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측은지심_ Self Awareness_ 2. 감정관리
"나는 감정이 메마른 사람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S모 그룹의 오너였다. 탈세로 실형을 살다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그 이듬해 신년 인사였을 것이다. 그는 이 말도 뒤에 덧붙였다
"공감능력도 부족한 사람입니다."
전 그룹사 구성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회장님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고백.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커밍아웃이면서 동시에 시종일관 당당한 표정 때문이었다. 나는 그 이면에서 인간성 결여의 문제의식이나 부끄러움보다는 '나는 지극히 이성적인 경영자'라는 은근한 자부심을 읽었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고 했던가?
당시 재직회사 CEO도 미팅 자리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나는 공돌이 출신이라 감성, 공감 이런 거 잘 몰라..."
그 표정 역시 회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적 면모는 현격하게 결여되어 있지만 숫자와 데이터에는 탁월한 이 시대의 엘리트라는 뿌듯함이 한껏 서려있었다고나 할까?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경영자의 숙명이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기시감. 비단 어느 한 그룹, 한 회사의 일부 경영자 이야기일 뿐일까?
이성지능 편중 사회, 괜찮을까?
우리 시대의 엘리트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공부 잘하는 사람'이다. 높은 IQ, 좋은 학벌, 외국어 점수 등 대부분 이성지능과 관련되어 있다. 기업의 채용 과정 역시 거듭된 이성지능 검증에 가깝다. 인성면접이라는 절차가 있지만 지극히 형식적이다. 심각한 인성 결여가 발견돼도 스펙이 압도적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입사 후 이들은 인간적이지 않다거나 일머리 없다는 논란에 종종(생각보다 훨씬 큰 빈도로) 휩싸이지만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성과주의에 손쉽게 면죄부를 받는다.
물론 그들은 지난 수십 년간의 압축성장과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근면성실을 미덕으로 정해진 답을 달달 외워 빠른 시간 내에 찾아내는 능력은 극도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시대의 속도전과 딱 들어맞았다. 높은 확률로 좋은 평가를 받고 승진을 거듭해 권한과 책임을 모두 손에 쥔 리더가 된다. 그 과정에서 부작용도 생겼다. 온갖 인간성 파괴의 문제, 예컨대 갑질, 직장 내 괴롭힘, 모욕, 차별 등 조직의 어두운 이면. 수많은 논란에도 그저 사회악 정도로 여겨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언제까지고 정답일 것만 같았던 직장인 사회에 몇 년 사이 어마어마한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무려 3년여간의 팬데믹을 겪었고 인간의 이성지능을 아득히 능가하는 AI가 출현하면서 자연스럽게 양적성장, 1차원적 속도전의 시대가 저물었다. 대신 질적성장, 고차원 가치 추구의 시대로 빠르게 이동했다. 직장인들은 완전 재택근무라는 전에 없던 일하는 방법을 경험했고 시장과 고객은 기업의 상품과 서비스뿐 아니라 가치관, 철학, 환경문제 등 더 높은 차원의 가치에 공감하고 열광한다. 매년 매출의 1%(영업익이나 순익이 아니다)를 환경 단체에 기부하고, 'Don't Buy this Jacket'이라는 캠페인으로 자사의 상품을 사지 말라고 광고하는 [파타고니아] 같은 회사가 속속 등장했다. 충성고객을 넘어 자발적 팬덤이 등장했고 기업은 더 이상 인간에 대한 이해, 공감, 정서적 터치를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해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본질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에 이전의 이성중심 엘리트, 고인물이 돼버린 리더들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감정 없는 이성적 판단' 이라는 거짓말
감정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다. 심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리사 펠드먼 배럿 Lisa Feldman Barrett의 '구성된 감정 이론(Constructed Emotion)'에 따르면, 뇌는 외부 자극과 몸속 신호(심장 박동, 호흡, 근육 긴장 등)를 수집해 ‘지금 상태’를 평가하고, 과거 경험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하여 이건 위험이다, 이건 기회다라는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즉, 감정은 이미 결정되어 주어진 지문 같은 것이 아니라 신체에서 오감을 통해 받아들인 대내외 감각을 뇌가 재구성해내는 예측 시스템이란 말이다. 우리가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착각하는 순간에도 감정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시급 한 지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역할을 한다. 감정이 없다면 데이터는 그저 숫자일 뿐, 선택은 끝없이 미뤄진다는 의미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Elliot 사례를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한 바 있다. Elliot은 전전두엽(특히 감정과 가치 평가를 담당하는 복내측 전전두피질) 부위를 다친 후, IQ와 논리력은 그대로였지만 점심 메뉴, 약속 시간, 문서 작성 순서 같은 아주 사소한 선택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이유는 감정이 사라져 ‘어느 쪽이 더 낫다’는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숫자와 데이터만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야말로 세계 토픽감이 아닐 수 없다. 인간 AI의 출현을 뜻하는 것일 테니. 결국 감정은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변수가 아니라 당신의 모든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근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성지능'만' 뛰어나선 안된다
다중지능을 주창한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인 하워드 가드너는 "감성지능은 모든 지능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성지능이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여전히 직장인에게 이성지능은 중요하다. 단, 과거처럼 이성지능에만 올인하다시피 하는 과도한 스펙중심 사회는 위험하다. 답은 균형에 있다. 차가운 가슴과 뜨거운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필요하다.
기업은 이에 따라 인재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기존의 이성지능 검증에 못지않은 감성지능 검증 절차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 이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라는 감성지능은 가치소비, 가치노동이 개인화된 감성적 접근이 필수인 새로운 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역량이다. 감성과 이성 어느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인재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엘리트'로 적합하다.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라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숫자와 데이터에 의거해 의사결정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 스스로 그런 사람이 라고 생각한다면 정신 차려라. 사실이라면 세계토픽감이다. 설사 그런 능력을 가졌다 해도 문제다. 그 부분에 있어 인간을 아득히 앞서는 AI 존재 때문이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데이터와 숫자에 능숙한 사람일지라도 AI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상대도 안된다. AI가 못하는 것, 인간의 마음, 감정, 기질, 태도를 알아보는 감성지능에 능해지는 것만이 앞으로의 직장생활에 경쟁력을 갖출 유일한 길이다.
감성지능은 학습할 수 있다
감정은 정해진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감정이 생성되는 원리를 이해하면 내 감정 상태를 확인하고 구체적을 분류하고 이름 붙일 수 있게 된다. 학습하고 강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감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신체의 내외부 감각이 편도체를 통해 대뇌의 감정 처리 시스템으로 보내지면 '유인성(Valence) - 유쾌한가 불쾌한가', '흥분도(Arousal) - 평온한가 동요하는가'라는 두 축을 기준으로 크게 분류되고 개인의 과거 경험을 토대로 구체적인 감정이 생성된다. 감정의 발견』의 저자 마크 브래킷 Marc Brackett은 이러한 감정 생성의 메커니즘을 이용해 아래와 같은 mood meter를 만들었으니 찾아서 활용해 보라.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갈등 상황을 겪었을 때, 그 순간 자신이 느꼈던 신체적 반응과 내면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기록해 보라. 신뢰하는 동료나 팀원에게 나의 행동에 대한 솔직한 피드백을 요청해 보라. 혼자만의 힘으로, 닫힌 1차원의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리더라면 부디 마음을 열고 시야의 차원을 높여라.
CEO들은 뛰어난 지성과 전문경영능력으로 고용되지만,
감성지능의 부족으로 해고된다.
- 다니엘 골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