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라는 칼, 함부로 휘두르면 흉기가 되는 이유

Ⅱ.수오지심_ Conscience_ 2. 도(刀)

인사팀 최 과장은 요즘 페이밴드 개편 작업을 하고 있다. 실무는 신 대리가 주로 한다. 최 과장은 신 대리를 수시로 불러 개편 방향을 지시한다. 임원, 사장용 보고서는 A,B,C 최소 세 개 이상 복수 버전으로 작성한다. 보통 A안이 채택될 확률이 높지만 최 과장은 적은 가능성이라도 대비해야 한다며 복수 버전을 고집한다. 신 대리는 야근은 물론 주말에도 나와 일을 한다. 무던하고 일 잘하는 신 대리, 끝없는 수정과 정말 필요한 건지도 모를 대안의 대안을 만드는 일에 진력이 나기 시작한다.


"신 대리 요즘 힘들지? 알아. 그래도 어쩌냐? 이거 되게 해야 하는 일이잖아. 다 끝내고 맛있는 거 사줄게."


최 과장은 그럴 때마다 귀신 같이 그 신호를 알아채고 신 대리를 다독인다. 얼핏 보면 최 과장은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대안을 찾아 일을 관철시키려는 유능한 인재로 보인다. 신 대리도 종종 최 과장 밑에서 일하는 게 힘들다고 토로하지만 그래도 배우는 건 많다고 인정한다.


우여곡절 끝에 관철된 페이밴드. 이번 테마는 상후하박(上厚下薄)이다. 경쟁사와 비교했을 때 윗직급의 임금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분석결과를 첨부했다. 보고서를 본 임원과 사장은

'우리 간부들 임금 수준이 이렇게 떨어진다고?'

의아해했지만 비교 데이터를 보고 결국 승인했다.


무려 두 달간의 야근, 주말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최 과장과 신 대리는 모처럼 회식을 하며 회포를 푼다.


"그런데 과장님 경쟁사 임금 비교 자료 말인데요. 아무래도 찜찜합니다. 우리는 기본급 기준이고 저쪽은 수당, 인센티브성 보상까지 포함한 거잖아요."

"다 그렇게 하는 거야. 그리고 이미 말했잖아. 경쟁사 임금 자료는 대외비라서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가 없다고, 대략 이 정도 수준이다 큰 그림 차원의 리퍼런스일 뿐이라고. 상무님도 그랬잖아. 그쪽에서 임금 자료 넘겨줘?라고. 괜찮아."


신 대리는 부분적으로는 최 과장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보고서 승인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동일직급 비교 데이터의 유효성에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데이터 수집과정에서 수당이 포함되고 안되고의 차이를 명확히 인지하지 않았던가? 의도가 다분한 눈속임이라는 찜찜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반면 최 과장은 또 한 건 했다는 생각에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그런 게 다 작전이지. 이런저런 사정 다 봐주면 우리 성과는 어떻게 올려? 회사는 전쟁터라고 전쟁터, 그 정도 마사지는 전략인 거라고. 알아? 승리를 위한 예술."


그 해 연말 이례적인 '상후하박' 임금조정의 혜택은 다름 아닌 최 과장에게로 향했다. 맡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 결과 발탁승진이 이루어졌고, 꽤 큰 폭의 임금인상이 뒤따랐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맡은 거의 모든 프로젝트의 수혜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최 과장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신 대리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거 뭐야? 부려먹고 일 시켜서 혜택은 다 지가 처먹고, 나는 밥 한 끼 사주면 땡이냐?'




