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한여름 밤의 추억하면 불 꺼진 방안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작은 텔레비전 앞에 삼 남매가 쪼르르 모여 앉아 더운 여름날에도 이불을 필사적으로 서로 잡아당기며, 시작도 하기 전부터 이불 뒤집어쓰고 숨어서 기다리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잔뜩 긴장해서 숨죽이고 보다 어느 순간 확~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이불속에서 소리 지르며 발버둥을 쳤었다. 머리카락이 쭈뻣쭈뻣 서고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면서도 언제나 기다려지던 시간.. 그런 밤이면 너무 무서워서 화장실도 못 가고 방금 전에 본 장면이 꿈에 나올까 잠도 못 자던 추억의 프로그램.. 그 이름 <전설의 고향>이었다.
내 다리 내어 놓으라고 한 다리로 콩콩 뛰면서 빠른 속도로 뒤쫓아 오던 그 순간의 공포는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고, 밤마다 몰래 닭장에 숨어들어 온 얼굴에 피를 묻힌 채 닭을 잡아먹던 구미호는 진짜 아이들 잡아먹으러 찾아온다더라, 정말이라며 겁주는 친구의 말에 닫힌 창문도 다시 확인하며 밤마다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그 시절에 너무 떨어서인지 공포물은 어른이 된 지금도 잘 못 보고 무서운 이야기는 정말 모르고 살고 싶다.
안 듣고 싶대도 굳이 진짜 재밌다며 열심히 이야기해주던 짓궂은 친구들 덕분에 듣게 된 수많은 무서운 이야기들은 수십 년이 흘러도 머릿속에 남아 한 번씩 떠오를 때면 식은땀이 날 정도로 무섭다. 이렇게 겁이 많은 탓에 한여름 납량특집이 안 반갑고 무서운 이야기는 절대 사절이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타지에서 우리 가족만 떨어져 살다 보니 "이런 건 안 좋다더라"나 "이런 거 조심하라"는 이야기는 괜히 더 주의 깊게 듣게 된다.
싱가포르에서 살면서도 몰랐으면 좋았을 거 같은, "이땐 이러면 안 돼요~"하는 싱가포리언들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더위를 잊게 해 줄 이곳의 으스스한 여름 이야기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싱가포르 표 납량특집~~
매일매일 푹푹 찌는 무더운 나라로 이사 와서 아이들이 제일 좋아했던 건 콘도 안에 수영장이 있다는 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걸어 나가서 바로 물놀이를 할 수 있다는 건 더운 나라에 딱 맞는 쉼표였고, 모든 게 낯설고 같이 뛰어놀 친구가 없던 아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매일같이 수영장에서 뛰어놀았다. 셋이서 똘똘 뭉쳐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주며 물총도 쏘고 시원한 물속에서 한바탕 웃고 떠들고 나면 우리가 정말 무더운 나라 싱가포르에 와 있구나 싶었다. 그렇게 여러 날 놀아도 수영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 넓은 수영장을 오롯이 우리만의 전용 풀처럼 놀곤 했었다. 이 넓은 수영장에 왜 우리뿐일까 의아했는데 가만히 보니 시간대가 문제였다. 한국에선 늘 햇빛 나는 한낮에 물놀이를 했었는데 여긴 워낙 햇빛이 뜨거우니 한낮에는 보통 수영하러 나오지 않았던 거다. 해가 조금 기우는 시간대부터 많이 나와 논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콘도 안엔 큰 수영장 외에 따뜻한 물이 보글보글 솟아 나오는 작은 유아용 풀 크기의 자쿠지가 있었다. 수영하다 추워지면 따뜻한 물에 들어가 몸을 녹일 수 있어서 해가 없는 시간에도 수영하기 좋았다. 그걸 알고부터는 우리 아이들도 초저녁 시간에 수영을 즐기게 되었다.
같이 뛰어놀 아이들이 제법 보인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또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 학교 시험기간인가 왜들 안 보이지 싶던 어느 날, 그날도 수영장을 전용 풀처럼 차지하고 초저녁 물놀이를 시작했다. 언제나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던 시큐리티 아저씨가 지나가시기에 인사를 나눴다.
