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것
그녀의 목소리
지이잉-
휴대폰이 울린다.
"고과장님 저 박이사예요."
예의 그 나긋한 목소리로 시작한다.
"네 이사님. 안녕하세요."
"저희꺼 무슨 문제 있어요? 메일 보고 즈이 사장님 난리 났어요."
"아... 그래요? 아직 문제 있는 건 아니고,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준비를 하실 수 있으면..."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다.
"그거 딱 세대 만든 건데, 두개는 독일 가있고 하나는 국내전시 중이에요. 스페어가 없어요 과장님."
보이지 않아도 사라진 미소가 목소리에서 느껴진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아..."
5초 정도의 정적이 흐른 후,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더 의미심장해진다.
"과장님, 제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요, 이번에 미국 전시회 못 들어가면, 정말 큰 일 나요. 이런 말씀까진 좀 그런데. 즈이 사장님, 지금까지 소송을 백 건도 넘게 해 본 분이에요."
"네? 소송이요?"
"네에. 과장님, 잘하셔야 해요. 꼭 좀 해주세요. 네?"
첫 소송에 얽매일 뻔한 이후 꼭 십 년 만이다.
하지만 그땐 내용증명이 먼저였다.
이번엔 수화기 너머 나의 귀로 바로 전해져 오는 서늘한 그 단어.
소송.
불투명하다
"고과장, 이번엔 그거 진짜 안돼. 불가능해."
미국측 파트너의 카톡을 보자마자 전화를 건다.
"해주세요 제발요. 저 죽어요."
"그건 고과장이 죽어도 안돼."
L사의 물건을 실은 배가 전시 시작일 꼭 하루 전 도착예정이라는 스케줄이 떴다.
배가 도착하고서도 통관에 보통 일주일, 그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는 건 이미 나도 잘 안다.
사람이 어찌하는 게 아니고 시스템.
시스템.
너무 싫다.
"미국에서 안 되는 게 어디있어요, 어떻게든 만들어 내는 게 미국이잖아요."
"뭔 소리야 고과장 허허허. 아무튼 애는 써보겠지만. 안될 가능성이 높아."
그래. 그래도 이제 가능성이라는 말까지는 끌어냈다.
이럴 땐 내가 달이었으면.
달이 바다를 밀고 당겨서 밀물 썰물이 생긴다던데.
바다를 확 끌어당겨 배가 조금이라도 빨리 닿게 할 수 있으면...
지금부터는 최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회사생활은 정말, 이대로 끝이 날 수도 있다.
그것도,
거액의 보상금을 떠안은 채.
메일을 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에 맞닥뜨릴수록.
나는 기본을 찾는다.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근본의 마음.
속이거나 꾸며내는 건 오히려 악수.
진심을 찾는다.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것.
이런 식으로까지 해서. 만들어 내고 싶은 것.
메일을 쓴다.
특출 나게 영리하지도, 시사나 상식이 많은 편도 아니다.
그래도... 풀어야 하는 일.
그나마 내가 남들만큼이라도 하는 게 있다면.
그건 글 뿐이다.
진심을 전하는 글.
메일을 쓴다.
L 사의 대표메일에 관련 담당자의 메일 주소를 모두 참조한다.
사원에서부터 대표까지 모두 이 메일을 볼 거라는,
부끄러움 따위는 사치다.
메일을 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최후의 경우 어떤 식으로 수습할 수 있는지.
일시를 나누고, 구체적인 금액을 명시한다.
그리고.
어떤 마음인지를 적는다.
한 번이라도 잡고 싶었던, 떠다니는 구름 같았던 L 사를 처음 영업하기로 마음먹은 날.
처음 기회를 허락받았을 때의 세상 다 가진 듯했던 기분.
내가 보이고 싶었던 열정. 성실함. 정도를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던 나의 방식들.
요즘 세상에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생각은 접는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한다.
메일을 쓴다.
이렇게 불편한 상황을 만든 데 대한 죄송함.
살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다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붙들고 마무리를 짓겠다는 나의 약속.
회신이 없어도 되는.
메일을 쓴다.
식사 자리
광장에 위치해 있는 레스토랑까지 걸어가는 발걸음이 가볍진 않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제 정산 얘기인가.
두달을 일년처럼 보냈다.
L 사는 급한대로 계획에 없던 추가 제품을 만들었고.
나는 매일 밤을 새다시피 독일과 미국으로의 전화통화에 매달렸다.
코피가 났고 위염이 찾아왔다.
그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선박 일정이 당겨져서 이틀이나 일찍 접안 예정이며.
독일측에서 미국측으로 협조공문을 여러번 보냈고, 미국측 파트너도 하루라도 더 번 시간으로 해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고.
그렇게 전시는 일정에 맞추어 시작 할 수 있었다.
그 전시의 마지막 날, 나는 사장의 저녁식사 자리에 간다.
"안녕하세요."
야외 테이블에 자리한 L 사 식구들은 박이사 외에도 엔지니어와 감독 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가 사장이다.
"어, 고과장 와서 앉아."
L사의 다른 담당자들도 한결같이 인상이 선하다.
사장만 빼고.
박이사가 다가와 자리를 안내하며 의자를 잡아준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어이, 고과장."
사장이 입을 연다.
"네."
"이번에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제가. 죄송했습니다."
"인사해, 여기 이번에 우리 일 진행해준 H 사 고우리 과장., 여긴 우리딸. 여기서 공부중이야."
그러고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 있다.
긴 생머리의 세련된 그녀.
곧 박사과정을 마친다 한다.
"안녕하세요. 고우리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아빠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듣기는 왜.
사장은 무심히 말을 던진다.
"배울게 많은 사람이야. 언니 동생하고 친하게 지내."
툭.
그 다음말은 들리지 않는다.
아마 주문을 했는지 였던지, 인원이 다해서 몇인지
그런 종류의 것이었나?
배울게 많은 사람.
배울 것도 있는 사람.
진심을.
들어 준 사람.
사람과 하는 일.
진심이 닿는 곳.
(끝)
.
내년이면 다시 10년.
아직도 L 사는 나의 VIP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