직장에서 나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조직생활에서 순진하다는 평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전략적이지 못하고 목표지향적이지 않다는 평과도 같으니까. 실제로도 그랬다. 17년 커리어 동안 주로 조직문화, 교육 업무를 맡았던 나는 이상에 빠져 일을 했다.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 본질 따위를 들먹이며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논리로 보고서를 만들고 임원들을 상대했다. 그때마다 그들은 "좋은 이야긴데..." "현학적인데..." "현실과는 안 맞는데.." 라며 마땅찮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매사에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부끄럽게도 과장 진급 이후였다.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진짜 본심, 사심을 감추고 마치 공공익을 위한 일인 것처럼 교묘히 작전을 펼치는 이른바 전략가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좋게 말해서 전략, 나쁘게 말하면 기만과 꼼수. 현란한 그래프와 복잡한 데이터, 호감을 사는 능숙한 말발 속에 자신의 의도, 사심을 교묘히 감춘다. 마치 그런 일에 타고난 재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고 있자니 주눅이 들 정도였다. 이들은 사내정치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명확한 의도와 선명한 목표, 결정적으로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가시화돼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이후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눈앞의 결과를 내놓으라 닦달하는 임원과 의견충돌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연히 사내정치에도 젬병이었다. 그저 내 할 일을 찾아 묵묵히, 진정성을 가지고 해내면 그 자체로 평가받고 문제없이 직장생활을 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 제 발등 찍은 격이랄까?


어떤 일이든 현재 진행 중인 과정에서 그 음험한 속내를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대개 사심은 결과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그 편익이 어디로 향하는가? 누구에게 집중되는가? 를 유심히 살피면 그때야 아! 그래서 이걸 이렇게 했구나 알게 된다.


일은 그렇다 치고 인간관계도 예외 없다.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할까? 왜 저렇게 행동할까? 나에게 왜 친절하게 혹은 가혹하게 대할까?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술 한잔을 하자는 제안에도 두 눈을 굴리며 되묻는다


"왜? 그 자리에 누구 나오는데?"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자리라면 어떻게든 참석하고, 그렇지 않다면 고민 없이 내친다. 이런 이들이 조직의 중요한 정책을 검토하고 결정하는 실무를 맡으면 본질은 산으로 가기 일쑤다.


어느 해 회사는 갑작스러운 평가제도 개편계획을 공지했다. 전구성원 대상 외국어 테스트를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건데, 시행을 약 2개월을 앞둔 시점이었다. 기존의 지필 시험뿐 아니라 원어민 오럴 테스트를 추가하겠다는 선언. 왜 갑자기? 이 시점에? 현업은 그야말로 혼란에 빠졌다. 명분은 있었다. 서비스 직군인 데다 외국 고객의 증가로 외국어 실전 테스트가 필요하다는 것.


우여곡절 끝에 계획안대로 테스트가 이루어졌고 그해 연말 평가와 승진에 그 결과가 실제 반영됐다. 졸속으로 시행한 제도는 아니나 다를까 그 즉시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원어민 테스트 불합격자는 승진에서 제외한다는 최초 공지에도 불구하고 예외자가 속출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테스트를 아예 치르지 않은 사람도 승진명단에 오르면서 현업의 문의와 불만이 빗발쳤고 인사담당 임원은 끝내 사과문을 올려야 했다.


왜 이런 졸속 개편을 시도했을까? 그 속내는 역시나 결과에서 밝혀졌다. 2년 계약종료를 앞둔 인사담당임원의 실적 쌓기용 퍼포먼스였던 것이다. 뭔가 큰 거 한방이 있어야 한다는 조바심, '대체 이 시점에 왜?'라는 본질적 의문을 던지지 않고 무지성으로 순응했던 실무진의 환장의 콜라보. 그 결과 실무를 주도했던 인사팀은 하루아침에 욕받이로 전락했다. 회사와 인사팀은 무슨 일을 해도 영(令)이 서지 않고 의도를 의심받는 처지에 놓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회사, 괜찮을까?


전략은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 달성 시 혜택이 누구에게로 향하는가? 과정과 결과가 투명하게 공개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성공하면 그 자체로 좋고, 실패해도 원인을 찾기 쉽고 과정을 통한 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도무지 왜 하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 의도를 알 수 없고, 성공하더라도 그 혜택이 특정 개인, 소수 그룹에만 집중되는 일이라면, 그건 전략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심이 잔뜩 개입된 기만, 꼼수에 불과하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다수의 일반 구성원과 회사가 입게 마련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온통 의도를 가지고 제 이익을 관철하려는 습성, 상대방을 함께 발전하고 협업할 동료로 여기기보다 기만하고 속여서 이용해 먹으려는 악의로 가득한 이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조직에 크나큰 해악이다. 이들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에 휘둘려 단기 이익을 탐할 때 조직은 반드시 위기에 빠진다. 이들이 심지어 에이스로 평가받고 승승장구 높은 자리에 올라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기라도 한다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애초에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겨선 안된다.