"잘 지내죠? 완전 우리 아이들 전용 풀장이에요."
"아.. 너네 가족이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는구나?" 하시더니..
"지금 이 시기엔 해 지고 수영하면 안 좋아요."라고 하셨다.
'왜 안 좋다는 거지?' 의아해하는 내게 그는..
"지금 고스트 먼쓰(Ghost Month)거든."하고 대답해줬다.
'잉? 고스트 뭐라고요?', 이게 뭔 소린가 했다.
아저씨는 겁먹은 내 표정이 재밌었는지 웃으면서..
"오다가다 종이 태우는 거 못 봤나요? 여기 문화예요"하고 지나가셨다.
어머나.. 해마다 여름이면 찾아오는 납량특집도 아닐 테고, 늘 여름인 이 나라에서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었다. 다른 건 몰라도 "고스트" 소리에 놀라 아이들 챙겨 얼른 올라와 찾아봤다. 중국계가 많은 싱가포르의 음력 7월엔 그들만의 전통문화가 있었던 거다.
음력 7월 배고픈 유령 축제 동안, 중국인들은 죽은 조상들을 포함한 귀신과 영혼이 일종의 '휴가'로 지구를 돌아다닌다고 믿는단다. 서양의 할로윈과는 성격이 다른데, 조상 숭배의 의미로 이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친다고 한다. 이 축제 기간 중요한 날은 삼 일인데, 먼저 지하세계의 문이 열리는 음력 7월 1일(2022년 7월 29일), 축제일은 보름인 15일(2022년 8월 12일)이며, 축제의 마지막 날(2022년 8월 26일)까지를 중요하게 여긴단다. 특히 15일 축제일에는 지하세계 그들이 음식과 오락을 찾아 헤매거나 살아있는 사람들을 방문한다고 한다.
유령의 달 동안 사람들은 주택 단지나 사원 밖에 설치된 금속통에서 제물을 태운단다. 향도 피우고 종이 지폐나 주택, 자동차, 시계, 장신구, 옷 등의 정교한 종이 형상을 불에 태우면 고인이 사후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최근엔 종이로 만들어진 TV, 휴대폰도 있다고 한다.
"아~~ 어쩐지 사람들이 그래서 뭘 그렇게 태웠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HDB 많은 지역을 지날 때면 길가에 놓인 드럼통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뭔가를 태우길래 이 나란 무슨 쓰레기를 개인이 이렇게 태우나 했더랬다. 그들이 태운건 그냥 쓰레기가 아니었던 거다.
배고픈 유령 축제 동안 또 다른 중요한 제물은 음식이다. 죽은 가족을 달래고, 그 대가로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기에 길거리나 절에 음식을 남겨 놓는다고 한다. 우리도 제사 지내고 나면 음식을 떼어내서 대문 앞에 두는 고수레 같은 의미구나 싶었다. 그리고 게타이라는 공연 형식의 오락을 제공한다고 한다.지하세계 그들을 달래기 위해 열리는 공연으로 경극과 게타이(라이브 공연) 등의 공연이 펼쳐진다고 한다.
배고픈 유령 축제 기간인 음력 7월은 불길한 달로 여겨지기 때문에 '불운'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소개해 보면..
1. 수영은 안 돼요. 특히 밤수영은 피하세요.
익사한 귀신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자신을 대신할 희생자를 찾기 위해 당신을 익사시키려고 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밤에 활동을 많이 하니 한 달 동안은 특히 밤수영은 피하라는 거다. 그래서 이 시기엔 해변가로 여행도 안 간다고 한다. 몰랐으면 그냥 놀았겠지만 듣고 보니 섬뜩하다.
2. 새로운 걸 시도하지 마세요.
이 시기에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이 달엔 결혼도 하지 않는다고.. 먼 거리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조심한다고 한다. 그들을 초대하고 싶지 않다면 이 달엔 피하는 것이 좋단다.
