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수오지심_ Integrity_ 2. 저항
잊을만하면 학폭 논란이 터진다. 이번엔 연예계다. 한창 주가를 올리는 중인 여배우 송모 씨가 가해자로 지목됐다. 배우가 유명세를 타면서 고교시절 지속적인 학폭에 시달렸다는 복수의 피해자가 나타났다. 피해자들의 진술은 꽤나 구체적인데 비해 배우 측은 별다른 대응을 못하고 있는 양상이다. 진실여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쯤 되니 연예계, 스포츠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학폭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불과 얼마 전 학폭을 소재로 한 '더글로리'라는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학폭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학폭'에 대해 단호하지 못한 사회적 인식 역시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에이 애들 사이에 그럴 수도 있지. 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
라며 대수롭지 않아 하는 인식.
그런데 정말 그럴까?
학폭은 '학내에서 힘의 불균형을 이용해 타인의 존엄을 침해하는 반복적인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뜻한다. 무리를 지어 약한 대상을 찍어 지속적으로 따돌리고 괴롭히는 일이 어찌 어린아이들의 장난일 수 있을까? 두말이 필요 없는 집단 범죄다. 학폭에 시달리다 끝내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아이들의 뉴스가 종종 들려올 때면 부모의 입장으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다행히 그 인식은 조금씩 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2026학년부터 학폭 이력자들은 입시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을 비롯해 서울 시내 주요 10개 대학 모두 학폭 처분에 대해 감점을 주거나 부적격 처리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는 교육부가 2026학년도 대입부터 학폭 가해 기록을 대입에 의무 반영토록 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문제는 타인, 그중에서도 약자를 콕 집어 의도적으로 괴롭히고 이용해 쾌감을 얻거나 제 이익을 추구하려는 문제적 종족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성향을 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들이 회사 조직에 들어와 인정을 받고 리더의 위치에 오르면 학창 시절의 학폭과 같은 일이 조직 내에서 빈번히 벌어진다. 바로 직장인 괴롭힘이다.
지난 2019년 제정된 근로기준법 76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명확히 정의하고 있다. 학폭의 정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금지법이 제정될 만큼 빈번한 직장 내 괴롭힘. 이 불의한 현실에 대처하는 우리의 사회적 인식 역시 학폭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직장생활 하다보면 다 그런 거지 뭐."
"나만 아니면 돼."
"가만있으면 중간은 간다. 나서지 마"
이런 생각으로 누군가 집단 따돌림을 당하거나 크고 작은 괴롭힘에 시달려도 침묵을 택하는 일은 얼마나 잦을까? 물론 이해는 된다. 위계질서가 명백한 조직 내에서 힘을 가진 자의 행위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고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른바 내부고발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그 선험적 사례도 익히 알고 있다.
더구나 극단적 결과주의, 전쟁통 같은 경쟁이 만연한 오늘날 일터에 '사회적 정의' '인간적 따스함' 따위 무형의 가치들은 눈앞의 이익, 금전적 이득에 밀려 '한가한 타령'이라는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지 않은가? 오히려 가해자의 입장에 가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여겨야 될지도 모른다.
내 경우, 다행인지 불행인지 17년 직장 생활에서 직장 내 괴롭힘, 사내 비리 따위 불의를 직접 겪거나 목격한 적은 없다. 다만 당시 소속그룹의 오너이자 회장의 행실에 대해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여직원의 중요 부위를 더듬고 상스러운 농담을 서슴지 않는 초로의 노인, 그러나 수행원을 비롯해 그 주위 어느 누구도 나서서 말리지 않는다는 전언을 들었을 때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분노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행위의 대상이 된 일부 당사자의 태도였다. 마치 은혜를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워한다거나 그 장면을 지켜보며 '나에게도 그런 기회? 가 왔으면'하고 은근히 바라는 사람도 일부 있다는 속사정을 들었을 때였다. 나는 입을 헤~ 벌리고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라는 말을 절로 뱉었던 것 같다. 정말이지 혼란스러웠다. 대체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선명하다. 현실로 돌아와 당시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면, 분연히 나서서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했다면, 나만 우스운 꼴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자기검열까지.