의도는 무기다. 단 공격에 쓰지 말고 방어에 써라

의도에 능해져야 한다. 매사에 의도적일 필요는 없지만, 상대의 의도를 파악해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의도를 잘 다룰 필요가 있다. 상대가 칼로 나를 겨눈다면, 나에게도 막아낼 방패가 있어야 한다. '쟤는 동기니까', '김 과장은 평소에도 친했으니까'라는 안일한 생각은 스스로를 무방비 상태로 두는 것과 같다. 종종 사회생활에서 자기도 모르게 뒤통수 맞는 이유는 상대는 물론 스스로의 '의도'조차 제대로 알고 다루지 못해서다.


나의 순진함과 무관하게 누군가는 서늘하고 뾰족한 의도를 가지고 나를 노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어디에 빈틈이 있을까?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받을까? 저렇게 말하는 의도가 뭘까? 끊임없이 계산하는 존재가 내 옆에 없으리라고 누가 보장할까?


유유상종, 보통 좋은 사람 곁에 좋은 사람이 모인다. 그러나 좋은 사람인 척 웃는 얼굴을 한 채 기회를 엿보는 포식자 역시 존재한다. 그들은 허점이 드러나는 순간, 주저 없이 사냥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 설혹 그 사심이 드러나더라도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한 없이 순진하기만 한게 미덕은 아니다. 사람 좋고 잘 믿는 것이 약점이 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누군가 칼을 빼들고 달려든다면 방패를 들고 방어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심은 양날의 검이다. 남발하면 다친다

누구나 사심은 있다. 어떤 이해관계든 내 이익이 우선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사심이란 게 묘하다. 아무리 교묘히 감추려 해도 지나치면 반드시 티가나고 무엇보다 탈이 난다. 패션에 OOTD(Outfit of the Day)라는 말이 있듯, 사심도 때와 장소, 상황에 맞게 적절히 부려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사심이 개입되면 무언가 어색해지고 주변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갖게 만든다.


겉으로 순진해 보이는 사람도 바보는 아니다. '저 사람은 항상 제 이익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항상 계산을 한다'라는 인식은 은연중 쌓인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편익의 중심에 특정한 이해관계자가 늘 보인다면 결국 사람들은 눈치챈다. 평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한두 번의 이기적 행동은 큰 영향을 주지 않겠지만, 여러 차례 누적되면 반드시 부정적 인식으로 굳어지고 경계의 대상이 된다. 황색불이 켜졌는데도 그 시그널을 인지하지 못하고 혼자만 똑똑한 척 사심을 부리는 사람치고 그 끝이 좋은 경우를 보지 못했다.


지독한 사심을 주변에 들키고도 "직장생활,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라며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대단히 유능한 전략가라고 생각할까? 천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뱀 같은 인간이라는 평판과 함께 언젠가는 '반드시' 배척된다.


다 같이 좋아야, 나도 좋은 법이다

전략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로울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조직에서 내 사익만 추구하면 당장은 득이 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자신을 포함해 모두가 손해를 본다. 누군가 규칙을 깨며 눈앞의 편익을 챙기기 시작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행동에 동조하게 되고, 조직을 지탱해 온 신뢰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순간, 동료는 함께 협력하고 성장해야 할 파트너가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 짓밟아야 할 경쟁자로 바뀐다. 평화로웠던 평원은 순식간에 불지옥으로 변한다. 조직과 동료가 쇠퇴하면 결국 그 피해는 나에게도 돌아온다.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다. 자신이 발 딛고 선 토양이 건강해야 나 또한 설 수 있다.


사심 가득한 꼼수가 한 번 드러나면, "또 그러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시작된다. 불신이 자라난다. 신뢰는 종이와 같다. 한 번 구겨지면 다시는 원래 모습으로 펴지지 않는다. 리더라면 선을 넘는 사심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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