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측은지심_ Self Awareness_ 3. 회복탄력성
번아웃
이 단어에서 자유로울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
특히 10년 차 이상 중간관리자쯤 되면 번아웃은 꽤나 심각한 직업병에 가깝다. 일단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 어쩌다 회식자리에서 거하게 술이라도 마셨다 하면 다음날 회복도 더디다. 하루를 통째로 날리기 일쑤다. 매년 건강검진에선 '고혈압' '고지혈' '지방간' '혈당장애' 같은 성인병들이 줄줄이 발견되고 얼굴 주름과 새치는 나날이 늘어간다. 어느 순간 하루아침에 확 늙는다.
일도 재미없다. 성취감을 느껴본지도 오래다. 그렇다고 성장한 것 같지도 않다. 늘 제자리걸음이다. 왜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루틴 한 일들은 끝이 없고 일한 만큼 보상이나 제대로 받으면 다행이다. 사람 관계는 갈수록 어렵다. 위로는 극단적인 결과주의자에 종종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의심스러운 상사의 닦달에 시달리고, 아래로는 개념 없고 제멋대로인 데다 자기밖에 모르는 잘파 후배들에게 치인다.
퇴근 후에는 좀 괜찮을까? 만원 지하철에 버스에 시달리며 집에 오면 온몸에 힘이 빠진다. 조금 누워있어야지 하다가 보면 12시다. 고양이 세수하듯 씻고 잠자리에 들면 눈 감은 지 1분 된 것 같은데 아침이다. 주말은 또 어떨까? 소파에 찰떡 늘어지듯 붙어서 리모콘만 까딱거리고 싶지만 그마저도 사치다. 때 되면 꽃놀이에 가정의 달에 여름휴가에 단풍놀이에 크리스마스에 남들 다 한다는 이벤트도 챙겨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도 녹록지 않다. 다달이 대출 이자에 아이는 사춘기를 지나 본격 입시생이 되어 생활비도 빠듯하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하~행복한데, 그래도 남들 하는 만큼은 발맞춰 가는 것 같은데...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 바로 가고 있는 게 맞나? 피곤하다. 다 놓고 쉬고 싶다.'
파릇파릇한 20대 시절의 꿈, 패기, 열정 같은 건 온 데 간데없고 그저 '가늘고 길게만 가자'는 게 유일한 목표로 남았다. 아주 가~끔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다.
'이거, 나만 이래?'
아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만 이런 건 아닌 모양이다. 2024년 잡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약 70%는 번아웃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겨우 70? 에이 더 될 것 같은데? 모르긴 몰라도 심각한 번아웃에 빠져있지만 정신력 운운하며 혼자만 모르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도 꽤 될 것이다.
번아웃 증후군은 만성적인 직업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하는 심리적, 신체적 탈진 상태를 의미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의학적 질병은 아니지만, '성공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만성적인 직장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번아웃의 원인은 물론 복합적이다. 주로 과도한 업무량,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수동적 업무의 반복, 업무를 결정하고 수행하는 데 있어 통제력 상실, 불충분하거나 불공정한 보상, 관계의 어려움, 소속감 결여 따위 요인들을 꼽을 수 있다.
이는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지극히 사회적인 문제다. 어쩌면 양적 성장과 속도전에 전력해 온 현대 자본주의의 민낯인지도 모른다.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만능주의와 인간을 한낱 부품으로 전락시키고 과정보다는 결과에 치중하는 극단적 결과지향주의가 그 주범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결과 나만의 개성에 따라 개인화된 인생을 설계하고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길을 모범답안을 무지성으로 따르는 강박이 만연해졌다. '나는 누구인가?' '뭘 할 때 즐겁고 행복한가?' '언제 성취감을 느끼는가?' 같은 진지한 내면의 성찰보다, 끝없이 외부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는 몸부림에 익숙해졌다. 더불어 함께 잘살기보다는 나 하나의 안위와 성공에만 집착하는 행태가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고 직장 내에서는 갑질, 모욕, 집단 괴롭힘 따위 인간성 파괴의 부작용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이런 문제들이 번아웃이 만연한 사회와 조직의 결과물인지, 그런 조직이라서 번아웃이 만연하게 됐는지도 알 수 없게 됐다.