이렇듯 그 알량한 '정의'를 말하고 '실행'하겠다는 의지 혹은 다짐은 힘의 논리와 먹고사는 문제등에 엮여 기묘하게 왜곡되기 마련이다. '내부고발자'를 터부시 하는 문화 역시 꽤나 강력하다. 불의를 보고 앞뒤재지 않고 실제 행동에 나섰을 때 왜 조용히 처리하지 못했냐는 내부의 시선, 무언의 꾸짖음, 덮고 넘어가면 좋을 걸 왜 나서서 일을 키웠냐는 원망의 눈초리를 묵묵히 견뎌낼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무리 거듭 고민해도 썩어가는 것을 썩어간다고 말하지 못하는 일,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로 합리화하는 일, 나만 아니면 된다며 본 것을 보지 않은 것처럼 외면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세상 모든 일을 흑과 백, 선과 악처럼 일도양단 나누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내가 생각하는 명확한 기준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내게 그것은 “나의 행위로 인해 타인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이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단순할수록 좋다. 그 한 가지라도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내면의 약속, 늘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명확히 세우는 일이다.
리더라면 이 기준은 조금 더 무거워져야 한다. 불의한 일이 생겼을 때 적어도 “나만 아니면 된다”며 외면하거나,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합리화로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안다 그렇게 마음먹어도 온전히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견뎌야 한다. 부끄러움을 알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하는 일이다. 끊임없는 성찰만이 나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든다.
불의에 상처 입은 약자는 언제나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직장생활은 다 그런 거라는 이유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팀원의 표정이 자주 굳어 있지는 않은지, 회의에서 유독 목소리가 줄어들지는 않는지, 메시지 답변이 늦어지고 잦은 결근이나 병가로 이어지지는 않는지. 사소해 보이는 듯하지만, 미묘한 공기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아들을 군대 보낸 부모의 눈에 군복 입은 병사들만 눈에 들어오듯, 내 사람이라는 유대감, 진정성 있는 관심을 가질 때 작은 징후라도 포착이 가능하다.
단순히 업무 성과만 살피는 관리자가 아니라, 사람의 기류를 읽는 레이더가 되어야 한다. 신호를 외면하면 작은 노력으로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커지고 곪아터져 조직 전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 “설마”라는 생각 하나가 불의의 씨앗을 키운다. 신호를 포착하고 선제적으로 움직일 때, 리더는 비로소 팀을 지킬 수 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위계가 뚜렷한 조직 안에서 권력자의 불의를 지적하는 일만큼 부담스러운 일도 없다. 그러나 리더라면 최소한 자신의 영향권 안에서 벌어지는 불의만큼은 침묵해서는 안된다. 권한과 책임은 동전의 양면이다. 권위의 단맛만 즐기고 책임은 회피하는 리더는 존재 자체가 불의다.
거창한 영웅담일 필요도 없다. 단지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불의를 멈칫하게 한다. 그 한마디조차 삼킨다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또한 리더의 행동은 단순한 공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울분을 함께 토로하는 것만으로는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리더의 역할은 무익한 감정의 소모가 아니라 불의 가능성의 차단과 피해 해소 그리고 재발 방지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에 따른 제도적·실질적 조치를 취하는 것, 그것이 정의의 실현이다.
물론, 그런 행동은 불편함을 부른다. 때로는 찍히기도 한다. 그러나 찍히는 것이 당장의 몰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원칙대로 일관되게 행동하면 결국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쟤는 원래 저런 사람이야.” 그때부턴 소신있는 사람이 된다. 이리저리 계산하고 눈앞의 유불리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리는 처신이야 말로 줏대 없는 인간으로 찍혀 도태되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