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미룩을 아시나요? 우리는 왜 획일화 사회가 되었을까

Ⅰ.측은지심_ Empathy_ 1. 色(다양성)

by 릭스leexㅡ캐리컬처

'모나미룩'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흰색 기본티(상의)와 검은색 슬랙스(하의)를 코디한 2030 남성들의 패션을 일컫는데, 흰색 몸통과 검은색 헤드를 가진 모나미 볼펜을 연상시킨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깔끔하고 무난한 기본차림이지만 개성과는 거리가 멀다. 너도나도 착용하다 보니 마치 유니폼 같기도 하다.


겨울엔 또 어떤가? 길거리는 온통 시커먼 롱패딩의 물결이 된다. 간혹 흰색 롱패딩도 끼어있지만, 대세는 어디까지나 검정 롱패딩이다. 뒷모습만 봐서는 누가 누구인지 당최 구분도 힘들다. 혹독한 추위에 그만한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단순히 기능적인 이유라고 보기엔 뭔가 과하고 기괴하다.


이런 경향은 비단 패션뿐만이 아니다.


"한국 도로에는 온통 검정 아니면 하얀색 차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한국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은 종종 시내 도로를 보고 놀라는데, 그 이유가 획일화된 자동차 색깔 때문이라고 한다. 당장 주차장에만 나가봐도 검정, 하얀, 은색차가 대략 8~90퍼센트는 되지 싶다. 특별히 튀지 않고 무난하다는 이유에 더해 차 색깔에 따라 중고차 가격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튀는 색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고 감가가 많이 되어 똥값이 된다는 이유다. 거기에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다 보니, 지극히 무난한 색을 찾는 사람들이 압도적일 것.


개성이고 뭐고 한번 유행을 타면 어떻게든 그 안에 섞여야 직성이 풀리는 집단심리, 혹시 튀지나 않을까? 불안함이 우리 사회 전체를 강박에 빠지게 했다. 무난병, 중간병이라는 중증 사회적질병에 걸린 우리.


우리 사회의 다양성 수준은 어떨까?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통계청과 함께 실시한 '2024년 문화다양성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은 우리 사회의 문화다양성 수준을 100점 만점에 50.8점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다양성이란 사회문화적 배경(인종, 종교, 가치관, 생활방식, 취향, 성별, 연령)에 따른 차이를 존중하고 누구나 사회문화적 배경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문화적 표현을 할 수 있으며 국내외 다양한 문화상품에 대한 모든 국민의 공정한 접근이 보장되는 정도를 의미한다.


100점 만점 중 50점이라면 딱 중간 수준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수준이라고 1차원적으로 생각하고 넘기기엔 뭔가 석연찮다. 패션, 교육, 직장, 결혼, 육아, 집문제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하나의 정석, 모범답안이 있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획일화'는 무서울 정도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런 분위기를 감안하면 0점에 가깝더라도 놀랍지 않다. 향후 다양성 수준이 좋아질 것이라 예측했다는데 글쎄?


특히 직장에 들어오면 그 획일성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다. 모두가 같은 곳을 보고 일치단결 힘을 합치는 건 좋은데, 한치의 다름을 용납하지 않고 웬만해선 No를 외칠 수 없는 조직문화는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최근 우후죽순 생기는 스타트업과 Z, 알파 세대를 중심으로 완화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위계와 질서가 있는 전통 기업조직 치고 체질적 경직성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이야기는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가만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처세가 일생의 지혜처럼 통용되고, '가늘고 길게 살아남기'가 유일한 인생 목표가 된 지 오래다. 행여 팀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기라도 하면 '회사는 동호회가 아니!'라며 고인물 윗선의 불호령이 날아든다. 개인이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성과보다 성취감을 추구하면 '자아실현은 다른 데서 하라'며 비꼰다. '회사는 전쟁터, 밖은 지옥'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에 저항 없이 수긍한다.


아니 왜?

회사는 동호회가 되면 안 되는가? 자아실현의 장이 되면 안 되는가? 놀이터가 되면 안 되는가?


이런 사회, 정말 괜찮을까?

