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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십 대를 모집합니다!

by 서소시

< 무서운 십 대를 모집합니다! >


첫째네 반 엄마들의 단체 채팅창에 알람이 떴다. 아이들을 위한 모임이나 이벤트를 주도하는 S의 엄마 K였다.

'무서운 십 대라고?'

이어지는 엄마들의 답글을 읽다가 너무 웃겨서 킥킥대며 웃고 말았다. 주를 이루는 대답은 뭘 따로 찾느냐는 거였다. 이미 바로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고.. 따로 찾을 필요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전 세계를 막론하고 십 대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춘기라는 그들만의 통과 의식이 한창인 아이들을 향해 많은 엄마들은 <그저 지금 잠깐 내 아이가 아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시기를 잘 보내면 예전의 내가 아는 아이가 돌아올 거다~> 그렇게들 서로 위로하며 부모로서 까칠하게 변해버린 아이를 지켜보고 견뎌내야 할 시간에 대해 힘들어하고 속상해했다.


그러니 딱히 누구네 아이 할 거 없이 다 건들면 폭발하는 폭탄 같은 무서운 아이들인데 뭘 굳이 모집까지 하냐는 반응에 절로 웃음이 날 수밖에.. 다양한 문화와 다른 생활방식을 가진 그들이지만 아이들의 사춘기를 지켜봐야 하는 부모로서의 어려움은 비슷한 마음인가 보다.


K 역시 엄마들의 반응에 무척 즐거워하며 자기 친구가 기획해서 준비하는 이벤트에 참여해줄 무서운 십 대들을 모집 중이니 관심있은 아이들이 있는지 의견을 물어달라고 했다. 한 콘도에서 준비 중인 할로윈 행사를 빛내주기 위해 우리들의 무서운 십 대들이 자원봉사로 참가해주면 더 멋진 시간이 될 거라고.. 당장 다음날 있는 이벤트이니 희망자는 내일 하교 후 S와 함께 자기 집으로 오면 함께 준비하겠다고 했다.


어.. 당장 내일이라고?

무서운 십 대를 모집한다는데 참여할래 하고 첫째의 의견을 물었더니 아이는 글쎄요 하는 반응이었다. 사탕 받으러 즐겁게 달려갈 나이가 아니니 할로윈 행사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보내온 내용을 자세히 보니..

"어머나~~ 웬일이니~~ "

살고 있는 우리도 몰랐던 우리 콘도에서 하는 행사였다. S네는 주택에 살고 있는데 K의 친구가 우리 콘도에 사는 걸까..

당시 살던 콘도는 싱가포르에서도 큰 대단지라 세대수가 아주 많고 콘도 내 퍼실리티가 잘 갖춰져 있는 곳이었다. 단지 내에 아담한 대나무 미로 공원이 있는데 그곳을 할로윈 분위기로 꾸며놓고 곳곳에 무서운 분장을 한 우리 친구들이 숨어있다가 찾아오는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자는 이벤트라고 했다.

( 단지 내 대나무 미로 공원 photo by 서소시)


우리 콘도에서의 행사란 말에 첫째는 잠시 당황스러워했다. 친구들 중 여기 사는 걸 아는 친구들이 있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진 않고 그렇다고 모른척하기도 애매한 모양이었다. 아이들 단체 채팅방에선 별 반응 없이 조용하다고 했다. 몇 명이나 참가할지, 누가 참가할지도 궁금했다. 친구들이 있어도 같이 노는 게 아니라 대나무 숲에서 몇 시간 무서운 분장을 하고 서 있어야 한다면 굳이 참가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럼 내일 행사 시간에 맞춰 누가 어떤 분장을 하고 오는지 친구들 구경 가자 했다.




다음날 날이 어두워지고 행사 시작 시간에 맞춰 아이들과 대나무 미로 공원으로 내려가 봤다. 우린 애초에 할로윈 행사에 참가할 마음이 없었기에 미리 준비한 코스튬도 없었다. 막내는 길이가 많이 짧아졌지만 어릴 때 입던 코스튬을 찾아와 신나게 갈아입었고 둘째는 마법사 모자라도 썼는데 정작 첫째는 틔는 게 싫다며 그냥 내려가겠다고 했다.

입에 핏자국이라도 그리고 머리 풀어헤치고 한국 처녀 귀신으로 분장해볼래 물어봤지만 사춘기 아이가 적극적으로 응할 리 만무했다. 이 행사에 특별한 기대가 없어서인지 아이는 친구들 중 누가 왔는지 얼굴 보고 시원한 음료수라도 하나씩 건네주자며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갔다.


내려가 보니 대나무 미로 공원은 근사하게 바꿔져 있었다. 두루마리 휴지와 솜으로 으스스한 분위기를 내고 커다란 거미줄도 걸려있고 박쥐나 해골 같은 무시무시한 소품들이 곳곳에 있어서 할로윈 분위기 제대로였다. 준비해주신 분들이 얼마나 이 이벤트에 진심인지 느껴졌고 많이 고마웠다. 기대보다 더 멋졌다.

