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지낸 시간이 여러 해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색다른 걸 경험할 때면 어김없이 난 관광객 모드가 된다. 이젠 제법 알지 싶다가도 우연히 마주친 낯선 장면 앞에선 저건 또 뭔가 호기심이 발동한다.작은 도시국가라 주말에 아이들과 가볼 만한 새로울 곳이 딱히 없지만,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다양하고 그들의 문화가 다양하니 이런 게 있구나 싶어 놀라울 때가 종종 있다.
그날이 그랬다.
저녁 먹고 나서 소화도 시킬 겸 남편과 산책을 나섰다. 아이들이 새벽 일찍 일어나 등교해야하니 덩달아 일찍 자야 다음날이 덜 피곤하기에 자주 나서지 못하지만, 남편과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기 딱 좋은 시간이라 그렇게 나서는 저녁 산책이 좋았다. 그럴 때면 주로 집 앞 공원길을 따라 걷거나 집 근처 쇼핑몰을 끼고 동네 한 바퀴 걸어서 다녀오곤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매번 다니는 길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가보고 싶었다. 자주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밤마실엔 가지 않는 큰길 건너편 HDB까지 가보자 하고 걸었다.
한낮의 강렬한 태양이 지나간 자리엔 에어컨보다 시원한 바람이 채워주고 있었고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려와서 기분 좋게 걷던 중이었다.
HDB 내 호커센터가 보이는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어디선가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시계를 들여다보니 저녁 9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저녁 시간인데 이 시간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궁금해서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놀라서 "우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여기서 이런 걸 구경하게 될 줄이야.. 싱가포르에서 여러 해 살고 있고 자주 지나는 길목인데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새소리에 한번, 엔틱하고 예쁜 새장들에 두 번 놀랐다.
환한 불빛 아래 수많은 새장이 걸려있었고 새들이 열심히 노래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이러면 누가 항의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새들의 노랫소리는 컸다. 새장이 걸린 곳 아래쪽으로는 앉아서 들을 수 있게 의자가 놓여 있었다. 새 주인인지 몇 분의 남자분들이 앉아서 새소리를 듣고 계셨다.
( 수많은 새장과 노래하는 새들 )
슬쩍 새장 아래 빈 의자에 앉아 노래하는 새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기까지 걸어오길 정말 잘했구나 싶었다.
여기 원래부터 이런 숫자 표시와 고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낯선 풍경이었다.
새장은 헷갈리지 않게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숫자로 표시된 고리 아래에 매달려 있었다. 엔틱한 디자인의 새장이 참 예뻐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안엔 도자기로 된 앙증맞은 그릇도 보였다.
제법 많은 새들이 꼬리를 움직이며 함께 노래하고 있었다. 가만가만 귀 기울여 듣게 되는 이 기분 좋은 청명한 소리에 행복해져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들만의 음악회에 초대된 기분.. 제대로 힐링하는 기분이었다. 너무 예쁜 소리라 담아봤다.
( Bird Singing in Singapore )
앞쪽에 안내글이 쓰여 있었는데 저게 무슨 뜻인가 궁금해 나중에 찾아보니 인도네시아어였다.
"너는 누구니?" "나는 샤마야." 와쿠와쿠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는 소리)
(안내문에서 자기 소개하고 있는 새..)
귀엽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이 새가 많이 보였다. 이 친구 이름이 샤마 (Shama)인가 보다.
저 안내문 옆에 "Welcome Back"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니 코로나 상황으로 못 모이다가 오랜만에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나 보다.
"어.. 이게 혹시 그건가.. "
새소리에 흠뻑 빠져 듣고 있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게 바로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Bird Singing Club이 모이는 Corner> 구나 싶었다.
요즘은 많이 사라져서 자주 볼 수 없는 풍경이라고 들었는데, 뜻밖의 횡재란 이런 게 아닐까..
늦은 밤엔 이곳까지 잘 안 오는데 어쩌다 이렇게 우연히 와서 보기 어려운 진귀한 구경거리를 보게 되다니 정말 운이 좋구나 싶었다.
