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시비지심_ Revision_2. 확산과 수렴
마케팅에는 A/B 테스트, FGI, Prototype, Fake door 테스트 같은 용어들이 있다. 이 모두 시장 반응을 예측하거나 검증하기 위한 다양한 사전 조사, 실험, 모니터링과 관련이 있다. 자신들의 상품, 서비스가 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객이 좋아할지, 구매로 이어질지 다각도로 보려는 노력들이다.
물론 이런 노력에도 100% 완벽한 고객 파악은 쉽지 않다. 혁신의 아이콘인 스티브잡스 역시 전통적인 시장조사 중심 접근에 있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고객은 직접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며 불특정 다수의 의견에 기대는 것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팅계의 이런 노력들은 의미가 크다. 상품을 만들고 파는 생산자의 입장 보다 소비자의 입장을 생각하고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본격화되면서 온라인상 국경이 사라지고 정보의 홍수로 허우적거리게 된 이 시대에, 무엇이 진짜이고 또 가치 있는 정보 인지를 가려내려는 노력은 분야를 막론하고 필수 사항이 됐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이런 노력에서 멀어 보이는 지점과 대상이 있다. 바로 기업조직 내 리더들이다. 경험상 수많은 리더들이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인 리더십으로 비판을 받는다. 이들은 자리 자체가 주는 권위와 중압감에 취하기라도 한 듯 과거의 경험과 경력 그에 따른 주관적 감으로 판단하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보다는 직책을 맡으면서 변하는 경우가 많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고 자리가 주는 달콤함을 체감하는 순간 그 자리를 유지하거나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욕망에 휩싸이게 되는 경우다. 이때 수많은 리더들이 오직 자신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윗사람에게만 시선이 옮아가고 동료나 부하직원은 보이지 않게 된다. 중장기적 비전과 목표보다는 당장 효능감을 보여주는 단기 목표에 집착한다. 듣고 심사숙고하기보다 빠르게 판단하고 밀어붙이려는 습성 역시 강해진다.
이때쯤,
"김 상무 승진하더니 사람이 변했네"
라는 수근거림이 여기저기 들려온다.
이런 급작스러운 방향전환으로 일시적인 성과를 몇 차례 낼 수는 있어도 선순환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충분히 숙고해 자신만의 통찰로 이어지는 과정을 수시로 생략한다. 주변의 평판은 나빠지고 점점 고립되기 시작한다. 단기 성과에 매몰된 시야는 큰 그림, 장기적 관점의 이익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억지로 짜낸 단기 성과는 생각보다 그 파괴력이 크지 않고 지속성도 없다. 결국 자신을 효과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는 조바심에 빠져 더 독선적이고 조급한 판단을 남발하며 자멸의 수순으로 가는 그림은 우리 일터에서 꽤 흔하다.
자기 인식과 타인 인식의 차이를 알아보는 도구인 '조하리의 창(Johari Window)'을 통해 보면, 독선적 리더들은 자신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맹목의 창(Blind Area: 나는 모르고 남은 아는 영역)'에 갇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독선과 조급함이 조직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구성원 모두가 알고 있지만, 권위에 취한 리더 본인만 까맣게 모르는 경우다. 리더의 지위가 올라갈수록 '맹목 유형'이 많아진다는 통계적 팩트는 현장에서 리더들이 왜 그렇게 수시로 고립되고 또 성장이 멈춘 채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근거가 아닐 수 없다.
현역 시절, 현장 리더 대상 워크숍 과정으로 '마중물 세션'을 진행한 적이 있다. '마중물 세션'이란 펌프로 지하수를 길어 올리기 위해 위에 넣는 마중물처럼, 꽉 막힌 리더들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위한 시간을 뜻한다. 자연히 과정 소개 이후 첫 프로그램으로 세션이 진행됐다.
당시 현장 리더들은 수년간 지속된 구조조정과 리더 처우 불만으로 회사와 백오피스(사무직)에 대한 반감이 컸는데,
'어디 뭐라고 떠드나 드러나보자'라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은 자세만으로 그 반감이 고스란히 드러나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사전에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이전의 워크숍과는 다르게 그들의 불만을 들어보는 세션을 워크숍 시작부터 집어넣었던 것.