3. 밤에 옷을 말리려고 밖에 걸지 마세요.
이 시기엔 젖은 옷을 발코니나 창문 밖에 걸어두면 안 된다고 한다. 그들이 기꺼이 옷을 빌리러 찾아온다고 한다. 비에 젖은 우산도 거실에 펼쳐두지 말라고 한다. 관심을 끌고 싶지 않다면..
4. 길거리에서 발견된 동전이나 돈을 줍지 말고 집으로 가져오지 마세요.
누구를 위한 돈일지 모르기에 원망을 듣고 싶지 않다면 절대 가져오면 안 된다고 한다. 장난스러운 유령이 미끼로 놓아두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5. 빨간색 옷은 입지 마세요. 또 검은색 옷도 피하세요.
그들이 이 색깔에 끌린다고 한다. 눈에 띄고 싶지 않다면 한 달 동안은 이 색깔 옷을 피하도록.. 하이힐도 피하는 게 좋다고 한다.
6. 밤에 휘파람을 불지 마세요.
그들을 부르는 로밍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밤에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라고 한다. 그들은 오락과 음식을 찾고 있기에 명심해야 한다고..
7. 어둠 속에서 늦게까지 밖에 있지 마세요.
이 기간 동안에는 되도록이면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한다. 그들 눈에 띄어 좋을 게 없으니.. 생소한 목소리로 누군가 나를 부른다면 절대 돌아보지 말고 계속 걸어가라고 한다.
8. 곤충을 죽이지 마세요.
어떤 곤충들은 사랑하는 죽은 사람들의 존재를 상징한다고 믿는 중국식 믿음이 있다고 한다. 특이한 곤충이나 나방을 본다면 그냥 혼자 두거나 못 본 척하라고..
9. 밥그릇에 젓가락 꽂아 두지 마세요.
향을 피워두는 것과 비슷해 보이기에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10. 길을 가다 놓여 있는 제물을 밟거나 차지 마세요.
만약 모르고 밟거나 찼다면 얼른 사과를 하라고 한다. 주로 드럼통 같은 금속통 주변에 놓여 있으니 잘 보고 피해가야 한다.
11. 벽에서 떨어져요.
벽은 자연스럽게 차가워서 그들이 벽에 붙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그들의 선호하는 주요 핫스폿이 된다고..
좁은 골목길도 그런 의미에서 피하는 게 좋다고 한다.
12. 막차는 타지 마세요.
막차가 출발했는데 아무도 없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옆에 누가 앉아 있을지 모르기에..
13. 슬리퍼를 침대 쪽으로 향하게 두지 마세요.
슬리퍼가 그들의 나침반 역할을 한단다. 침대 쪽으로 향하게 두면 나를 찾아오게 하는 것이므로 절대 그 방향으로 두면 안 된다고..
14. 밤늦게 사진 찍지 마세요.
전통적으로 카메라에 영혼을 가둘 수 있다고 믿는단다. 사진 속에 그들을 같이 기록하고 싶으면 상관없지만 되도록이면 이 기간엔 낮에 사진 찍으시길..
15. 게타이 공연 맨 앞자리는 앉지 마세요.
그들을 달래기 위해 열리는 공연으로 경극과 게타이(라이브 공연) 등의 공연이 펼쳐지는데 맨 앞 줄 자리는 특별한 손님들을 위한 자리니 앉으면 안 된다고 한다. 자신도 모르는 새 화가 난 유령의 무릎에 앉아 있을 수도 있다고.. 궁금해서 구경할 일이 있다면 뒤쪽으로 앉으시길..
그들의 낯선 문화 속에 언젠가 들어본 이야기도 있어 신기했다. 21세기에 무슨 소린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이 기간엔 조심하는 게 어떨까 싶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싱가포르의 음력 7월엔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온다니.. 주택가에 늘어선 금속통들이 올핸 새 단장을 했는지 깔끔한 모습으로 한 달 전부터 줄지어 서 있다. 이제 곧 그들을 위한 축제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