탁이었을 텐데 너무 고마웠다.




이날 파티 준비를 위한 시간이 많이 부족했던 건 늦은 하교 시간도 있었지만 다른 특별한 이벤트도 있어서였다. 마침 그즈음에 'Sweet 16' 생일을 맞은 S를 위해 S의 부모님이 리무진을 예약했고 같이 타고 갈 친구들을 초대했는데 아이가 초대받아 같이 리무진을 타고 파티장에 가게 된 거였다. 그래서 파티 전에 S네 집으로 가야 했다.


이 파티를 준비하는데 제일 큰 역할을 한 S의 엄마 K는 매번 우리에게 신선한 문화 충격을 경험하게 해 준 재밌고 유쾌한 분이었다. 딸아이의 기념적인 생일에 리무진 대여라니.. 또 한 번 놀라운 경험이었다.


(S네 부모님의 생일 선물 리무진..)

시간에 쫓겨 급하게 S네 집으로 갔더니 기다랗고 멋진 리무진이 대기 중이었다. S에게 초대된 친구들은 신이 나서 들떠 있었고 S는 생일이라 리무진까지 탈 거니 얼마나 예쁜 드레스를 차려입을까 궁금했는데 반전이 있었다. 정작 리무진의 주인공 S는 턱시도를 차려입고 나왔다. 턱시도에 잘 어울리게 단발머리를 숏커트까지 하고 온 S의 모습은 귀엽고 유쾌했다. 드레스란 단어에만 꽂혀서 내내 부담스러웠는데 턱시도 입은 여학생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 눈에 띄였고 멋져 보였다. 개성 강하고 유쾌한 S에게 참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파티 장소는 엄마들의 사랑과 정성으로 멋지게 꾸며졌다. 아이들을 위한 이벤트에 늘 진심인 어머님들 덕분에 멋진 추억이 이렇게 많으니 늘 감사한 마음이다.

(오늘 이 자리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글..)
(부모님들이 준비한 축하 자리)


오전에 학교에서 교복 입고 만났던 친구들의 대변신!!!

아이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아이들은 서로를 보고 깜짝깜짝 놀랐지만 그들을 지켜보는 부모님들도 "우와 ~~"하며 같이 기뻐해 주고 손뼉 치며 놀라워해 줬다. 멋지게 꾸민 모습에 내가 아는 친구가 맞나 서로들 크게 놀라는 모습이 재밌어서 많이 웃었다.

아이들 수가 많지 않으니 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함께 지켜봐 온 시간만큼 친밀감이 쌓여서 더 놀라웠으리라..


이날을 위해 재능봉사로 사진을 찍어주신 E의 엄마 J는 가족마다 아이와 함께한 멋진 사진을 찍어 주었다. 오래오래 기억되라고.. 모두의 진심이 참 많이 고마웠다.


(모두 꽃길만 걷길 바라는 마음으로.. 늦게 온 친구들은 사진에 없어 아쉽다)


아이들 가르치느라 애써주신 선생님들도 참석해 이 시간을 함께 즐겼다. 아이들의 성장을 같이 기뻐해 주시고 서로에게 감사도 표했다. 곧 있을 시험도 응원해 주시고 졸업도 미리 축하해주셨다.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수업 따라가느라 많이 고생한 아이에게 힘이 되어주신 선생님도 계시고 부족함을 지적해 자극주신 선생님도 계시기에, 그 힘든 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벅차고 이별의 시간이 실감이 났다. (시작과 동시에 사진을 찍어서 늦게 온 아이들은 사진에 없어 두고두고 너무 아쉽다.)


(함께 축하하러 와 주신 선생님들과..)


재밌었던 건 부모들이 아이들보다 더 신나서 자기 아들이 진짜 남자가 됐다고 감격하고 자기 딸이 이리 숙녀가 됐다며 놀라워했다. 단체사진 찍을 때마다 여학생들이 하이힐을 신어서 뒷줄에 선 아들들의 얼굴이 안 보인다며 안타까워하는 분들도 있었고, 평소 화장 안 하던 여학생들이 화장하고 꾸민 모습에 저 아이가 내가 아는 그 아이가 맞냐며 놀라워하는 분들도 있었다. 아이들의 쑥 커 보이고 성숙해 보이는 모습에 놀라면서도 뿌듯했을 부모님들의 마음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서로의 성장과 고민을 지켜보며 함께한 시간들이 쌓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지켜보는 마음이 벅차고 뭔가 감동이었다. 시험 후 몇 달 뒤면 다른 나라로.. 다른 학교로 떠나갈 아이들도 있으니 괜히 더 서운했다. 낯선 나라에서 만나 짧게는 2년, 대부분이 그 이상을 이곳 싱가포르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


어려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지만 잘 마무리하길 바라며 앞으로 더 성장해나갈 아이들을 축복하는 자리.. 이런 자리를 만들자고 마음 모아준 엄마들이 그저 고맙고 또 고마웠다. 드레스 찾아다니며 부담스럽게 여긴 마음이 미안할 정도였다.


이날 솔직히 놀랐던 건 아이들끼리 춤추고 즐기는 자리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자리를 준비한 엄마들이 더 감격스러워하고 기뻐하며 같이 춤추고 즐기는 자리였다. 그중 E는 딸인 M이 제발 그만하라고 말릴 정도로 신나서 센터에서 혼자 독무를 췄고 S의 엄마 K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진심으로 함께해온 시간에 대한 마지막 시간을 즐기는 그녀들이 멋져 보였다.


아이들의 한 단계 마무리 과정에서 성숙한 모습으로 아름다운 끝맺음이 될 수 있도록 그동안의 노력들과 애씀에 서로 감사하고 이렇게 함께인 순간을 즐길 줄 아는 마음..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녀들이 그리고 이 아이들이 있어 참 고마웠고 잊지 못할 추억을 많이 만들수 있었다. 모두들 새로운 선택의 길에서 꽃길만 걷길.. 그리고 어디에서든 항상 건강하길..

(코로나 이전 시기에 있었던 졸업파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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