"자 지배인님들 요즘 힘드시죠? 알죠. 회사가 잘못하고 있는 거. 저도 중간에서 죽겠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야 하는 일터인데, 뭐라도 해봐야죠. 그래서 오늘은 지배인님들 불만이 뭔지 허심탄회하고 듣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오프 더 레코드. 여기서 나온 이야기들은 이유불문, 종류불문 그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약속드립니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리더들은 5분 여가 지난 후 속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누군가 인사담당임원에 대한 불만으로 물꼬를 트자 그야말로 봇물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나는 철저히 그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해주었다. 그렇게 약속된 2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열기는 식지 않았다. 쉬는 시간까지 희생해 도합 2시간 30분이 지난 후에야 세션은 종료됐다.
그다음 세션은 거짓말처럼 순조로웠다. 이미 속내의 불만들을 마음껏 털어놓았기 때문일까? 담배와 커피로 마음을 식히고 들어온 리더들의 태도는 마중물 세션 때와는 정반대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래, 회사도 거기 이 차장도 다 사정이 있겠지. 이해는 한다고~"
최고참 지배인의 멘트를 시작으로 불과 10분 전 그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의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방법론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의견들을 꼼꼼히 받아 적었다. 모든 세션이 종료된 후 당장 개선이 가능한 부분과 중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할 부분을 꼼꼼히 정리해 CEO에 보고한 후 차례차례 실행에 옮겼다. 자신들의 의견이 실제로 반영되는 확인한 리더들의 시선이 완연히 달라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각도로 의견을 수렴하라
지혜로운 리더라면 마치 훌륭한 마케터처럼 구성원들의 다양한 생각과 날 것의 의견들을 테이블 위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함에 있어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것이라는 심리적 안전감을 심어주고, 때로는 리더 자신의 취약점마저 기꺼이 드러내어 의견의 '확산(발산)'을 유도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성군으로 불렸던 군주들은 대개 듣기의 달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영조실록에 임금이 잠행을 수시로 나가 백성들과 어울리거나, 청계천 준설 공사를 지시하고 친히 공사현장을 방문해 주민과 공사인부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고 실제 정책에 반영하였다는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중국의 3대 성군으로 꼽히는 당태종 역시 경청에 관한 일화가 인상적이다. 당태종은 당고조(이연)의 둘째 아들로 형제간 알력 싸움에서 승리해 황제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형(태자)의 책사였던 위징을 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재상으로 등용해 쓴소리를 자처해 듣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성정을 베풀었다는 기록 역시 일맥상통한다.
정보의 홍수라는 이 시대에 무엇이 나에게 필요한 진짜 정보이고 아닌지를 판별하는 능력이야말로 필수다. 그러려면 일단 많이 접하고 들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리더는 결과가 아니라 사고를 분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인간의 일에 100% 정답이란 있을 수 없으니 그 사실을 인정하고 각자의 진짜 생각을 투명하게 나눌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혹여 PPT처럼 겉으로 그럴듯한 포장, 화려한 그래픽 같은 것에 현혹되기 쉬우나 그럴수록 텍스트와 행간에 담긴 맥락, 본질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진짜 메시지를 흐리는 주요인. 어쩌면 핵심메시지가 없을 수도 있는 현란함에 현혹되지 않고 본질을 꿰뚫으려는 의지와 지속적인 노력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다
데이터를 잔뜩 모았다고 끝이 아니다. 고객 의견을 충실히 들었다고 저절로 히트 상품이 탄생하지는 않듯, 진짜 실력은 확산 그다음, 수렴에서 증명된다. 중구난방 흩어진 파편들 속에서 진짜 가치를 포착해 내고, 조직의 방향성에 맞게 재배치하여 쓸모 있는 대안으로 스케일업(Scale-up)하는 것. 즉, 확산된 의견을 날카로운 안목으로 '수렴'해내는 안목이야 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의 정점이다.
리더들은 흔히 너무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웩더독(Wag the dog)' 꼬리가 본체를 잠식하는 현상, 리더에게 현명한 판단을 위한 숙고의 시간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수렴한 다양한 의견, 정보, 가능성들은 반짝이는 구슬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것들을 조합해 의미와 용도를 가진 실질 형태로 재탄생시키는 일이야 말로 리더의 덕목이다.
단순한 감이 아니라 충분한 데이터와 숙고의 과정이 필요한 것. 그 과정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의 감은 통찰의 형태로 비로소 완성된다.
“모두 말하게 한 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 아는 것”이야말로 리더의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