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ps02. 나의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02. 나의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숨기고 싶었던 비밀 이야기
나는 평범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나 자상한 부모님의 사랑을 잔뜩 받고 자랐다. 하지만 내 안에서 무언가 결핍되어 있음을 느끼고는 했다. 이를 테면 '타인의 사랑'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어디를 가던지 줄곧 나의 4살 위의 언니와 비교가 되고는 하였다. 나와 언니를 비교를 해대는 사람들이 나의 부모님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의 내가 겪기에는 큰 상처로 남았던 것 같다. 나의 언니는 어릴 때부터 여리한 몸과 예쁘장한 얼굴에 매우 싹싹한 성격이었다. 이를테면 전형적인 '여성스러운' 여자아이였다. 우리는 한 배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언니가 싫지 않았고, 또 우리는 친구처럼 사이좋은 자매이기도 했다. 타인에 대한 말들 때문에 언니를 미워했던 적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속에서는 혼자 열이 바쳐 차오르는 적도 많이 있었다. "너는 언니랑 다르게 생겼구나." 이 말의 뜻이 절대 긍정적 일리 없었다. 명절이나 제사가 있을 때 친척네 집에 가게 되면 여느 때 보다 더욱 자격지심을 느끼고는 했다. 타인에 의한 자격지심이 아닌, '나' 스스로에 대한 자격지심 말이다. 본래 진짜로 가난한 사람에게 장난으로 "거지야!"라고 말하면 실례가 되듯이 '나' 스스로 모든 부분을 찔려하고는 했었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일화가 몇 가지 있다. 친척 어른 중 한 분이 내게 물었다. "너는 무슨 띠니?" 갑자기 나의 띠를 물어보는 것이 이상했지만 나는 대답했다. "돼지띠요." 나의 대답에 나를 놀리는 듯 비아냥 거리는 말투와 언행이 이어졌다. "네가 돼지띠라서 뚱뚱하구나." 지금 와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이 시절의 나는 전혀 뚱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여태껏 어려서부터 내가 뚱뚱한지 알고 살았다. 하지만 내가 '그들과 비하자면' 뚱뚱했다는 점이다. 친척네 가족들을 포함한 나의 가족들은 모두 저체중에 속했다. 그에 비해 나는 '마른'편이 아닌 표준체중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에 대해 내가 과체중이라는 것에 대해 강요받기 시작했다. "너는 우리 가족이지만 우리 가족들이랑 하나도 닮지 않는 것 같아." 친척 어른들의 장난 섞인 말에 그때의 나는 능청맞게 넘어가는 법을 몰랐었다. 곧이곧대로 지금 나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표정으로 한 껏 드러내고 말도 섞지 않으려 하는 것이 어른들 눈에는 내가 고분 하지 않는 말 안 듣는 아이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또 다른 가족들의 눈에는 내가 '못마땅한 아이'일 뿐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어른들 뜻대로 고분 해지면 참 좋으련만 나는 그렇지 못한 철부지였다. 그저 더 삐딱하게 굴고 매번 친척네 집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길 때면 가지 않겠다는 시위를 해댔다. '내가 언니처럼 싹싹하고 예쁘고 마른 몸매였으면 어땟을까? 나도 어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기는 한다. 사실 그 질문은 아직까지도 의문인 점이 많다. 어린 나이를 지난 지금에 와서도 나는 그런 일들을 겪고 있다. 더 이상 비교 없는 '나'라는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언니보다 열심히 살기도 해 보았다. 공부도 열심히 해보고, 언니보다 좋은 대학에도 들어가 보고, 직장도 더욱 번듯한 직장에 다니려 애썼더란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역시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너는 생긴 건 둔해빠지게 생겨서 그런 일을 하는 게 신기하네." 아마 내가 여태껏 들었던 말들 중에서도 가장 속상한 말이 아닐까 싶었다. 여태 많은 인신공격과 비아냥거리는 농담들을 들어왔지만, 그런 수모의 말들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 듣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그저 인정받지 못할 존재라니. 나이가 들면서 어른들께 굽히는 법도 배워 아양도 부려보고 내가 번 돈으로 용돈도 드려보았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나는 늘 어린 시절의 '못생기고 말 안 듣는 철부지 어린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슬프면서도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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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장 부끄럽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 '못생겼다'라는 유치하고도 1차원적인 말이다. 누구나 예쁜 것에 대한 동경은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도를 넘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바로 '못생겼다'라는 저 짧고 강력한 단어에서부터 시작된다. 유년시절 나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불쾌한 상황을 맞닥드릴 때가 많았다. 그것은 나에게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였다. 초등학생 시절 같은 반 또래 친구와 놀고 있었는데, 그 나이답게 옆에서 남자아이기 내 친구를 놀려댓다. 나는 저리 가라고 하며 친구와 함께 그 남자아이를 나무랐다. 그 덕에 그 남자아이에게 보기 좋게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하지만 나와 함께 그 남자아이를 나무랐던 친구는 그 자리에서 나처럼 똑같이 맞지 않았다. 후에 들렸던 소문에 의하면 그 남자아이는 나는 못생겼기 때문에 때렸고, 그 여자아이는 예쁘게 생겼기 때문에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그때 남자아이에게 맞아서 아팠던 것보다는 내가 못생겨서 나만 맞았다는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별거 아닌 거 같은 이 일화는 후에도 나에게 외모 콤플렉스라는 것을 안겨준 작은 소동 중 하나였다. 그 후 나이가 들수록 나는 나의 외모를 가리기 급급해졌다. 광대를 가리고 싶어 머리를 절대 묶고 다닌 법이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그런 나의 모습을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답답하게 머리로 그렇게 얼굴을 다 가리고 다니니?" 한창 사춘기의 나이 때 외모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하나 그 정도가 도를 넘었다나..
