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눈도 못 뜨는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급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싱가포르 학교는 7시 20분까지 등교해야 해서 해도 뜨지 않은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 몰려오는 졸음을 이겨보려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신나는 음악이 흐르고 매일 아침 만나는 라디오 진행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싱가포르 라디오는 서너 명의 남녀 진행자가 대화를 나누다 음악을 틀어주는 방식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날 라디오에선 한국 문화를 소개해주고 있었다.
A : "한국 부모들이 아이들 학교 데려다줄 때 뭐라고 하는지 아나요?"
B: "글쎄요.. 뭐라고 하죠?"
A : "Fighting (파이팅)!~ 해요."
B : "왜요? 왜 싸우라고 하는 거죠?"
다른 진행자가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C : "학교 갈 때 그런다고요?"
또 다른 진행자도의아해했다.
A : "네~ 한국인들이 자주 쓰는 '파이팅'의 의미는"싸우라'는 뜻이 아니고 하루를 잘 보내라는 응원이에요."
C : "그런데 왜 싸우라는 표현을 쓰죠?"
'파이팅이 왜?'하며 듣다가 순간놀랐다. 나 역시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며늘 하는 말이..
"오늘도 파이팅~ 힘내!"하는데..
'이게 이상하게 들릴수 있구나'..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쓰는 우리식 표현이 문화가 다른 그들에겐 낯설게 느껴질 수 있구나 싶었다. 우린 왜 이 표현을 응원하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걸까?
그럼 싱가포르 부모들은 애들에게 뭐라고 응원하냐 물었더니..
"짜요 ~" 한단다.
늘 써오던 말이라 왜 그럴까 생각해 본 적 없는 표현이었다. 밖에서 보면 의아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우리말 표현도 아니고 이 영어 표현이 한국 문화로 소개되다니..
며칠 뒤같은 라디오에선 한국어 "오빠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언제 쓰는 건지 설명해주던 여자 진행자분은 그냥 나이 많은 남자에게 쓰는 표현만이 아니라고 하면서..
"나이 상관없이 잘 생기고 멋지면 다 오빠 ~"라고 부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다른 남자 진행자들은 다들 앞으로 무조건 자길 부를 때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싱가포르 라디오에서 "오빠 ~"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될 줄이야.. 꽤나 한국 문화를 잘 알고 설명해주는 진행자분이 반갑기도 했고 앞으로 다들 오빠라고 부르라는 게 재밌기도 했다.반갑게도 우리 문화를 설명해주니 영어도 쏙쏙 더 잘 들리는 기분이었다.
모처럼 웃었지만 들을수록 여러모로 아쉬운 싱가포르 라디오..
"너네 한국 라디오 기억나니?"
문득 아이들이 한국에서 라디오 들은 걸 기억할까 궁금해졌다.
"아니요~ 한국 라디오는 한국어로 말하는 거 말고 여기랑 달라요?"
"완전 많이 다르지! 아주 많이 다르고 말고.."
말하다 보니 이른 아침을 함께 열어주고 나른한 오후의 활력이 되어주기도 하고, 잠 못 드는 밤이면 친구가 되어주었던 한국의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그리워졌다.
"한국 라디오 프로그램에는 사연을 보내거나 신청곡을 신청할 수 있어. 그냥 음악만 틀어주는 일방적인 방식이 아니라 디제이 분과 소통을 할 수 있단다.사연을 보내 채택되면 방송 중에 그 사연을 읽어줘. 소중한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거나 특별한 기념일이나 이벤트를 위해 사연을 보내면 소개도 해 주고 같이 축하해주면서 선물도 보내준단다."
"정말요? 진짜 그런다고요?"
설마요 싶은 표정으로 내 말을 영 믿지 못하는 아이들.. 어릴 때 왔으니 한국 라디오에 대한 기억이 없나 보다.
날씨나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신청 곡들과 함께 따뜻하고 감동적인 사연들을들으며 내 일처럼 마음 따뜻해졌던 라디오와의 추억을 사랑하는 내 아이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고 있다는 게 새삼 많이 아쉬웠다.
처음 아는 이 없는 낯선 제주로 이사 갔던 그 해, 결혼기념일에 맞춰 제주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었다. 돌 지난 아이와 함께 세 식구가 얼마 전 제주 도민이 되었고 남편이 낯선 제주로 와서 적응하며 바쁘게 일하느라 정작 제주의 아름다움을 즐길 새가 없어 안타깝다는 내용이었다. 아름다운 제주에서 행복한 추억 많이 만들고 싶다고..
혹시나 하고 방송되는 시간에 남편 근처에서 은근히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놓고 기다렸다. 감사하게도 그날 라디오 디제이 분은 내가 보낸 사연을 읽어주신 후 우리 가족이 제주에 온걸 엄청 환영해 주셨고 결혼기념일도 축하해 주셨다. 깜짝 놀라던 남편..
아름다운 제주에서 좋은 추억 만들 수 있게 선물도 보내주셨다.사연 소개만도 감사한데 너무 근사한 선물까지 보내주셔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이런 일이 있었어 하고 들려줘도 역시나 아이들은 잘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아.. 아이들에게 설명하다 보니 진짜 한국의 정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한국의 라디오가 무척 그리워졌다.
그러다 올여름 거의 3년 만에 한국에 갔을 때 드디어 아이들은 '한국 라디오의 정'을 느껴 볼 수 있었다. 한국 스타일의 라디오 한번 들어봐야지 하며 라디오를 틀었다.
그날 보내온 사연은 예년보다 훨씬 무더운 여름에 인형탈을 쓰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분의 사연이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으로 온몸이 젖어 너무 힘들다고 했다.
디제이 분은 이 더위에 얼마나 힘드실지 마음 아프다며 같이 안타까워해 주시면서그분께 냉풍 조끼를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그걸 듣고 아이들은 동시에 "우와 ~~" 소릴 질렀다. 너무 감동이라며..
숨 막히는 한여름의 무더위는 그대로인데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따뜻한 이야기에 마음 가득 시원한 바람이 일었다. 사연을 보낸 분이 들으며 얼마나 행복하실지 그 마음이 라디오를 타고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한국 라디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진짜군요. 와~ 너무 감동인걸요."
아이들은 이 신나는 경험을 많이 신기해했다.
이곳에서 자랐다면 어쩌면 덤덤하게 여길 일을 한발 밖에서 보니 이리 신기한 일이 되었다.
여전히 어여쁜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따뜻하고 감동적인 정을 실어 나르는 한국의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단어 하나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완성해갔을 정성이 모여 전해지는 사연들..그런 사연들에 같이 기뻐해주고 위로해주고 때론 같이 울어주며 공감해주는 라디오가 있어 참 고맙고 다행이다 싶다.
나이 들어갈수록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이 너무 좋다.. 자꾸만 그립고 그립다.
얼굴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주파수를 맞추며 소리에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
홀로 있는 듯 외로운 세상에 혼자가 아님을.. 나만 힘든 게 아님을 느끼게 해 주고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는 라디오가 전하는 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