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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바다 (1)

있다

by 아는개산책

내가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해

아무도 내가 온 적이 없다고 말해

나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어


그러면 나는,

그 시각 그곳에 존재했을까


나는 괜찮다 말해,

모두가 나는 괜찮지 않다 말해,


그러면 나는

괜찮은 걸까

괜찮지 않을 걸까


믿을 수 있을까

무엇을.



동호회


"과장님 샀어?"


여직원들과 점심을 하고 돌아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강훈의 목소리가 나를 기다렸단다.


"안 사"


의자를 잡아빼며 답한다.


"뭔 줄 알고"


"노웁."


"정과장님이 그러던데, 이번에 등산동호회, 따라가면 등산화 지원해 준대."


공짜신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실장이 웬일로 목소리를 높인다.


"자, 이번 주말에 등산 가실 분, 미리 저한테 와서 알려주세요. 그리고 이번에는 특별히 등산참가자 전원에게 등산화 비용을 지원 하신다는 사장님 지시가 있었으니까, 한 명도 빠짐없이, 어? 신청해~어? 고과장~"


모두에게 말하듯 하다가 나로 마무리 된다.

나는 보고 있던 시선을 슬그머니 모니터로 옮긴다.


"그냥 한 번 갔다 오면 등산화 생기잖아. 가요"


"나 애기야. 평지도 못 걸어."


강훈은 다시 한번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공짜의 유혹


결심은 나중에 하더라도, 쇼핑이라도 해볼까.


등산화 사이트에 접속해 본다.


장바구니가 찬다.



산 초입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또 한 번 넋이 나가있다.


온통 파래도, 숨 넘어가게 붉어도, 반짝이는 내 사랑 불빛뿐이래도

창문만 통해보면 쉽사리도 혼이 나간다.


"또 멍하네, 먼 생각을 그렇게 해? 고양이 생각해?"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있던 강훈이 잠시 쉬어보려는지 툭 내뱉는다.


고양이를 혼자 집에 두고 나오는 건 너무 무거워.


"어 빨리 집에 가야 는데. 아놔 왜 지리산이라고 미리 말 안 한 거야"


"공지 왔는데, 과장님이 못 본 거지."


-아씨. 단체메일 같은 거.


산의 초입에서 다들 한 번씩 가방을 고쳐 메고 신발끈을 조인다.


"과장님, 산 타본 적 있어요?"


커다란 눈망울이 순한 은희가 옆으로 다가와 지팡이가 되어주려는 듯 팔짱을 낀다.


"아주 옛날에."


"전생? 크크. 아 빨리 걷기나 해요 과장님"


강훈이 팔꿈치를 치며 앞서 나간다.


산은 만남이고 헤어짐이고 간절함이고 그리움이야.

하수들이 뭘 알겠노.


산을 오른다.


운동력을 수치로 따지자면,

우린 모두 "0"

강훈 너마저도 "0"

나는 보았지.

열 걸음도 못 가 손수건을 꺼내드는 것을.


숨은 금세 턱끝까지 차오르지만,

여전히 반갑다.

아니, 나를 반긴다.

고맙다.


산아.



산장


해가 다 넘어가기 전에 도착한 산장.

앞으로 모이는 발걸음마다 죽겠다는 곡소리가 묻어 나온다.

아직 반의 반도 못 올라간 것 같은데.

이름값은.

이름값이다.


"이런데 펜션도 있구나."


"저는, 펜션 아니고 돗자리만 깔아줘도 잘 거 같아요."


언제나 은은해서 은희인데, 은희 조차 앓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나는 이미 죽어 있는 게 아닐까.

발에 감각이 없다.


"나도 더 못 걸어, 나를 안고 가던지 밟고 가던지"


나는 말하면서 메고 있던 가방을 땅바닥 아무렇게나 철푸덕 내려놓는다.


빨갛게 익은 얼굴 위로 흐르는 땀을 닦느라 정신없던 강훈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밟을라고?


"오늘 밤에, 방 하나에 모여서, 술? 네? 오케이? 내가 싸왔어, 좋은 거."


모여있는 여직원들 눈을 하나씩 맞추며 심상치않게 웃는다.


"그래, 먹고 죽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술판이 벌어진다.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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