( 확 바뀐 미로공원. 신난 막내. photo by 서소시)


"뭐야.. 이거 너무 그럴듯하잖아."

실감 나게 꾸며진 공간을 조심조심 걸어 들어가는데 갑자기 유령신부가 눈앞에 쓰윽 나타났다. 그 옆으로 하얀 얼굴에 괭한 눈빛으로 분장한 좀비가 천천히 움직였다. 어두운 밤 대나무 숲에서 만나니 비명이 절로 나왔다.


"으악~~ 진짜 무섭다~~"

무서워서 소릴 질러댔다. 잠시 뒤 정적을 깨고 크크크 웃음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첫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스스하게..

"Hi ~ OO~~"

멋지게 변신한 그들은 첫째의 무서운 십 대 친구들이었다. 실감 나게 분장해서 이 친구가 내가 아는 그 친구 맞나 싶었다. 특히 유령신부 S는 만약 오늘 이 행사에 참가하는 줄 모르고 어둠 속에서 바로 만났다면 몰라볼 뻔했다.

기대 없다던 첫째는 친구들의 변신에 무척 즐거워했다.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만나니 더 반가웠나 보다.

( 우리의 무서운 십대들. photo by 서소시)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뒤쪽에서 무서운 분장을 한 다른 십 대들이 더 나타났다. 서로 누군지 확인하다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아이들은 서로의 변신에 많이 즐거워했다. 기대 이상이라 더 반가웠는지.. 모두 다섯 명의 친구가 같이 왔단다. 가만히 어둠 속에서 폼 잡고 서 있을 땐 은근 무섭더니 친구들끼리 하는 행동은 아직 너무 귀엽기만 했다.


긴 손톱을 붙인 장갑을 끼고 살벌하고 무섭게 폼을 잡던 E는 뒤집어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지자 급 당황하며 첫째에게 달려와서 모자 좀 씌워줄래 부탁했다. 끼고 있는 장갑이 S 꺼라 작아서 못 움직이겠다고.. 무섭게 서 있다 달려와 도와줘하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한참 뒤엔 신발끈이 풀렸다며 다시 달려와 또 한 번 더 부탁해하는데 장화 신은 고양이의 한 장면 같은 표정이라 너무 웃겨서 많이 웃었다. 무서운 십 대 다 어디 간 거야..


그냥 할로윈 분위기로 공간만 꾸며 놓았다면 이 정도로 즐거울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무서운 친구들이 있어 할로윈 분위기도 더 나고 동네 꼬마들도 신나하고 훨씬 더 즐거운 행사가 되었다.

( 우리의 무서운 십대들. M, A, J, S and E. photo by 서소시)


이렇게 분장하고 만나니 재밌고 즐거운데 우리도
한복 입고 머리 풀어헤치고 한국스타일 처녀 귀신으로 준비할 걸 하고 나만 많이 아쉬워했다. 친구들에게 한국 귀신 알려주고 싶은데 하며.. 막상 사춘기 첫째는 "엄마 워~워~" 하며 진정해달라고 했다.


밤이지만 계속 서 있어 지친 친구들을 위해 시원한 음료수를 사서 나눠줬다.

자신이 사는 곳도 아니고 잘 알지 못하는 콘도에서 하는 작은 행사에도 이렇게나 진심이라니.. 작은 이벤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진심으로 즐길 줄 아는 아이들이 보기 좋고 한편으론 부러웠다. 참가해준 무서운 십 대들 덕분에 할로윈 시즌이 다가오면 떠올릴 수 있는 유쾌하고 즐거운 추억이 생겼다.


이벤트가 끝난 후 K는 이 이벤트에 참가해준 친구들의 변신 과정을 엄마들 단체 채팅방에 사진으로 공유해줬다. 어떤 친구가 어떤 변신을 하고 참가했는지.. 나 역시 현장 분위기를 전하며 무서운 십 대들 덕분에 얼마나 근사한 할로윈이 되었는지 알렸다. 고마운 마음과 함께..


그날밤 늦은 시간까지 엄마들의 단체 채팅방에선 끊임없이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무시무시하지만 너무도 사랑스러운 우리 무서운 십 대들의 변신에 즐거워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아이들을 칭찬했다. 모두의 아이들이 잠깐 이상해지고 무서워진 이 시기(사춘기)를 잘 보내고, 보다 행복해지길 축복하고 응원하는 엄마들의 마음이 띵동~거리며 계속 전해졌다.





(코로나 이전에 있었던 행사입니다. 할로윈 시즌이 다가오니 즐겁고 그리운 마음으로 떠올리게 되네요. 미리 해피 할로윈 보내시길~~ 인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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