<Bird Singing Corner>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한 벽화와 관련된 기사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 유명한 벽화는 티옹 바루 (Tiong Bahru)에 있다고 했다. 벽화가 불법인 싱가포르에서 어렵게 벽화가 그려진 것에 관한 기사였는데.. 이 지역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입유총 (Yip Yew Chong)이란 분이 사라져 가는 옛 문화를 안타깝게 여겨 오래오래 기억하자는 뜻으로 여러 번 건의 해서 그려진 세 가지 그림 중에 하나가 이 노래하는 새들에 대한 거라고 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지역 주민들이 먹을 것도 나눠주고 응원도 해 줘서 행복하게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화가도 아닌 그가 사랑하는 유년기의 모습과 그들의 문화를 기억하고자 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을 벽화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Bird Singing Corner>에 대해 찾아보니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취미생활인 새 키우기는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점점 인기를 끌면서 여행안내서에도 새가 노래하는 지역이 소개되어 전 세계 방문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관광지로 알려졌을 정도란다. 그중 제일 유명한 곳이 2003년까지 티옹 바루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지나간 옛 추억이 되었지만..
많은 새가 노래하는 코너들은 주로 HDB 내 빈 데크, 넓은 들판 또는 주택 단지 내의 공원에 설치되었다는데, 같은 새 키우는 취미를 가진 삼촌들이(싱가포르에선 아저씨들을 Uncle이라고 부른다.) 모여서 서로의 새를 선보이기도 하고 정보와 팁도 교환하며 친구를 사귀기도 하는 등 많은 순기능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취미를 가진 유대감으로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쉽게 친해질 수 있었으리라.삼촌들이 자신의 새장을 걸어두고 같이 체스를 두거나 차를 마시기도 하고, 재밌는 이야기도 나누고, 새를 먹이고 키우는 정보도 교류하고.. 진정한 소통의 장이었을 거 같다.
그리고 다른 새들과 어울리는 것을 통해 새들 역시 가창력이 향상된다고 한다. 다른 새들의 사랑스러운 짹짹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배운다고.. 이런 산책을 해주지 않으면 새들 역시 갇혀있으니 외롭고 우울해져서 노래할 의지가 감소될 거라 믿었단다. 새들도 산책하며 친구를 만날 수 있으니 삼촌들만큼 즐거운 시간이었을 거 같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자주 보기 어려운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요즘은 은퇴한 노인분들의 취미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훨씬 쉽고 재미있는 취미생활이 많아진 요즘이니 그 인기가 예전 못하다고 했다.
진짜 귀한 풍경을 본 거구나 싶어 기분이 좋았다. 예상 못한 귀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았고 그 벽화가 너무 궁금해졌다. 그래서 다음날 그 벽화를 보러 딸아이와 손잡고 나섰다.
티옹 바루는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 단지 중 하나로 주변에 맛있고 유명한 카페가 많아 나들이하기 좋은 지역이다. 싱가포르 전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HDB지만 티옹 바루에선 낮고 독특한 블록들을 볼 수 있어 시간 여행 온 기분을 느끼게 했다. 대부분 1930년대에 세워졌다는데 낮은 층수와 둥근 베란다와 외부 나선형 계단 등이 있어 아주 색다른 HDB 모습이었다.
( 티옹 바루의 HDB 풍경 )
다른 나라 온 거 같다며 산책하다 드디어 그가 그린 "새들이 노래하는 코너"를 찾았다. 이거구나~~
( Bird Singing Corner by Yip Yew Chong, 벽화 )
Block 71, Seng Pho Road에 있다.
새들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그림을 보니.. 행복한 표정의 삼촌들이 더 행복해 보였다. 따뜻한 차와 커피, 카야토스트를 뒤로 하고 새들의 노래를 즐겁게 듣고 있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새들이 노래하는 코너가 사라지지 않고 오래 잘 보존되었으면.. 그래서 이 아름다운 새소리를 듣고 행복했던 나처럼 즐거운 경험을 할 기회가 더 많이 생기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