나는 수학여행이든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소풍이던지 간에 정해진 시간보다 늘 2시간씩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일찍 일어나 30분가량 머리를 다듬고 1시간 반 동안 화장을 하고 옷을 고르는 것이 나의 관례로 자리 잡았다. 지금에 와서는 '자기 관리'를 위한 것이라 포장하고는 하지만 늘 가슴 한구석에 조그마하게 자리 잡힌 나의 낮은 자존감에서 오는 습관이라 생각된다. 이미 한참도 더 지난 작은 에피소드들이지만 아직까지 그것에서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얻지 못하는 내가 한심할 때도 있다. 이제껏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작은 나의 치부인 것이다. 나는 예쁘다는 말보다는 줄곧 개성 있다는 말을 들어왔다. 이는 부정적 의미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 나를 조금 더 사랑한다면 당당해질 수 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늘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
한창 사춘기의 나이에는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마음은 항상 나의 마음에서 그쳐야만 했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이는 늘 내 친구를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사람의 좋아하는 데 있어 마음만을 본다고 하면 그것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도덕적인 이치일 뿐이지, 나 조차도 그럴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외모나 보이는 모습이 상대방을 좋아하는 데에 있어서 100%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외모 또한 상대방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를 탓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거라 인정했고, 그 당연한 것 안에 들 수 없는 '나' 자신이 싫었을 뿐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와 친구가 되는 쪽을 선택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절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마냥 소녀스러운 어디에나 있을법한 '여자아이'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나는 다른 여자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털털한 척 해왔고, 말투나 행동도 남자아이들처럼 바뀌었다. 비록 나는 그 애는 가지지 못하지만 나는 이토록 너네보다는 이 아이와 친하다는 것을 보이고 싶은 유치한 심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상대방과 말을 하는데에 있어 예쁘게 말하는 법은 잊었더란다. 괜히 말을 툭툭 던지듯이 말하여 상대방의 속을 상하게 만들었다.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고 했던가, 나의 말에 누군가 속을 상해하면 "이래서 남자애들이 여자애들보다 더 편해. 여자애들은 너무 따지는 게 많아."하고 핀잔을 주고는 했다. 나는 쿨하지 않은 사람과는 맞지 않다며 혼자 자위했다. 이제와 생각해본다면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들이다. 유치한 짓거리를 하는데에 있어 내 생각을 정당화하려 들었던 것이다. 누구를 위한 합리화인가?
여자는 나이가 들 수록 자신을 꾸미는 법은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고 했던가, 물론 아직까지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에 예쁜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유년시절 속 친구들이 기억하는 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런 나의 모습에 종종 연락이 오는 친구들이 있다. 제일 처음 연락 온 친구가 내게 했던 말은 "너 정말 많이 바뀐 거 같아"였다. 그 말이 그때는 왜 그렇게 귀에 거슬렸는지 모르겠다. '내 모습이 바뀌었다고 이제 와서 연락하는 꼬락서니는 뭐지?' 하며 코웃음을 치고는 그대로 연락을 씹어버렸다. 물론 '나'라는 자신 자체는 그대로이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 알게 된 관계의 사람들에게 나의 과거의 모습을, 나의 부끄러운 치부를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과거의 '나'를 '나'라고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추억으로 보관될 것이라 생각하며 찍었던 사진들도 전부 지워버렸다. 아주 어릴 적의 사진만이 남아있었고, 나의 치부라고 생각되는 나의 모습도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지우려 한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나를 똑바로 보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아직까지도 나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여느 에세이처럼 나의 낮은 자존감을 극복하였다는 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지금 이 글에서 만큼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나는 아주 나약하면서도 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