왜 이렇게 됐을까? 너는 꿈이 뭐야? 뭘 할 때 즐거워? 언제 행복해? 따위 각자의 타고난 기질과 적성, 철저히 개인화된 다양성을 묻고 탐구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의대, SKY 가야지? 좋은 회사 취직해야지? 줄 잘 서야지? 결혼해야지? 대출받아서 집사 아쟈? 애 낳아야지? 끝도 없이 강요된 타인의 스크립트(Social Script)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살아온 탓이 크다.


이런 지독한 획일성이 비단 외면의 것일 수만은 없다. 좀처럼 자신의 색을 드러내지 않고 또 묻지도 않는다. 그것이 개인적 취향일 수도 있고, 인생의 가치관 일수도 있고, 정치색일 수도 있고, 한마디로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그저 낯설고 불편할 뿐이다. 다만 미루어 짐작하고 결이 같다고 생각하면 속으로 내적 친밀감을 느끼거나 그 반대라면 선을 긋거나 칼을 간다. 겉으로는 남들과 똑같은, 적어도 비슷한 가면을 쓰고 자신의 내면은 철저히 숨기는 데 능하다. '모난 정이 돌 맞는다'는 속담이 본능처럼 내재화되기라도 한 것일까?


물론 이런 속성이 마냥 무용한 것은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압축 성장과정에서 이런 속성은 극도의 생산성 추구라는 시대적 가치와 맞물려 나름의 효과를 냈다. 그 덕에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빠른 성장으로 선진국 반열에 오르는 막차를 타기도 했다.


문제는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거다. 3년여의 코로나 팬데믹과 인간의 지능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AI의 출현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변화된 시대에 과거의 셈법과 정답지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이미 잘 알고 있다. 개인의 가치관을 중시하는 '가치소비'가 대세가 되고. '착한 소비'나 '친환경 소비' 같은 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에 수긍하면서, 사회적, 전지구적으로 인간적이고 상생을 추구하고 보다 항구적인 미래를 말하는 기업과 브랜드에 소비자가 몰리고 열광하는 시대가 됐다.


지금 이 시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역량이야말로 다름 아닌 '다양성'이다. 획일화된 조직 문화는 창의성과 혁신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이전의 케케묵은 '정답'과 '정석'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새로운 시도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직원들은 상사나 조직이 원하는 답을 찾으려 애쓰고,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놓기보다는 안전하고 보편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이처럼 경직된 문화는 소통 문제도 초래한다. 다른 의견이나 소수의 목소리는 '정답'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어 쉽게 묵살되기 쉽다. 이는 그렇게 외쳐대는 수평적 소통을 어렵게 하고, 조직 내 다양한 아이디어가 교류될 기회를 박탈한다. 더 나아가, AI를 통해 개인화된 정보와 업무 환경이 조성되면, 직원들은 각자의 '필터 버블'에 갇히게 될 수 있다. 이는 동료들과의 협업을 위한 자연스러운 의견 교환을 방해하고, 서로 다른 관점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줄인다. 결과적으로 팀워크가 약화되고, 조직 구성원 간의 심리적 거리와 고립감이 심화될 수 있다.


무엇보다 정신건강에 해롭다. 진짜 내 속마음을 꾸역꾸역 구겨 넣어 참고, 인내하고, 다들 그렇게 살아 라는 체념으로 일관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다. 결국 소모적인 대립과 충돌이 여기저기 끊임없이 야기되고, 작은 차이로 편을 나눠 혐오와 배척을 조장하고, 갑질, 괴롭힘, 인신공격 따위 비인간적인 행태의 총량은 나날이 늘어난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양성이 고사되고 경직화가 심화되는 조직이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이거 원 사람이 살겠나?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다. 스펙트럼적 사고를 강화하라

인간의 일에 정답은 없다. 한점 오점 없이 완전무결한 사람 역시 없다. 세상은 흑과 백 일도양단, 명쾌하게 판단되는 말랑한 곳도 아니다. 모든 것은 스펙트럼이다. 양 극단은 소수고, 대다수는 중간에 수렴한다. 지켜야 할 선이 있고 우린 그것을 단계적으로 규율, 법, 상식, 도덕이라고 부른다.


그 선을 현저히 벗어나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약간의 다름은 얼마든지 존중되고 더 나아가 권장되어야 한다. 서로 다름은 불편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시각이 맞부닥치고 화학작용을 일으켜 전혀 새로운 무엇을 보게 하는 재료가 된다는 사실 역시 이미 알고 있다.