더 큰 문제는 오늘날 직장인들이 번아웃으로 인한 에너지 고갈 및 피로감, 냉소주의와 체념의 일상화, 업무 효율 저하 등 심각한 부작용을 겪으면서도 "다 그렇게 살아"라고 체념하고 순응해 버리는 태도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사회문제라며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 버릴 수도 없게 됐다. 나는 더 이상 전 사회적인 가스라이팅에 속아 나 자신을 무의미하게 소비하고 갈아넣기 싫어졌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이야'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는 나 스스로를 그렇게 알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잘 받지도 않거니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곧잘 푼다고 생각했다. 그 중심에 술이 있었다. 주 2~3회씩 회식을 하며 폭음을 하고 2차, 3차를 즐겼다.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노래방에 가 마이크를 잡으며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풀어왔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 주체적인 나만의 가치관으로 내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고도 믿었다. 정치하지 않고 남탓하지 않고 오로지 내 실력으로만 이 조직에서 성공해 보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그래서 임원 앞에서도 내 의견을 서슴없이 말했고 때때로 의견충돌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게 '나 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43세가 되던 해 마치 끓어오르던 주전자가 폭발하듯 정신적, 신체적 문제가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공황장애와 역류성 식도염의 동시 발병. 몸과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나는 나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나의 단점, 온갖 문제점들을 듣지 않고 외면하고 자만해왔다는 사실을. 감성지능이 현격히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멈춰 서서 성찰하지 않고 '소신'을 가장한 아집을 부리고 있었음을.
EQ(Emotional Quotient)개념을 대중화시킨 다니엘 골먼 Daniel Goleman은 감성지능이 높은 사람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8가지를 들었다.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하고, 좌절에도 앞으로 나아갈 줄 알고, 만족을 뒤로 미루며 충동을 억제하고, 자기 기분을 통제하고, 걱정거리 때문에 사고력이 저하되지 않게 하며, 감정이입을 할 줄 알고, 희망을 품을 줄 아는
하나같이 회복탄력성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회복탄력성은 분명 뛰어난 감성지능과 맞닿아 있다.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는 감성 불능자들이 누적된 스트레스를 인지하지 못하고 결국 번아웃에 빠지고 마는 이유.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일하면서 쉰다. 정신력으로 이겨낸다. 라고.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병이 생기는 원리와도 같다. 신체 내외부에 가해지는 데미지가 장기간 누적되다 어느 순간 선을 넘으면서 증상이 표면화되는 것처럼, 번아웃 역시 마찬가지다. 끓기 직전의 주전자처럼 정신적 데미지는 지속적으로 쌓이면 Boiling point에 이르러 결국 폭발하고 만다. 그전에 적절히 수시로 스트레스라는 김을 빼주어야 한다.
일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직시하려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좋은 현실이든 불편한 현실이든, 그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일이 잘 풀릴 때는 “내 능력 덕분”이라는 자만에 빠지기 쉽고, 반대로 일이 꼬일 때는 모든 잘못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자책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내가 아무리 준비해도 외부의 변수는 늘 존재하고, 내가 아무리 실수해도 반드시 내 책임만은 아닐 수 있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바로 이 복잡한 구조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연습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피곤한 하루 끝에 거울을 보며 “왜 이렇게 초라하냐”라고 자책하는 대신, “오늘도 버텨낸 나, 수고했다”는 작은 위로를 건네 보라. 업무에서 실수했을 때 “왜 이것밖에 안 되지?”라며 몰아붙이기보다 “이번에 배웠으니 다음엔 더 잘할 수 있다”라고 다독여야 한다.