길 잃은 개미의 역설이란 개념이 있다. 개미는 앞서가는 선두 개미가 남긴 페로몬 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선두가 만들어 놓은 길에서 벗어나 실수로 다른 경로를 찾은 개미들이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인 길을 찾아낼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는 자못 흥미롭다.


인간사회라고 다를 게 없다. No risk No taking, 정해진 길을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행동은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가치는 바로 이 불확실성에 숨어 있다. 하나의 정해진 답이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다양한 사고와 행동, 다소 무모해 보이지만 과감한 도전이 전제가 될 때 진짜 변화는 시작된다.


파랑이라도 같은 파랑이 아니다.


나를 적당히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위선'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실체를 숨기고 어떤 목적을 위해 거짓된 말과 행동을 하는 것. 그래서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 생각에 반대다. 위선은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쿠션액션이라고 믿는다.


위선은 일종의 옷차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옷을 입는 이유는 단순하다. 몸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진화한 문명인으로서 관계 안에서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다. 속옷만 걸치고 나가면 자연스러울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반대로 너무 격식을 차려서 여름에 두꺼운 정장을 입거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화장을 하는 사람도 눈에 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옷차림은 결국 상황과 장소에 맞춰 나를 드러내고 감추는 일이다.


위선도 그렇다. 적당한 위선은 상대를 배려하는 격식이자 예의다. 회의 자리에서 굳이 날카로운 본심을 그대로 쏟아내지 않고, 조금은 다듬어서 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히려 위선을 경멸한다고 말하며 “나는 있는 그대로 솔직하다”는 사람 치고, 대체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솔직함은 마치 다들 옷 잘 차려입은 자리에 혼자 레깅스 입고 나타나 “이게 나야”라고 우기는 꼴이다. 자연스러움, 솔직함이 아니라 무례함이다.


물론 위선도 적당해야지 과하면 가식이 된다. 늘 가면을 쓰고 혼자만 딴 세상에 있는 듯한 괴리감을 심어준다. 결국 중요한 건 균형이다. 옷차림을 상황에 맞게 고르듯, 위선도 상황에 맞게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너무 솔직하지도, 너무 가식적이지도 않아야 한다. 장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되, 단점이나 취약점 또한 과감히 드러낼 필요도 있다. 완벽하지 않은데 완벽한 척하는 사람처럼 꼴불견도 없다. 나 자신을 포함한 누구라도 약간의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다는 전제는 열린마음을 가능케 한다.


무의식적 편견은 누구에게나 작동할 수 있음을 인지하라

"나는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장담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편견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떤 종류건 사회에 통용되는 편견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에 실제로 영향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는 심리학과 사회학에서 널리 논의되는 중요한 관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지적 편향(cognitive bias)과 사회 학습 이론(social learning theory)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수많은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단순화된 사고방식, 즉 휴리스틱(heuristics)을 사용하는데, 편견 역시 일종의 휴리스틱으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특정 집단이나 상황에 대해 미리 판단하게 만드는 지름길 역할을 한다. 미디어나 사회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고정관념은 이러한 무의식적인 사고방식에 깊이 각인될 수 있다.


사회 학습 이론은 우리는 타인의 행동이나 사회적 규범을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학습한다는 개념으로 미디어나 대중문화가 특정 집단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사회적 통념이 특정 역할을 강요할 때, 우리는 이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게 된다. 이는 결국 결정적인 순간, 의도치 않게 편견에 기반한 사고나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설사 “나는 차별하지 않는다”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며 반복적으로 사회적 편견의 실체에 노출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특정 집단이나 타인에 대해 긍정·부정적 연상을 갖게 된다. 언론·정치·문화가 반복적으로 “어떤 집단은 열등하다” “어떤 배경은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주입하면, 그것을 ‘사실’로 경험하지 않아도 사고 틀이 형성된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구조적 편견’이라고 부른다. 개인의 악의와는 별개로, 사회 전반의 틀이 개인의 사고에 침투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나는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부터 그들을 유심히 지켜보라.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자기 확신에 빠져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고 조직 내 다양성을 고사시키는 주범이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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