자신에게 긍정적인 말을 반복하는 습관은 무의식에 힘을 준다. 반대로 부정적인 감정이 떠오를 땐 억누르지 말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단지 “아, 내가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하고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시작된다. 중요한 건 그 감정을 내 잘못으로만 해석하지 않는 태도다. 때때로 세상이, 환경이, 그리고 단순한 우연이 원인이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마음의 짐이 가벼워진다.
Pause, 아무리 바빠도 잠시 멈춰 설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래야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힘들 때 힘들다는 감정을 인식하고 왜 힘든지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라. 그리고 표현하라. 엄살처럼 보여도 괜찮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마음과 몸속에 들어 있는 끓는 주전자다. 뚜껑이 펄펄 끓은 열기로 날아가기 전에 적절히 김을 빼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 내면과 신체적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원인을 알아야 대응도 가능하다.
번아웃의 조짐을 포착했다면 그 즉시 행동하라. 잘 쉬는 사람이 결국 일도 잘한다. 일한 것도 아니고 쉰 것도 아닌 어설픈 상황은 절대로 만들지 말라. 쉬려면 화끈하게 쉬어라. 회사의 시간과 나만의 시간을 명징하게 분리하라. 특히 퇴근 후와 주말의 시간을 오롯이 나의 시간으로 만들라. 일과 무관한 취미 활동을 1가지 정도 가져라. 내가 뭘 할 때 즐겁고 몰입하는지 내면의 성찰을 통해 신중히 결정하라.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의도적인 '무활동'을 통해 뇌를 쉬게 할 때, 비로소 창의적인 사고 역시 가능해진다. 물멍, 불멍, 나뭇잎 멍 뭐든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스마트폰과 SNS로부터 벗어나는 시간을 가져라. 기상 전과 후 최소 30분은 스마트폰에서 멀어져라. 알람이 문제라면 아날로그시계로 해결하라. 중요한 일을 할 때 스마트폰을 꺼두거나 비행기 모드로 지정하라. 아예 안 보이는 곳에 두는 것도 방법이다. 인스타 등 SNS는 시간을 정해두고 그 시간에만 검색하라. 습관적으로 스크롤링하는 습관이 뇌와 눈을 피곤하게 한다.
가짜 노동은 눈에 보이기엔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과와 무관한 활동이다. 목적 없는 회의, 보여주기식 보고서, 습관적 야근, 확인만 하는 수많은 메신저 메시지…. 이런 일들은 바쁘게 움직이게는 하지만, 회사와 나 자신 어느 쪽에도 실질적인 가치를 남기지 못한다. 오히려 ‘나는 열심히 일했다’는 착각 속에서 진짜 중요한 일을 할 시간과 에너지를 갉아먹는다. 결국 번아웃을 가속화하는 주범이 된다.
먼저 ‘가짜 노동 리스트’를 작성해 보라. 하루 혹은 일주일 동안 내가 한 일을 적고, 그것이 성과와 연결되는지 냉정히 따져보라. 성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그 과정에서 성취감을 얻을 수 있고 조금이라도 성장할 수 있다면 괜찮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과감히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
핵심은 내 가용 자원을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고 발전할 수 있는 일에 '몰빵'하는 것이다. 하루 중 가장 집중력이 높은 시간대를 파악하고 그 시간에 1순위 일을 몰아서 처리하라. 나머지는 뒤로 미루거나 버려라. 그 순간 스마트폰 알림이나 사내 메신저는 과감히 꺼두라. 생각보다 세상은 잘만 굴러간다. 결국 성과를 내는 사람은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해야 할 일에 몰입하는 사람이다.
번아웃이라는 질병은 그냥 내버려 두면 저절로 치유되는 '감기' 같은 병이 아니라, 차곡차곡 누적되어 어느 날 갑자기 발현되는 치명적 중병에 가깝다. 그 치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아는 것부터 시작한다. 언제 스트레스를 받고 또 언제 풀어지는지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직은 개인이 모여 만든 집단이다. 건강한 개인들이 많아져야 조직도 건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